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9일 주일예배설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들을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시원하게 비가 내리는 주일 아침, 주님께서 성령충만한 은혜로 우리를 시원하게 하시며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실 것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답답함과 숨막힘을 몰아내고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1. 욕심으로 채우는 광주리와 나눔으로 채우는 광주리

이 시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 일어난 일인가? 예수님께서 거센 바람을 만나 노젓는 제자들에게 물 위를 걸어서 오신 내용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벳새다에서 일어난 일이다. 단순히 문자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중력을 거스른 0kg, 혹은 공중부양과 같은 이적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단순히 말이다.

 

이 사건의 앞의 내용은 오병이어 사건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보면 52절에서 그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말씀한다. 오병이어 사건을 다루고 있는 32절에서도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이동 중인 모습을 보여준다. 33절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보고 도보로 달려, 그들보다 먼저 갔다고 말씀한다. 거기는 장정만 5천명이 넘을 정도니, 부녀와 어린이, 노인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넓은들판이었다. 주님은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가르치셨다. 이것은 단순히 학식을 넣어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말씀으로 확신과 용기와 믿음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내어 촌과 마을로 보내서 사먹게 하자고 제안했다. 사실상 집회를 마치고 귀가조치를 제안한 셈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주님은 여기서 오병이어사건을 일으키셨다. 하나님 나라의 실상과 임재를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이렇게 빗대어 말할 수도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 사건을 일으킨 것에 말이다. 아시는 대로 당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기치 아래, 실상 벌어진 경제수탈과 착취는 ‘무리’로 대변되는 사람들의 삶의 몰락을 가져왔다. ‘율법주의’라는 이념적 가치를 쟁론화하고 정쟁화시켜서 특권층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회적 억압과 과중한 경제적 부담을 지고 있었다.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소작농으로, 소작농은 일용직으로,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은 날품팔이라도 해야하는 신세가 됐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다. 그런데 광야에 있는 백성은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한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셨다. 출애굽 백성들이 넉넉히 먹었다. 달라진 모습이 있다면 광야의 만나사건은 각자 취하다가 때로 욕심을 부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일을 겪기도 했는데,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은 특징적으로 서로 나눔으로 취하여 오히려 더 차고 넘쳤다. 욕심으로 채운 광주리가 아니라 나눔으로 채운 광주리였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까지 나눠 줄 수 있을 만큼이 됐다. 남은 12광주리가 차고 넘쳤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다.

오병이어사건에서 우리는 단순한 초능력이나 기적만으로 보면 안된다.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하나님의 긍휼처럼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 말이다. 그 은혜가 늘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금새 이에 대한 마음이 무디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출애굽 백성들처럼 말이다. 여러분은 그러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1. 거센 바람에 노 젓는 제자들

예수님은 무리들과 작별하여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고, 무리들은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벳새다로 가고 있었다. 이제 연극으로 말하자면 무대 배경은 모임, 성회, 집회가 이루어졌던 장소가 아니라 모두가 나름의 할 일과 역할이 주어진 삶의 자리로 전환됐다.

 

그런데 제자들의 배는 어찌 된 일인지 아직 호수 한가운데 있고, 제자들은 바람이 거스르기 때문에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다. 이 모습은 마치 인생의 이러저러한 처지에 힘겹게 살아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노 젓는 모습이란? 삼성동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데, 버스 정류장에 넥타이를 맨 중년의 남성이 중앙차로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이게 바로 노 젓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삶을 어렵게 하는 바람들, 불화의 바람이 불기도 하고, 오해의 바람이 불기도 한다. 미움의 바람, 다툼의 바람, 고난의 바람, 의심을 바람이 불기도 한다. 여러분의 삶에는 혹시 바람이 불고 있다면 어떤 바람이 불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 힘겨운 노를 젓는다.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는데, 제자들은 밤 중에 유령인가 하여 소리를 지르며 놀랐다. 이 대목을 전하는 데 있어서 마태와 마가가 조금 다르다. 1) 마태의 내용에는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나아가다가 점점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내용이 있지만 마가에는 없다. 오히려 2) 마가는 예수님꼐서 그들에게 오사 제자들의 어려움을 보고도 지나가려고 하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이 마태에게는 없다. 마태는 3)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동기가 된다. 그런데 마가는 52절에서 “그 떡을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고 불신앙에 빠진 제자들을 꼬집는다.

