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이용하는 자 vs 도움을 구하는 자(삼상23:6-14)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 vs 도움을 구하는 자(삼상23:6-14)

 

2020년 8월 2일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사랑의 하나님, 8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많은 비가 내려 안타까운 소식이 이어지며 우리의 근심을 더하는 때에,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은 많은 눈물을 고치며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을 믿기에, 한량없는 주님의 자비를 사모하며 전에 나왔습니다. 답답해진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시고, 나태해진 심령에 귀한 은사가 넘실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7)

 

  1. 사울의 육백 명과 다윗의 육백 명

오늘 말씀의 13절 상반절을 보라.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갈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사무엘하3:1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울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다윗과 사울의 후손들과의 관계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이미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삼상13:15 하반절을 보면, 여기서도 6백 명이 나온다. 사울과 함께 한 백성의 수가 그랬다. 6백 명이 군대의 단위인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22장을 보면 다윗이 아굴람 굴에 피신해 있을 때, 다윗에게 모여든 자가 400명이었다. 대부분 오합지졸들이다.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실패자들이다. 그런데 금새 600명으로 늘었다.

반면 사울은 어땠는가? 다시 13장을 보면, 블레셋에 맞서기 위해 참전한 사람의 수가 3천명이었다. 이 중에 1천 명은 요나단이 맡고 나머지 2천 명은 사울이 맡았다. 그런데 사무엘이 늦게 오자, 전쟁을 앞둔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600명 가량이 남았다. 누구는 모여들어서 600명인데, 누구는 흩어져서 600명이다. 성경이 넌지시 예고하고 있는 바를 읽게 되는 대목이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갈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지금 비록 다윗이 피신하는 상황이어서 왕성해간다는 말이 무색하게 들린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게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화려한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영혼이 잘된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 초라한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영혼이 못 된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화려해서 공허하고 초라해서 단단할 수 있다. 비결이 있을까?

 

  1. 이용하는 자, 도움을 청하는 자

왜 사울의 집은 약해져 가고 다윗의 집은 강성해져 갔을까? 이것을 살펴봐야 한다.

1) 세대교체에 따른 것이다? 사울의 왕권을 이어받을 요나단까지 사울과 함께 죽게 되자 사울의 집과 가문에는 다음 주자가 없었다. 반면에 다윗은 인물이 뛰어났다. 인물론이다. 게다가 사울의 집은 점차 쇠퇴의 길에 섰고 다윗은 성장가도에 있었다. 뭐 이런 식의 설명이다. 달이 차면 기울고 기울면 차듯이 말이다.

 

2)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기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 인생의 대부분을 허탄한 곳에 사용하고 말았다. 그것이 가문에도 영향을 미쳐 나타난다. 이런 설명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한 가정에서 한 사람이 예수를 잘 믿음으로 그 집이 잘되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모두가 예수를 믿어도 안되는 가정이 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비교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영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믿기는 믿지만 예수를 잘못 믿기 때문이다. 제대로 믿는 게 중요하다.

 

3)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결과다?

사울을 버리셨고 다윗을 택하셨다.(cf,삼상16:1) 그래서 그렇다는 설명이다. 하나님은 능히 누군가를 버리고 새로운 누군가를 택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포로기를 거쳐 바뀐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그럴 권한과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고 예언한 바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뉘우치며 깨닫고 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다고.”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고 하는 예정론적인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왜 사울의 집은 약해져가고 다윗의 집은 강성해져 갔을까?

오늘의 말씀을 보면 아주 단순하다.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던 자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움을 청했던 자의 차이이다.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기 전 사무엘이 늦다보니, 먼저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 더 지체했다가는 백성들이 다 흩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냥 전쟁을 치를 수도 있지만 그 전에 먼저 예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이것을 아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는 믿음의 사람인 듯하다. 급박한 상황을 앞두고 촉박한 시간에 도착한 사무엘이 문제지 사울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사무엘이 책망한다. “13:13” 이런 책망이 합당한가? 부당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사무엘의 책망을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한 것으로 보면 안된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과 전술에 이용하려고 하는 사울의 속내가 너무나 뻔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의 삶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세를 고치지 못한다. 사무엘은 그것을 나무랐다.

 

7절을 보라.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다윗에 대한 시샘과 질투 때문에 추격하고 있다. 다윗은 그일라에 있었는데, 블레셋이 그일라의 타작마당을 탈취하고 사람들을 유린했다. 다윗이 그릴라 주민을 구해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사울에게 알려준다. 목숨걸고자신들을 구해준 사람에 대한 배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울이 그렇게 말했던 거다.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다윗은 독 안에 든 쥐였다.

