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2일 주일예배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코로나19가 사람의 삶을 꽁꽁 묶어두고 바꾸어 놓고 때에, 예수께서 주시는 자유함으로 주님을 닮기를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예배하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식고(막6:50)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한다. 주전6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장면을 보았고, 성전을 잃어버린 이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지낼 때, 그들의 심정은, 오늘 코로나19로 맞아 예배공동체의 위기를 느끼는 심정과 유사하겠구나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피를 나눈 가족만이 아니다. 고달픈 인생의 희비애락 가운데 믿음의 손을 맞잡았던 사람들 역시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지고 행방을 모르게 됐다.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했던 신앙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은 삶의 밑거름이었던 소중한 자산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신앙공동체의 터전이었던 성전이 사라졌다면, 어느 곳에 설 것인가? 게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면서 사실상 신앙공동체는 흩어진 것이나 다름 없다.
코로나19와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모든 것이 위축된 지금이다. 방역당국에서는 교회의 정규 예배를 제외한 모든 모임을 금지한다고 발표까지 했다. 일각에서는 ‘역차별이다. 어떤 사람이 감염됐을 때, 그가 교회를 다니면 곧 교회 때문이라고 하는데, 불교인이나 천주교인이 걸리면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는다.’, ‘실제로 교회와 관련된 감염자수는 1만3천명 중에서 5백명 정도밖에 안되는데, 모든 집단감염의 원인이 교회인 것처럼 말하고 보도된 것에 대해 언론사들과 정부를 규탄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교회가 어느 다른 종교나 단체보다 앞장서서 봉사하고 기부하고 나누고 헌신한 것은 아랑곳 없이 소수 방역지침에 따르지 않은 사례를 가지고 일반화한다.’는 볼멘소리도 있다.
아무튼 이런 영향 때문인지, 교인들 중에 현장예배를 우선은 꺼리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가 개중에는 흩어지고 신앙을 잃은 교인들도 생겨나는 실정이다. 이럴 때,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잘 지키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다니엘이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그는 성전 밖에서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한 사람이다. 오늘 같은 시대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어느 순간 믿게 됐다. 물론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애굽에서도,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순례길에도 어디에나 계셨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신 줄로 여기게 됐다. 성전중심의 사회체제가 생겨났고, 성전은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일상과도 같았다. 그런데 성전이 무너지고 사라졌으니, 그 어디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 코로나19를 맞은 우리 모두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길 바란다.
2.
다니엘이 누구인지 살펴보자.
바벨론의 다리오 왕은 전국을 통치하기 위해 120명의 고관들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 총리 셋을 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다니엘이었다. 3절을 보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려고 했다. 비주류로 남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주류가 됐다. 개인적으로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에게 지혜와 은사와 재능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난세를 만나면 그 세상을 불평하고 자포자기 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난세에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현인들이 등장했다. 애굽의 노예시절에 모세가 등장했고, 로마 치하에 강자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던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2차 세계대전의 고통받는 역사 중에 위대한 작가와 사상가 철학가들이 등장했다. 난세에 하나님은 귀하게 쓰실 사람을 찾으신다. 바벨론포로의 암울했던 상황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다니엘이다. 하나님은 그 다니엘을 사용하시기 위해 바벨론의 총리가 되도록 하셨다.
이사야49:7절 말씀이 떠오른다.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6절을 보면,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말씀하고 있다. 이방의 빛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쓰임 받는 사람을 말한다.
바로 다니엘이 이 말씀에 딱 부합한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런데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너’는 한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는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니엘이다. 다니엘의 친구들,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도 이 말씀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니엘3:12에서 이들은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한 자라고 증거한다.
오늘 우리의 시대가 난세라면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방의 빛’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바라신다.
