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6일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죄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에, 복의 원천이신 주님이 주실 위로와 희망을 기대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지치고 피곤한 심령에 새로운 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8)

 

어제 코로나19발생현황을 보니까, 113명이 발생했다고 한다. 115일 만이다. 그 중에 지역감염은 27명이었고, 나머지는 86명은 이라크에 외화벌이로 나갔던 우리나라 건설 노동자와 러시아 배에 타고 있던 승조원이었다고 한다. 해외유입 환자들에 대해 사람들이 우려를 하는 가운데, 병상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이유로 해외유입을 차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이에 반대해서 이라크 건설노동자들도 대한민국 국민인데, 당연히 전세기를 보내서 구출해오는 것이 맞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인데, 데려오는 게 맞는 것 같다. 당사자들의 입장이 돼보면 그 가족과 함께 얼마나 불안하고 힘들겠는가? 그런데도 해외유입 환자들을 차단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을 보면, 그만큼 코로나19로 인해 각박해진 정서들이 반영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것을 논란이라고 기사화하는 기자들의 수준도 의심이 됐다.

 

세상은 구원과 구조를 ‘이익 우선’을 기준으로 논란화 된다. 그러나 우리 좋으신 하나님께는 논란거리가 안된다. 행위가 기준이 되지도 않고 율법이 기준이 되지 않는다.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을 가지면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시다고 했다. 믿음을 가지시라.

 

 

2.

현실 속에서 구원에 대한 회의와 갈등 그리고 고통을 당했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예수님은 주전 4년 경 헤롯 대왕이 죽기 직전에 태어나셨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지만, 주님의 고향은 나사렛이다. 나사렛에서 나고 자라신 것이나 다름없다.

헤롯 대왕이 죽자마자,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로마입장에서는 폭동이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주권적인 통치자를 세우려는 메시아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로마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에 주둔해 있던 군단병력을 투입시켰다. 이 때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도시가 갈릴리의 수도였던 세포리스였는데, 나사렛으로부터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 안되는 곳이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어떤 반란자가 상당한 추종세력을 일으켜, 왕의 무기고들을 강탈하여 무장한 후에, 권력을 잡았다고 한다.

요세푸스는 기원전 4년의 반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기원후 68-70에 또다시 같은 일이 발생했다. 이 대해서 몇 가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청소년 1천 명을 칼로 죽였으며,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로로 잡았고, 군인들에게 재물의 약탈을 허락했다. 집들을 불태웠고, 주변 마을들까지 초토화시켰다. 기력이 있는 사람들은 도망쳤고, 연약한 사람들은 살육되었으며, 남은 것들은 모두 불길에 사라졌다.(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첫번째 크리스마스”, 107) 그날의 참담했던 밤을 생각해보라.

이 기록을 통해서, 학자들은 기원전 4년에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역 농민들은 은신처로 때맞춰 피신했던가, 아니면 남자들은 살육을 당하고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가거나 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무렵 로마인들은 나사렛의 뒷마당을 유린했던 군인들이었다. 나사렛에 신원미상의 남자가 남겨놓은 말이 있다. “그들은 황무지를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 언제나 전쟁의 명분은 평화였다.

이를 바탕으로 상상의 날개를 좀 더 펼쳐보자. 어느 날 갑자기 남편 혹은 아버지를 잃은 엄마와 아들이 나사렛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계곡을 가로질러 세포리스는 푸른 언덕 위에 희게 빛나고 있다. 엄마가 아들에게 과거 뼈아픈 역사의 상처에 대해 말해준다. “그들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단다. 땅의 진동소리가 우리 발 밑에서부터 전해졌지. 너의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으셨단다. 이 산등성이에 올라 온 것은 네 아버지를 잃게 된 날과 우리가 모든 것을 빼앗긴 날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면서 살아왔단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시지 않으셨는지, 로마인들이 덮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는지 하는 질문 말이다.”

얼마나 큰 상처를 한으로 가지고 있었을까? 한 두 사람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그 고통 속에 있었다. 귀신들린 자에 대한 이야기도 생각해보면 말이다.

