2020년 8월 30일 주일예배 설교

 

연일 광화문, 사랑제일교회에서 촉발된 감염확산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 당국은 3단계 격상을 놓고 시름을 더해간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경제적 타격 때문이겠다. 그에 준하는 단계를 유지하고서 최대한 막아보자는 것이니, 효과를 봤으면 좋겠다. 모두가 제대로 된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킬 때다.

이 와중에 전체에 비하면 일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일부라고 치부하기엔 파장이 너무나 큰, 교회들이 감염확산의 장이 되고 있다. 어느 교회 사람들은 당국자의 물음에 교인이면서도 아니라고 잡아뗐는가 하면, 연락이 두절 돼서 방역에 어려움을 주는 일도 있었다.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비참한 마음이 그에게 파고들지는 않았을까? 사탄이 그를 밀까부르듯 했을까봐 안타깝다. 창원에서 확진판정이 된 어떤 사람은 광화문집회에 다녀왔으면서도, 아니라고 거짓말하다가 대학생 아들, 고등학생 딸에게 감염시켰고, 자녀가 다니는 학교는 수업이 중단됐을 뿐 아니라 503명 학생과 교사가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 감염자체보다도(누구나 걸릴 수 있는 것이다) 개인 한 사람의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 얼마나 큰 파장을 미치는가. 저는 이런 모습이 개인 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이기심과 이익 앞에, 거짓을 용인하고 힘으로 진실을 누르며 그래서 가짜가 난무하게 된 우리사회, 우리시대의 자화상이다.

정치의 야욕이 있는 목사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사람들을 동원하고, 동의한 적도 없는데 한국교회 이름을 마음대로 가져다가 자기들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선전선동에 활용하고 있어 화가 나기도 한다. 부산기독교총연합회는 집합금지 행정명령에 불복하고 예배를 강행할 방침을 밝혔다. 예배가 목숨보다 소중하다며 교회가 위기라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한다. 예배를 강행함으로 교인들도 위험에 빠뜨리고, 이웃까지도 어려움에 처하게 만드는 현실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다가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하게 됐을까? 정말 어딜 가나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다.

 

저는 평소처럼 교회를 지키며 기도와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토요일이 되면 주일에 우리 교인들을 만날 생각으로 기대가 되곤 했는데, 요즘은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하기를, 이 어려운 상황에 지혜롭기를, 비록 교회 공간에서 대면 예배는 하지 못하지만 믿음을 지켜, 다니엘이 다락방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해 매일 기도했던 것처럼 굳건한 믿음으로 신앙을 지키기를, 성령이 충만해지기를, 더 뜨겁게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기를 간구하고 있다.

지난 주에 잠시 언급한 바가 있던 밀란 쿤테라는, ‘농담’이라는 작품에서 루드빅이라는 사람의 입을 통해, 자유를 빼앗겼을 때, 시간은 생살에 와닿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았는데, 시간이라는 덩어리를 느끼면서 나날을 보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변명과 원한으로 그것을 지루하게 소비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고통과 고난, 환난과 어둠의 시간이 우리의 생살에 닿는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소중한 것들을 되찾으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주님을 올바로 알고 깨닫고 믿음으로 주님의 비전과 사명이 여러분에게 육화되기를, 혹은 체화되기를 기원한다.

 

고난과 어둠의 시간이 우리의 생살에 닿을 때, 의미있고 보람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오늘의 말씀 중에 5-7을 우리가 숙고하고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목사님, 요즘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됩니까?’ 반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믿음에 회의(부덕함에 대한 회의)가 들고, 회의감에 인간적 생각(지식)이 더해지고, 그 인간적인 생각이 차오르면 절제한다는 것과는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참을 수 없고, 경건, 우애, 사랑을 더한다는 것은 오히려 시험거리가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은혜로운 상황이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한 상황인데, 말이 안된다고 속살거릴지도 모른다.

오늘의 말씀은 성도들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성숙해가는 단연하고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마치 부흥회가 끝났을 때, 그 감동과 여파에 더 성숙해지는 그리스도인이 됨을 사모하는 상황에서 말씀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베드로후서 2장의 내용이, 그 짧은 유다서에서도 나온다. 성경통독을 하지 않으면 한 번도 접하지 못할 수도 있을 만큼 비중이 낮다. 인체의 맹장처럼 없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성경에 기록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베드로후서에서, 타락한 천사에 관한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해 상기시킴, 무법한자들의 행실, 발람의 이야기가 유다서에서도 동일하게 나온다. 이것을 보면, 당시 교회와 세상의 문제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거짓 선지자와 선생들이 일어났다. 교회와 세상을 교란시키고 미혹시키고 그 때문에 선량한 신자들과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지게 됐다.

2장8절을 보라. 소돔과 고모라의 롯의 이야기를 빗대서 전달하고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멀쩡히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의 가슴까지 멍들게 만들고 상처를 주었다.