10절 상반절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총리들과 고관들이 다니엘을 시기했다. 다니엘6:4을 보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왕 이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예배하거나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 넣자는 법안을 만들었다. 다니엘을 콕 집어 반국가적 행위자로 몰아가려는 것이었다. 이런 내막을 알리 없는 다리오 왕은 조서에 도장을 찍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그러니까 다니엘이 이런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예배가 금해지고 그것을 어길 시 단순한 불이익을 당하는 게 아니다. 어떤 형벌에 처해지는가? 사자 굴에 던져진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왕이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제라도 절을 하면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는 겁박이 있었다. 세 친구들은 이에 대해서 대답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 속에 던져질지라도 그리하지 않겠다고 담대하게 말한다.
앞에서 이 본문은 다니엘을 부각시키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담대히 믿음과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사용하신 내용이다.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했다.
성전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는 모습이다. 설령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더라도 그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기 쉬운 습성에도 도전이 된다.
이것은 주일만 되면 교회에 나와 습관적으로 예배하는 모습과 상반된다.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신실하게 사모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모습이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는 것도 단순한 습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식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당위성 때문에 기도했다. 그러나 다니엘은 달랐다. 사람들이 보나 보지 않으나, 당위성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 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사모했다. 얼마만큼 하나님을 향한 자기 성실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뿐만아니라 믿음과 신앙의 지형을 바꿔놓고 흔드는 상황에서도 다니엘과 같은 신실하고 성실하며 진실한 모습을 하나님을 향하기를 축원한다.
3.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주님의 응답과 확신’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의미를 모를 수도 있다. 위기와 역경 속에 힘주시고 능력 주시고 지혜주시는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이 증거가 ‘그래야만 되는 것인가?’, ‘때로는 억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감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살아역사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런 증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하나님께로부터 이 위기를 피해가게 하시리라는 응답을 얻었기 때문일까? 기도 중에 그런 내적인 확신을 얻었던 것일까?
이것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곧장 왕에게 나아가 고발한다. 13절 “그들이 왕 앞에서 말하여 이르되 왕이여 사로잡혀온 유다 자손 중에 다니엘이 (중략) 왕과 왕의 도장이 찍힌 금령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 다니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사로잡혀온 유다 자손 다니엘” 이들이 다니엘을 대했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깔보고 얕잡아 보는 표현이다. 마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별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다음날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조금도 상한 데 없이 무사히 나왔다. 이것은 다니엘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맹렬한 풀무불에 던져저도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고 불 가운데서 걸어나왔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때가 있다. 다니엘은 (그 친구들도 포함하여) 신앙과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풀무불)에 던져졌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닌 것으로 기도와 믿음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역경이라는 사자굴에 던저질 때가 있다. 끔찍한 상황이 피해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사자굴에서 지키시고 풀무불에서도 건지시는 분이셨다. 인생의 위기와 고난은 누구도 빗겨가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않는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하고, 믿음과 확신이 가득 찬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사자굴에 던져지고 풀무불에 던져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지키신다. 이것을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다니엘은 역경이 찾아올 것을 알고도 기도했다.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했다. 손해를 볼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과연 다니엘의 기도란 무엇일까?
하나님은 권능과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 주님을 그 안에 모시고 사랑을 품었다. 그것이 사모함이다. 생명의 주인을 품었을 때, 사자굴에서도 또 풀무불에서도 무사했다.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영상)
산모가 희귀병의 사자굴에, 풀무불에 던져저서 사라질 처지에 있었는데, 생명을 가슴에 품었다. 그러자 조금씩 일어나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능력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이 마비된 것처럼 생각되고 신앙의 호흡조차 어려운 때에, 참 생명의 능력이신 주님의 사랑을 품어 힘과 용기를 내고, 세상의 빛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바라신다.
많은 학자들이 앞으로 신앙과 형태는 가상공간이나 온라인을 통해 개인적이 될 거라고 말한다. 교회와 성전의 비중은 이전보다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분명히 기억해야할 점이 있다. 포로기를 거쳐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이, 상당수는 세대가 바뀌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성전을 제일먼저 짓기 위해 기초 공사를 시작하고 그 감격과 감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신앙과 믿음을 지킨 사람들과 그 후손들에 의해서 말이다.
교회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지체들이 모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해 가는 것이 교회이고, 진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하게 만드는데, 바로 이런 위기와 고난에도 신실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고 작정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