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4일 부활절 마지막주 설교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단비로 푸른 숲이 성장에 박차를 가하며, 농부는 희망을 가슴 가득히 채우고 바쁜 일손을 놀리는 계절에, 갈급한 심령을 적실 생명의 물을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은혜로 심령이 새로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019)
- 하나님께서 활동하고 계신다.
이 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빈다.
하나님은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다. 살아서 역사하신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전북 익산에서 결식아동은 누구든 고기를 마음껏 먹게 해주는 식당이 있다고 한다. (가게 앞에 내건 배너가 인상적인데, 화면을 참고하시라.) 어느 날 결식아동의 문제가 심각함을 알고 시작한 일이다. 급식카드가 나오니까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식에 5천 원인데, 이 돈으로 아이들이 밖에서 별로 먹을 게 없는 현실이다. 이런 아이들은 고기먹고 싶지 않겠는가? 고기 먹으면 안되는가? 끼니야 때울 수 있겠지만, 그의 눈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눈치보지 않고 와서 즐겁게 먹고 가면 되고. 혼자 오면 뻘쭘할 수 있으니까, 친구들 데려와서 눈치만 주면, 그 친구가 미리 계산한 것으로 해서 아이의 기를 세워준다는 것이다.
북도회관이라는 식당의 정총명 사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손해보지 않느냐고 앵커가 물으니까, 기분 좋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면 언젠가는 그게 자기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시편 41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가난 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주께서 이 가게와 사장에게 복의 복을 채워주시기를 기원한다. 우리 역시 이렇게 어려운 때 일수록, 자신도 어렵겠지만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기를 빈다.
(김현정의 뉴스쇼 2020.5.21. ‘얘들아, 그냥 삼촌, 이모가 밥 한 끼 차려준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와서 먹자. 몇 개만 지켜주기를 부탁할게. 첫째, 가게에 들어와서 쭈뼛쭈뼛 눈치 보면 혼난다. 둘째, 뭐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줘. 눈치 보면 혼난다. 셋째 오기 전에 꼭 삼촌한테 전화해 주고 와줘라. 고기 불판에 열 올려놓을게.’)
손수 아침을 차려놓고 조반을 들자고 제자들을 부르신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본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라.
요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쳤다 하여 유대인들이 박해할 때,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신다. 38년 된 병자와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불쌍하게 보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리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까지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일하신다. 사람을 통해 일하고 계신다.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뿐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손발이 되어 활동하길 원하신다. 오늘 그래서 우리를 부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란다.
- 대답만 하는 크리스천? 실행에 옮기는 크리스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들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하니 “예” 대답만 하고 일하지 않았다.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이 말했는데, 그는 “싫다”(I will not)고 말했는데, 곧 뉘우치고(He changed his mind) 포도원에 가서 일했다. 시내사본에는 맏아들이 싫다고 말했으나 뉘우치고 갔고 둘째 아들은 하겠다고 하고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돼있다. 영어성경은 시내사본을 따르고 있다. 어쨌든 의미는 같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인가? 실행에 옮긴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이다.
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본다. 오늘 우리는 ‘예’만 하는 신앙인인가? 주님께서 부탁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준행하도록 노력하는 신앙인인가? 교회 안에서는 주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사랑을 열심히 고백하며 찬미하기는 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예수님처럼 살려고 결단하고 노력하는 일에는 게으르거나 방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세상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이 지치기도 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칼날처럼 더 예민해진다. 코로나19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미디어들을 보면, 사람들을 더 자극해서 마치 실족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다.
사진 1) 5월 20일자 연합뉴스 기사 : 기독교 대한감리회 중부연회가 지난 19일 부평구 한 교회 건물에서 목회자 등 1천 여명이 모이는 행사를 열었다고 인천시가 20일 밝혔다.