 

이 질문은 주전 6세기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 대전 때,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고 뜨거운 화구에 시신이 던져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인류사의 재앙과 고통이 따를 때마다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누군가를 짓밟거나 숨통을 조이는 일이 다반사다. 사람들이 내 맘 같지 않고, 인색하고 무정하고 비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힘 있는 사람은 살아남지만, 힘 없는 사람은 생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렇게 힘들 때,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은 무엇인가? 회의론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아무도 이것이 정답이라고 설명할 길이 없다. 어쩌면 영원히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극복기는 있다. 새길을 열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한 정신이자 하나님의 은총은 아닐까? 바벨론 포로 때에는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었노라고 회개했다. 그리고 유일신앙과 창조신앙의 아름다움 정신과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신학이 만들어졌다.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십자가의 능력은 이런 것이다.

 

 

3.

오늘 말씀은 단순한 천국에 대한 비유적인 말씀만이 아니라 행복을 빼앗기고 상실감으로 소망과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주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주전 4세기로부터 짧게는 주전 2세기에서 예수님 때까지를 ‘영적인 암흑기’라고 부른다. 달리말하면 신앙적인 회의론이 가득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영적인 뜨거움은 없다. 진정성을 찾기도 어려웠다. 메시아 대망론은 다윗 왕국의 이상과 맞물려 무장항쟁의 방향으로 흐르기 쉬웠다. 그것이 실패할 때마다 사람들의 삶은 더 어려운 곤궁에 빠졌다. 로마의 수탈은 거세졌고, 적응하지 못하고 시대의 부조리에 몰락한 사람들은 무시되거나 짓밟히거나, 스스로의 인생이 한탄스럽고 괴로웠다. 종교상인과 성전체제가 결탁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은 장밋빛 청사진처럼 들렸고, 그러면서도 혹시나 모를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신앙의 모습은 계속 유지해 나갔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황폐한 곳, 그곳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현실적인 물음을 묻는다면 천국을 심어보라.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보라. 열리게 될 것이다.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 13장,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 오늘의 말씀이다. 위치적으로도 중간에 있다. 가라지 비유와 그 설명 사이에 위치해있다. 34-35절은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마태는 나래이션을 들려주고 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리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만,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씀하셨음을 기억하라.

 

주님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어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기대와 생각과 얼마나 정반대의 말씀이었는가?

 

에스겔의 예언에 따르면 에17:23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백향목 나뭇가지를 꺾어 가장 높고 우뚝 솟은 곳에 심는다. 이스라엘의 영광과 자부심으로 여기는 성산임이 분명하다. 예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백향목은 힘과 영광과 호화로움의 상징이다. 이스라엘의 이상이었다. 가장 비싸고 좋은 건축자재로 세워진 나라, 성전, 왕국을 생각해보라. 화려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한다. 짓밟히지 않은 강한 나라, 성전, 왕국. 거룩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깃들 수 없는 성스러운 곳이다. 자격과 조건을 갖춘 이라면 누구나 평화와 안녕을 누릴 수 있는 세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런데 사실은 더 큰 박탈감과 소외와 제외됨을 두려워해야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가장 작은 씨앗, 땅에 흘리고 나면 찾기조차 힘든 씨앗이다. 백향목과 달리 손이 덜 간다. 아니 손이 가지 않아도 어느새 풀이 자라나듯 대지 위에 자라기 시작한다. 공중의 새들이 깃든다.

 

1)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보길 바랐던 천국은 무엇일까? 백향목의 이상이 아니었다. 겨자풀이라고 불리는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 깃든 천국이었다. 겨자나무라는 공간적 의미는 이렇다. 으리으리한 곳에 자격을 갖추고 허락된 이들만 대접을 받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왕국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본래 전통은, 나그네를 천사처럼 소중히 여기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라 선한 대접과 섬김은 천국의 작동원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2)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인부들이 작업감독관의 지시를 따라 값비싼 백향목을 옮겨다 심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밭에 뿌려놓은 것으로 족하다.

