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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7일 부활절 제 6주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계셔서, 저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부활절 제 6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다소곳이 고개를 든 더운 공기가 온 대지를 휘감는 계절에, 연약한 가슴에 뜨거운 풀무질을 해 주실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불의와 죄악은 불살라지고 성령으로 달구어진 사랑의 마음만 남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3:3)
- 채소밭, 조개, 사냥
여러분, 이런 가정을 해보라. 여러분은 약 1만 년 전에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런 갈등에 빠진다. “오늘은 채소밭을 일굴까?(하루 종일 일해야 하지만 몇 개월 후에는 많은 채소를 수확할 수 있을 텐데), 조개를 캘까?(당장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을텐데), 아니면 사슴을 사냥할까?(잘하면 당장 많은 양의 고기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을 가능성이 더 많은데)”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라는 책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제레드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농경생활과 수렵생활 어느 쪽이 더 인간을 편안하게 할까? 흔히 농경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수렵생활은 먹거리를 장만하느라 매일 쫓기고, 걸핏하면 굶어죽을 위기가 찾아오고 부드러운 잠자리나 옷가지 같은 기본적인 생필품을 누리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다는 것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직접적인 먹거리를 기르지 않으면서도 풍요를 누리는 1세계 사람들만 그렇지 실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농경생활의 노동시간이 채집민들보다 많다. 영양상태가 좋지 못하다. 심각한 질병과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다.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는 제 3세계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지금이야 농공법이 발달해서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아서 그렇지 과거에는 어땠는가? 길쌈을 해서 의복을 얻는 일과 양털로 의복을 얻는 일 중 어느 편이 쉬운가?
그래서 아직도 수렵채집민으로 남아 있는 지역이 있다. 집문을 나서면 먹을거리가 지천인데, 굳이 노동을 하겠는가? 양고기와 젖, 털과 가죽들로 필요한 것은 교역을 통해 장만하면 된다.
남아공 피시강 서쪽 코이족은 목축민이었는데, 동쪽 반투족은 농경민이었다. 교역을 하면서 농경생활을 하지 않고도 잘 살았다. 문제는 야생먹거리들이 부족하게 되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 농경민들은 보다 안전했지만 수렵민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그런데 농경민들의 인구밀도가 더 높다는 것이다. 유목민들은 이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자녀가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그 다음 자녀를 낳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이를 둘 셋씩 업거나 안고 이동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농경생활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터울이 적다. 문명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고, 생산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켰다.
결과적으로 보면 씨를 뿌리고 경작을 하며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문명과 기술이 더 발전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오늘 채소밭을 일굴까? 조개를 캘까? 사냥을 할까?’ 이런 물음은 우리 삶의 방식의 한 부분인 것 같다. 채소밭을 일구는 삶의 방식은 어려움을 선택하고 고생을 감내하면서 미래적 가치와 열매에 소망을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개를 캐는 삶의 방식은 당장 편한 것을 선택하고 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현실적 가치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사냥을 하는 것은 도박 같은 모험을 하고 직감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그날 운에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126편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말씀한다.
여러분 아무리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당장의 상황이 요구하는 현실을 선택하고 싶더라도 요행을 바라거나 터무니 없는 기대를 하지 말고,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소망과 용기가 있기를 축원한다.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버틸 줄도 알아야 한다. 일구고 가꾸며 노력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단을 거두게 하신다. 그 열매를 먹게 하신다. 승리하게 하신다. 더 큰 비전과 성장과 성숙을 도우신다.
- 성전과 말씀의 씨앗
1)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보라. 포로생활이 고달프다고 해도 이보다 못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더 나으면 나았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랫동안 버려진 땅처럼 황무했던 곳에 기초부터 놓아야 했다. 무엇하나 넉넉한 것이 없었다. 아니 식량부터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부족하고 궁핍한 것투성이였을 것이다.
돌아온 백성들이 제일 먼저 놓았던 기초가 무엇인가? 그렇다. 성전을 짓는 일이었다.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쁘고 생존을 위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겨를이 없을텐데도, 첫 삽이 뜨여지고 기초가 놓였을 때, 돌아온 모든 백성들은 그것만으로도 감격했고, 옛성전을 기억하고 있던 나이 많던 사람들은 대성통곡하며 하나님께 눈물을 바쳤다.
어려움이 찾아왔다. 방해꾼들이 있었던 것이다. 고레스에게 서신을 보내서, 이들이 성벽을 지어 반역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엄연히 가짜 뉴스였다. 성전을 성벽으로 바꾸었다. 공사는 중단됐고, 시련이 찾아왔다. 현실적인 갈등에 처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성전 없이도 잘 지냈는데,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이 사업을 계속해야 하는지 갈등이 됐다.
고마운 것은 백성들이 스가랴나 학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실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단됐던 건축을 다시 하기 시작했고, 현실은 어렵고 힘들지만,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는 믿음으로 용기를 냈다. 결과는 자명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서고에 보관돼있던 고레스의 칙령이 발견되고,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은 유브라데강 근처에서 올라오는 세금을 긴급지원하여 성전건축을 완공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울면서 씨를 뿌리려는 자를 도우신다. 힘주시고 능력주신다. 이 신앙적 깨달음을 갖고, 주 안에서 승리하시길 빈다.