사진 2~5) 실제 이날 사진
이래서 기레기라는 소리는 듣는 거다. 분노와 화를 돋우고 긁어 부스럼을 내도록 왜곡된 기사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더 강퍅해진다. 이럴 때 하나님은 일꾼을 찾으시고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주님 따라 살 줄 알아야 한다.
첫째 아들은 알기는 아는데, 자기 사정이 더 중요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사정도 있고 하고 싶은 마음이나 의지가 있지만 아버지의 부탁이 마음에 걸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서원한 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첫째 아들은 이유와 변명과 핑계가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아니 습관이다. 성경에서는 이런 것 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이유와 변명과 핑계가 없어서가 아니라 늘 습관이 됐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지는 않은가?
대답이 습관이 되고 행함 없음이 일상이 된 채로 맏아들과 같이 말이다.
주님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백성들의 장로가 되는 사람들에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말씀하셨다. 어쩌면 불신앙인들이 더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주님을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고 욕심을 부리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는 신앙인으로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손과 발이 되고 있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는 말씀을 잘 헤아려 오늘 주님은 우리가 “He changed his mind” 자만했거나 불순종했던 마음이 바뀌고, 주 부탁하시는 일을 준행할 수 있기를 빈다.
- 복음을 행하는 성도
하나님의 나라는 내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가르쳐주셨다. 이 땅에서 경험을 하고 그 향기를 알 수 있기에 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파트 경비원을 폭행하고, 결국 목숨을 스스로 잃도록 만든 사건에 대해 국민적 공분이 크다. 경비원이 육성으로 남긴 유언을 들으면서, 한 개인이 인격적인 모멸감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죽음도 불사할 만큼 얼마나 극도의 고통을 동반하는지 깨닫게 한다. 외제차를 타고 경찰조사를 받으러 나타나, 사과 한 마디 없이 염치없는 모습으로 조사받으러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그의 모습을 사람들은 뻔뻔하게 생각했다.
아파트에서 찍힌 CCTV 영상을 보면서, 어쩌면 그도 다른 데서 비슷한 대우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데서 무시당하며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그러지 못하는, 어떤 처지나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경비원에게 했던 행동과 같은 똑같은 행동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서, 그 상황에 대해서 전부는 알 수 없지만, 당일의 영상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그렇다고 해도 스스로 뉘우치고 사죄를 하고 용서를 받지 못하는 한, 정말 그는 약육강식의 생지옥 속에서 괴물 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그는 이 땅에서 아무리 호의호식(好衣好食) 하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정말 우리가 누리면서 소망하면서 살아야 할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상관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관심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생이 유한하다. 꽃처럼 시들고 잎처럼 마르며 안개처럼 흩어진다.
잠언은 4장에서 이런 말씀을 들려준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삶을 지향하며 살기를 바라실까?
중국 신소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루신의 광인이야기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남에게는 먹히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의심을 품고 서로 흘끗흘끗 상대방을 훔쳐 보고 있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마음놓고 일을 하고, 거리를 걷고, 받을 먹고, 잠을 자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그것은 겨우 하나의 관문만 넘어서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놈들은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사제, 원수 그리고 낯 모르는 사람들까지 한패가 되어 서로 격려하고 견제하며 죽어도 이 관문을 넘기 위해 한 발을 내디디려 하지 않는 것이다.”
피해망상증을 앓고 있는 광인이 역사를 들추어 조사를 해보니, 이 역사에는 연대가 없고 어느 페이지에나 ‘인의도덕’ 같은 글자들이 꾸불꾸불 적혀 있다고 한다. ‘인의도덕’이라는 글자들이 꾸불꾸불 적힌 이유를 더 조사해보니까 거기에는 ‘식인’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더라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역사가 ‘식인’의 잔인한 역사였다고 루신은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 ‘식인’ 세계의 문턱을 넘어, 평화가 이 땅에 심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분이시지 않는가?
평화를 심는 일, 나눔과 섬김과 봉사를 자원하는데, 앞장 서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