 

10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기도한다. 사울이 다윗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왜 이렇게 기도를 하는 것일까? 믿을 수 없었다. 자기가 그릴라 주민을 구해주었는데, 설마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밀고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억울하고 답답했다. 배신감도 들고 괴로웠다. 11절,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에게 일러주옵소서.”

 

하나님은 어느 편이신가? 사울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다. 그일라 사람이 자기들을 구해준 다윗에 대해 밀고를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았다가는 어쩌면 자신들의 처지가 도엑의 사람들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을꺼다. 625한국전쟁 당시, 자기가 살기 위해 가깝게 지내던 앞장서서 공산당에 밀고하던 사람들이 있더라고 한다. 아우슈비츠의 카포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인들보다 더한 일본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친일파들 말이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대한 순종과는 무관하다. 자기 의지나 뜻대로 하려는 마음을 정해놓고 행동한다. 기도하지도 않고 제대로 예배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잘 될 때에는 하나님을 시인한다. 그런데 안 될 때에는 부정한다. 어렵고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모순이 있는데,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형식적일 뿐 자기 생각, , 의지, 유익대로 한다. 지나가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다.

 

반대로 도움을 청하는 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12절은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믿기지 않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그라나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잠시 사람에 대해 실망은 할 수 있어도 그 원망이 오래가지 않는다. 대신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헤아린다. 자기 생각과 달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지고 확신이 들면 용기 있게 행동한다. 그일라 사람들이 블레셋사람들에게 약탈을 당했을 때,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을 말렸다.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v.3)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일라를 구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도 하나님께 뜻을 물어 자기 갈 길을 의연히 갈 수 있는 것이다.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다.” 목적지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 마저도 하나님께 맡긴다. 갈 길을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 될 때에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안 될 때에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한다. 어렵고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며 기도의 자리를 찾는다. 평상시에는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예배한다.

 

  1. 도움을 청하는 다윗의 방법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어땠나?

1) 기도했다. 오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다. 다윗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했다. 순종하기 위해 기도했다. 힘든 순간에도 기도했다. 원수들이 괴롭힐 때도 기도했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56:2-3)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와 상황과 형편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는 주님 안에서 확신을 얻고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57:7)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기도해보자. 어렵다고 힘들다고 괴로워하거나 혼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지말고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토로하며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보자. 주님은 분명 응답하신다.

 

구하라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숱하게 했다. 구하는데 안주시겠는가? 찾는데 숨기시겠는가? 두드리는데 닫으시겠는가? 피할 길을 내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2) 말씀을 묵상했다. 시편1편은 어떻게 고백하는가? 복있는 사람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 단순한 수행자의 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심신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뿌리를 내려 마르지 아니함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보다 달고, 생수와 같이 시원한 체험을 하며 믿음과 확신을 더하는 일이다. 시냇가의 나무가 과실을 맺음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는 체험을 하게 된다.

다윗은 악행하는 자들 때문에 괴로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고백을 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시37:7)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37:4-6)

 

3)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감사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그의 옆에는 늘 아비아달이라는 제사장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소중히 여겼다는 방증이다. 하나님의 궤가 들어올 때는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신나서 춤을 췄다. 시편84편10절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 보다 나은즉”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왔다. 거기서 제일 먼저 단을 땋고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런데 기근이 들자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 우리가 이곳에 와서 정말 좋았는데, 코로나라는 기근을 만나서 예배의 자리를 온전히 지키거나 사모하지 못하고 어느새 점점 남방으로 옮겨지듯, 예배와 멀어지고 신앙이 약해지고 예배를 쉽게 생각하게 된 것 아닌지 모르겠다.

저부터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물론 온라인 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거나 싫어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상황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속죄제는 어떤 큰 잘못이 있을 때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부지중에 범한 허물 때문에, 속죄제를 통해 자각하고 깨닫는 기회로 삼게 된 것이다. 혹은 부정해진 것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 뜻을 혼동하고 희미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며 회개의 기회로 삼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했다는 것이다.

시84:5절은 예배의 자리에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 고백한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다 보면 시온의 대로가 열린다. 여러분의 심령에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렸으면 좋겠다.

 

  1. 구원의 확신

가족 모두가 예수 오래 믿어도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혼자서 예수 짧게 믿어도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가정이 있다. 베냐민 지파였던 사울의 가문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윗의 가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움을 청했다. 저는 여러분의 가문이 다윗처럼 점차 강성해져가기를 축원한다. 그 일체의 비결을 깨닫고 결단하라.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혹 확신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지 도움을 바라는지 성찰하라. 그래도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영접했는지, 마음 문을 열지 않은 채 문 밖에 서게 하신 뒤에 대화하는 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이 시간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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