 

 

  1. 주님을 지나치게 만드는 불신앙

여기서 의문점을 한가지 풀어보자. 48을 보면 주님의 오심은 우연이 아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겪는 것을 아시고 오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냥 지나가려고(48) 하셨을까? 정확히 번역하자면 “지나가기를 원하시매”이다.

 

학자들은 이런 해석을 내놓고 있다. (1) 이는 제자들이 받은 인상으로서, 예수는 이때 제자들을 지나치려는 것처럼 보였다(Cranfield). (2) 제자들보다 먼저 가심으로써 제자들을 놀라게 하려고 했다(Wellhausen). (3) 예수의 지나가심을 하나님의 지나가심처럼 보이려고 했다(Gnilka). (4) 이는 물위로 걸어오신 목적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 곁을 지나심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얄리려 했다(Lane). (5)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해보려고 했다(Schweizer).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마가가 전하려는 영적 가르침의 의도로 해석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주님의 도우시려 찾아오셔도 허사가 될 수 있다. 주님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며 삶의 무게와 역할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 힘겨운 인생의 씨름과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찾아오신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주님께서 도우시러 왔다가도 그냥 지나가는 꼴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도우시려 하는데, 자기 생각과 뜻과 방법대로 해버리니 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난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는 언약을 받았다. 그런데 그 약속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 전에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곳을 옮겨 가는 데까지는 순종했으나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 기근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수모를 당했다.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결국 자기의 생각과 방법대로 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쉽다. 사사시대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면서, 불평은 하나님께 했던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에 앞서, 결국 자기 방법과 자기 생각대로 하게 됨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스스로 놓치고 만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를 질렀다. 바다 위는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흡사하다. 발 딛고 지탱할 수 있는 처지와 형편이 전혀 없다. 배를 타고 물 위에 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광야 위에 떠 있었다. 군대도 없고, 체계도 없고, 힘도 없고, 능력도 부족했다. 우리도 인생에서 붕 떠있을 때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보여주셨을 때,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아낙자손’의 유령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기겁을 하고 놀라 하나님을 원망했다. 우리 인생에서 위기가 찾아오고 어려움이 찾아올 때도, 그 속에 숨겨두신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지 못하고 불신앙 때문에 유령처럼 인생의 저주로 인식하여 낙망하고 실망할 때가 있다. 불신앙의 망령이다. 이에 대해 마태는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연약한 믿음과 의심으로 점점 물속에 잠식되는 영적인 상황을 말하고자 했다.

마태는 물 위를 걸으신 주님에 대한 체험을 통해, 인생에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고백을 강조하고 있다면, 마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자주 망각했던 이스라엘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역으로 영적인 깨달음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영적으로 깨어있기를 말이다. 이스라엘은 어땠나?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증거와 능력과 역사들을 매순간 깨달으면서도 매순간 잊고 불평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가? 바람이 거스르는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앞에 믿음이 굳건해져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기회로 삼는가? 아니면 그 은혜를 잊는가?

 

 

  1. 벳새다에 믿음을 굳게 하라.

벳새다라는 지명에 대한 언급은 이러한 마가의 의도를 더해준다. 마태는 벳새다를 언급하지 않고 호수 건너편 게네사렛에 당도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마가는 벳새다를 언급하고 있다. 벳새다는 어떤 곳인가? 베드로와 안드레의 고향(요1:44)이다. 게네사렛 호수 북동쪽에 있고, 요단강 동쪽에 있으면서 갈릴리와 호수와 만나는 지류에 있다. 주님은 이곳에서 이적과 능력을 많이 행했으나 회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늘 주님의 능력과 은혜 안에 있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영적으로 잠든 도시를 의미한다. 어쩌면 주님 안에 은혜와 사랑으로 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영적으로 잠든 우리의 삶의 자리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 제자들이 탄 배는 호수 위에 떠 있지만, 설 땅의 위기를 겪고 있는 벳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유령인가 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말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병이어의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벳새다로 가는 삶의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모임 장소인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흩어져 돌아간 생활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밤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힘겨움의 변곡점에서 좌초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셨다. 주님은 구하기 위해서 오셨다. 마찬가지다. 주님은 인생의 과제와 역할을 다하느라 수고하고 지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주님은 오늘 설 땅의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걸어오셔서,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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