이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서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이성 없는 짐승 같다.’(벧후2:12, 유1:10) 제어가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 적반하장, 궤변, 뻔뻔함, 아무도 못말린다. 벧후2:13-14은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가 일어나 당시에 벌어지고 있던 영적 사태를 설명하고 있다. 어느 시대나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는 이단, 사이비가 없을 수 없겠지만, 베드로나 유다도 사도가 되어 동일한 고민과 어려운 문제를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의한 삯을 좇아간 발람처럼 사람들을 어그러진 길로 내몰고 있었다.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사람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저지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와 교회가 혼란에 빠졌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은 여덟이 되고,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럼, 로그함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처럼 그 수가 퍼져갔다.

 

어느 목사님이 SNS에 교회의 본분과 역할에 관한 바른 신앙에 관한 글을 쓰셨는데, 무뢰배 같은 사람들이 몰려와 욕설이 난무한 비난의 댓글을 남겼다. 기독교인이라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정말 맞을까? 기본적인 예의와 품격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한편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러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사람들 하고는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쓸까봐 말을 섞거나 상종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여겼는데, 어쩌면 회피가 아닐까, 하는 비겁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무식한 변론들은 그쳐야겠지만,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 목회자로서 소신과 용기 있게, ‘아니오’를 했어야 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악한이들은 광적인 음모론의 복면을 쓰고 공격하는데,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다고 하여 힘을 합치기는커녕, 여리고의 강도 만난 자를 지나친 것처럼 진리와 정의를 외면하지 않았던가 돌아보았다. 교회는 많지만 예수에 대해서 무지한 시대가 되었고, 성경공부와 제자 훈련은 많지만 예수님의 삶과는 무관한 시대가 됐다.

 

벧후2:16을 보라.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2:16)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소리를 지르게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무엇으로도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할 말을 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그래서 그 미친 행위를 저지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책임을 방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도 없는, 조명이 커진 어둑 컴컴한 예배당 바닥에 업드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는데, 주님께, 슬프단,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울고 계신다. 깨어있을 수 없느냐고, 아직도 자느냐고, 흩어진 제자들처럼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외면할 것이냐고.

‘우리의 무지함이, 우리의 비겁함이, 우리의 죄악이 2천년 전 십자가에 못박았던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런 착잡한 심정과, 응급환자가 응급실을 찾아 헤매다가 의료진이 없어 받아주는 데를 찾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답답한 소식을 듣고 20년 전 응급실에 갔는데, 그때도 의사들의 파업으로 난감했던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울울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보내고 있는데, 3절의 말씀이 제게 들어왔다.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성경이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베드로도 이단과 사이비와 거짓선생,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세상과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는 어지러운 현실에서 어땠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든 역사를 고뇌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의 이름으로 절망스럽고 답답하며 위기를 맞은 현실에서 일어나 새 소망을 가지고 전하는 말씀이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왔을 때처럼 말이다. 예수가 죽자, 제자들은 흩어지고, 제자들의 공동체는 위기를 맞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심으로 예수운동과 교회공동체로 성장하는 기폭제가 됐다. 그 때처럼, 주님이 다시 찾아오심을 깨닫자, 베드로와 유다는 신앙 공동체가 새롭게 믿음으로 일어나길 소망했다. 빛을 본 것이다.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예수의 십자가에서 발견한 깨달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승리와 희망의 시작이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고린도전서도 말씀했다. 예수의 십자가 지심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다.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아니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을 사랑하셨다(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때로는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나와 타자의 생명이 다를 수 없음을, 그래서 차별하거나, 분리의 장벽을 세울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생명 존엄성의 예수의 깃발을 든 경건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단순히 교회로 한 명을 더 끌어들여 교인 만드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들어와 예수 생명을 나누게 되기를 주님은 바라셨다.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란 성조기와 태극기와 함께 들린 십자가가 아니라 생명의 사랑과 존중 안에 나타난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용서는 얼마나 따뜻한 일이며, 화해는 얼마나 포근한 평화로움이며 양보와 배려는 얼마나 따뜻한 마음이며 나눔과 섬김은 얼마나 따뜻한 실천인가?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기고, 누르고 차지하고 가져야만, 뱃속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부여받은 일과 능력은 이런 일 아닐까? 세상적인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유한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힘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베드로는 교회와 세상이 어지럽고 고난 가운데 빠지게 된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위기를 맞았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혐오하기 시작하고, 교회가 추문거리가 된 것만 같다. 그렇다고 덩달아 동요될 필요는 없다. 사실 엄연히 주님 기뻐하시는 신앙 가운데 선 건강한 성도들이 거룩한 씨, 그루터기처럼 곳곳에 우리의 삶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발람의 길을 따르는 위기의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는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릇된 행보를 멈추기를 바라시는 경종을 들어야 한다.

사실 지금 교회의 위기는 대면예배를 드리고 못드리고가 아니다. 코로나가 집단 발생한 교회 때문도 아니다. 예수 곁에 다가가지 못했고 예수님을 닮으려는 신령과 진정이 없어서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지 못하고, 예수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결국 예수님을 잃어버려서다.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 그것을 기름부음 받은 성도들의 파워는 모여서 예배하고 소리높여 찬송하며 뜨겁게 기도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계명대 동산병원 김동은 교수라는 분이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의사의 힘은 파업이나 어떤 단체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환자 곁에서 정말 애정과 최선을 다할 때 힘이 나온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최고의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가 될 때에 나온다.

 

4절을 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0절의 말씀으로 오늘의 설교를 매듭지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며 예수의 마음으로 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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