 

(은지 엄마의 당근마켓 이야기_그날 은지 엄마는 “냉정하고 침착한 용기와 정직”을 ‘자녀의 가슴 밭’에 심었다.)

3) 겨자씨를 38절의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이요”라는 주님의 설명을 따라 “예수복음”으로 한정해서 적용하는 분도 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꼭 그렇게 국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님은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의미로, 희망조차 없는 것에서 큰 희망의 의미로 말씀하신다.

 

말씀을 보다보니까, 24-30의 가리지 비유, 36-43 그 비유에 대한 설명으로 확장이 됐다. 우리의 믿음에 가라지 같은 세상의 불신앙과 메시지가 어느새 자라지 않고 있는가 걱정이 돼서말이다. 하나님의 복을 세상의 손익분깃점에서 저울질을 하고 자기 유익과 이익에 익숙한 것을 선택하느라 하나님의 명령을 귀막고 사는 모습에 어느새 젖어들지 않았는지 말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현실적인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온 몸으로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아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이 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연민과 동정 때문이 아니다. 인생의 불행과 슬픔을 겪고, 어쩌면 그 원인이었던 ‘로마’라는 현실인식에 등 돌린 채 생존을 위해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 근심과 싸워야 했던 사람들의 속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요즘 ‘1호가 될 순 없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박미선이 팽현숙의 말 한 마디에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릴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팽현숙이 최양락이 연기를 하도록 PR을 한데, 최양락이 창피하지 않느냐고, 면박을 주니까, 팽현숙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말에 박미선도 깊은 공감을 했던 모양이다. 그냥 그 모습만으로도 인생의 무게가 느껴진다.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정주리가 박나래의 편지에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아이 셋을 키우느라 살림과 청소, 정리정돈을 하고 해도 끝이 없는, 그러나 하나도 티가 나지 않는 그의 삶에 위로가 됐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속사정을 알고 공감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무리들의 처지가 궁색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어서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다. 어려운 시대에 주어진 삶의 몫을 감당하느라 고달픈 사연을 가졌기 때문에, 함부로 정죄하거나 단정지을 수 없다. 주님은 사람들의 속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처지와 형편을 주님께서 모르시겠는가? 누구보다 공감하시고 이해하시고 아파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잘 되기를 바라시고 천국이 열리기를 바라신다.

 

겨자씨를 심으면 공중의 새들이 깃드는 것처럼, 작은 희망에서 천국을 볼 것이다. 새들이 깃든 평화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다. 자기 밭에 뿌려놓은 겨자씨에서 나무가 자라듯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소중한 일상에 열리며 발견될 것이다. 상처와 아픔에 함몰돼있으면 영원한 나락이다. 일상에서 겨자씨를 뿌리듯 희망을 만들어가다보면 공중의 새들도 깃드는 치유와 회복과 하나님 나라가 현실화된다.

 

안현미 작가의 시가 떠올랐다.

 

“사회적 거리두기 그것은 한번도 없던 일 겨울부터 봄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 불안의 시간이 모두 시가 된다면 좋겠어 ‘삶’은 ‘사람’을 줄여놓은 말이 아닐까라고 쓴 적이 있었지 올 봄은 ‘사람’은 ‘삶’을 늘여놓은 말이라고 써놓고 미래를 빌리러 가야지 (중략) 월요일이에요 ‘세상 끝 등대’에 불을 켜고 우리 살러갑시다.”

 

마지막 문장, “‘세상 끝 등대’에 불을 켜고 우리 살러갑시다.” 이 한 문장이 위로가 된다.

 

저마다 삶의 의미를 되묻고, 소중한 것을 찾거나 회복하지 못하면, 이 코로나19는 겨울부터 여름까지 우리의 삶을 재로 만드는 화재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반대라면 병충해를 태우기 위해 논, 밭에 놓은 쥐불처럼, 우리의 삶의 대지는 건강한 생명의 새싹을 틔울 것이다.

 

저 역시 이 예배를 마치고 새 힘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희망 품고 세상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내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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