2) 에스라가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라는 율법을 복원하는데 주도했던 사람이다. 그는 페르시아 아하와 강에서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한다.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주소서.”(에스라8:21) 그가 기도하며 확신을 얻고 내린 결단은 무엇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율법과 그 말씀의 씨를 뿌리는 소명이 그에게 주어졌음을 깨달았다.
그의 현실은 어땠는가? 에스라7:6을 보자.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수 있는 자. 그가 마음만 먹으면 조개를 캘 수 있는 형편과 처지에 있었다. 그의 현실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눈물로 씨를 뿌려야만 하는 길 택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주소서.” 당장 자신의 행복과 편함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기쁨으로 단을 얻게 될 그 날을 사모했던 것이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심는 일이 쉬운 일인가?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씨 뿌리러 나간 자가 씨를 뿌릴 새, 길가에, 돌짝밭에, 가시덤불에, 좋은 땅에 떨어졌다. 말씀을 흘려듣는 사람도 있을테고, 의심하며 듣는 사람도 있을테고, 현실의 근심 염려 앞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실망감을 눈물로 삼켜야 한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아마도,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30, 60, 100의 결실을 얻게 된다는 소망이었을 것이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믿음의 근간 위에 서야만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가 참회하며 부끄러워하는 게 있다. 적군을 막기 위해서 다른 나라 왕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에스라8:22)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구했다는 것이, 나중에 깨닫고 나니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인생을 감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학자로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확신했을 것이다.
시편127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봐서 알지 않은가? 인생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고, 방패되시고, 힘주시고 능력 주시는 삶이 참으로 복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동행하는 백성, 가정, 나라, 교회야말로 정말 복된 줄로 믿으라.
눈물로 씨를 뿌리듯,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라도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며 복음으로 일궈야 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런 눈물로 뿌리고 키운 씨앗과 그 열매가 있기를 축원한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기도제목과 소망이 있었다. 올해가 우리교회의 해외선교의 원년이 되기를 바랐다. 10주년 되는 때에는 단기선교여행을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이전에 한 적이 있다. 올 가을 경에 우리교인들 중에 단기선교사를 파송하고 해외선교의 물꼬를 텄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졌다.
우리가 그럴 형편인가?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우리 교회가 잘되고 교인들이 잘되고 자자손손 복 받는 비결이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가려 뽑아 선교를 보냈던 것처럼, 우리 중에 몇 명을 준비시켜서 말레이시아나 필리핀에 계신 선교사님과 연결하여 3-4일간 현장조사를 하고, 원주민 마을 하나를 선정하여, 물질적으로 선교했으면 했다. 현장에서 선교하는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안디옥 교회처럼 후방에서 지원하며 보내는 선교사가 있다. 우리 모두가 보내는 선교사가 되었으면 했던 것이다. 안디옥 교회가 점차 부흥하고 성장해갔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되게 하실 것임을 믿는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까, ‘실상 누가 가겠는가? 다 바쁘고 생활을 해야 하는데, 자원하여 갈 만한 사람이 누구겠는가?’ 하는 의심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기도 중에 제가 잠깐 길을 잃어버렸던 것은 아닌지, 한가지 깨달은 부끄러움이 있다. 바나바와 바울이 먼저 자원하여 안디옥 교회가 그들을 파송한 것이 아니다. 순서가 바뀌었다. 안디옥 교회가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바나바와 바울에게 그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고 있었구나!’
기도 방향이 바뀌었다. 성령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 교우들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마음으로 기름부으소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우들이 합력하여 선교라는 선을 이루게 하소서. 기도하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기도하라는 뜻인 것 같다. 올해가 우리교회의 해외선교의 원년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생각중에 말레시아에 있는 강성렬 선교사님과 통화가 됐다. 지금 몇 개월 째, 내왕이 어렵다고 한다. 선교지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원주민 교회의 상황이 정말 어렵고 선교사들의 사역이 어렵다. 기도하겠노라 약속했다.
-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
울면서 씨 뿌리는 자는 어떤 자인가? 그러고 보니까,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믿음과 고백은 부활의 신앙과 연결돼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한복음 12장 24-25절)
눈물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쁨. 예수님께서 친히 눈물의 씨앗이 되셨다. 그리고 기쁨이 단이 되셨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고백했다.
울면서 씨 뿌리는 자는 어떤 자인가? 자기를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비울 줄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죽일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혈기, 자기의 자랑, 자기의 유익, 자기의 세상, 자기의 뜻, 자기의 생각, 방법, 길 등등. 대신에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자랑, 하나님의 유익,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방법, 길이 나타나는 사람이다.
뿌려놓고 그만이면 안된다. 지속적으로 가꾸고 돌보고 수고를 다해야 한다. 작물들이 매일 제자리인 것 같지만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마찬가지로 그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기쁨의 단을 거둘 수 있다.
오늘 말씀을 들으셨다면 눈물로 씨앗을 뿌리기를 주저하지 말라.
특별히 바벨론에서 1차 귀환자들은 성전의 씨앗을 뿌렸고, 2차 귀환자들은 율법의 씨앗을 뿌렸다. 우리도 교회와 복음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리고 가꾸고 돌볼 수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