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나오미#엘리멜렉#기룐#말론#위례
2020년 5월 3일 부활절 4주
죄인들을 불러서 거룩하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모든 교회가 예배의 화복을 사모하는 때에 우리를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마음 깊숙이 다가오는 꽃 소식을 안고, 분주히 벌 나비가 여행하는 5월의 첫 번째 주일에, 어린 아이들의 순진함으로 덧입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잃었던 순수함을 되찾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여 주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3-24)
-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부활절 넷째 주일에 주님 앞에 나아온 여러분 모두에게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간만에 상점과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 코로나의 조용한 전파위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평화로워 보여, 반갑다. 사람들이 연휴를 즐기기 위해 제주도나 강원도나, 관광지에 수 많은 인파들이 몰렸고, 고속도로에는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정체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교회들도 대부분 현장예배를 재개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한 주간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다. 이천의 화재, 강원도 산불, 헬기 추락, 김정은 위원장 사망설. 가뜩이나 코로나 때문에 힘들었는데, 심적으로 복잡하고 힘들게 했다. 안타까운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넋을 놓고 울고 있다. 모든 게 잘 마무리 된 뒤에, 정말 이 사회의 시민 모두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더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오병이어의 기적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주님을 높였다. ‘세상에 오실 선지자가 이분이시다.’ 주님을 칭찬하며 반겼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주님은 조용히 그 자리를 피하셨다. 한적한 산에 잠시 머무셨다가, 큰바람과 풍랑을 만나 괴로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셨다.
‘주님, 성도들의 찬미 소리가 넘치는 곳을 떠나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넋을 놓고 슬퍼하는 사람들,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챙길 가재도구라도 있나 재(災) 사이를 뒤적이는 이들, 삶의 벼랑 끝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러 가십니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드린 기도이다. 부활절 넷째 주 우리의 심령이 주 예수 그리스도 가시는 곳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란다.
- 포스트 코로나와 포스트 사사시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담론으로 삼기 시작했다. ‘포스트 코로나’ 코로나 이후, 인간의 삶의 방식과 문화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변화가 올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누구도 미래를 예단할 수 없다. 이익에 좀 더 밝은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전도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도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리고 인간의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아담 때의 인간이나 예수님 당시의 인간이나 지금 우리 시대의 인간이나 본질은 다를 수 없다. 그래서 이럴 때 일수록 근본으로 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은 룻기 저자가 주목했던 베들레헴과 그 안에서 찾은 비전에 관한 이야기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베들레헴은 하나님께서 유다지파에게 준 유산이다. ‘집’이나 ‘가정’(家)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바이트와 ‘빵’(경제)이라는 뜻을 가진 레헴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동네 이름이다. 의미상 신앙 위에 든든히 선 가문, 가정, 그들에게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 허락된 땅이다. 소박한 평화의 단위이다.
룻기는 사사시대였다고 1:1에서 말하고 있다. 왕이 없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하려던 혼란의 시대, 그래서 포스트 사사시대를 담론으로 삼는 때가 바로 룻기의 역사지점이다. 사실 왕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못하고 자기가 곧 왕이 되고자 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은 이스라엘 내전의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 사사들의 타락, 지도층의 부패, 심지어 종교지도자의 ‘반만의 진실’로 인해 베냐민 지파가 멸절될 위기에 봉착했다. 이스라엘은 12지파의 연합체인데, 한 지파가 멸절되게 되면 그 연합체가 깨어지고 결국에는 이스라엘은 사라질 수도 있다. 사사기는 당시대 사람들도 이것을 자명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자기들이 일으켜놓고 그 탓은 하나님께 한다.
중요한 것들은 자기들이 결정하면서 뒷수습은 하나님께 맡긴다. 얼마나 신앙적으로 부조리한가?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사기는 이런 말씀으로 매듭짖는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갈 길을 잃고 제각기 방황하며 답을 찾지 못하는, 찾았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한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룻기를 통해 그 문제가 한 가정과 일상에 미친 파급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베들레헴과 엘리멜렉 가문
룻기는 한 가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엇을 나타내는지 생각해보라.
먼저 이름과 그 뜻에 주목해보라. 아버지 엘리멜렉(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어머니 나오미(나의 기쁨) 그 둘 사이에 기룐(완전함, 죽어야 할 자), 말론(보석, 병) 두 아들이 있었다.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었다. 레헴(빵, 가정경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도 기근이 있을 수 있다. 아브라함 때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신앙을 가져도 어려움을 만나고, 그 속에서 힘들 수도 있다. 자세가 문제다. 신앙인은 믿음으로 잘 이겨내며 삶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소명과 사명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뜻인데, 이름값이 무색하다. 레헴에 문제가 생기자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는 사람’의 행동과는 이율배반적이다. 신앙인들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고 인정하나 그 삶은 세속적인 방법이나 자리에 머물거나 그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엘리멜렉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
거기서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얼마간 가지고 있던 소유도 바닥이 났고, 거기서 엘리멜렉과 두 아들 기룐과 말론까지 죽었다. 모압은 피할 길인 줄 알았는데, 막다른 길이었던 셈이다.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길을 벗어나서 세상 길로 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방법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더 나은 방법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방법이 없다고 감정을 앞세울 수도 있다. 그런데 잠시는 잘되는 것 같아 보여도 꼭 그렇게 된다는 법이 없다.
기룐과 말론은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 하나는 오르바(아기 사슴, 뒷목)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룻(친구, 풍요)이다. 넌지시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 있다. 사사기를 통해서 자주 보았듯이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부터 사사에 이르기까지 이방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율법을 거스르던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율법을 어기는 비신앙적 행위가 일상이 됐다.
나오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두 며느리들은 각기 자기 길로 가라고 한다. 그것이 훨씬 나을 것은 자명해보였다. 그리고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아기 사슴이라는 뜻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오르바는 자기 길로 감으로써 그 이름의 다른 뜻처럼 뒷목을 보였다. 그런데 룻은 어떤까? 결론 부분에서 확인해보라.
- 피할 길을 내시는 섭리
나오미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동네에 퍼졌다. 반갑기도 하고 떠들썩했다(1:19). 사사기1:20-21을 보면 쓰디쓴 고백이 나타난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어찌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느냐” 나오미는 자기를 ‘마라’(쓰다)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역사에는 If(만약)가 없다는 게 상식이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인생과 시간, 역사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베들레헴에서 참고 견디며 머물러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끝까지 신앙으로 이겨내고 견디어냈으면 어땠을까? 성경은 인간의 살 방도와 피할 길이 꼭 정답이 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나타내준다. 그러기에 내 생각대로, 내 방법대로, 자기 감정이나 소신과 확신대로 하지 말고,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는 대신에, 감당치 못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시는 주님 안에서 힘주시고 능력주시는 은혜를 따라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시험과 어려움을 능히 이겨내고 승리하길 바라신다. 하갈의 절망 중에 눈을 여시고 우물을 발견하게 하신 주님이시다. 이삭을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의 고독 속에 번제물을 친히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앗수르 군대가 사방으로 에워싸고 우겨쌈을 당해, 집어 삼킬 만한 위기를 만났을 때, 주님은 그 원수들을 물러가게 하시고 흩으셨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이삭은 거기서 견디고 견디며 그랄 목자들의 핍박까지도 견뎌 내면서 마침내 거부가 되게 하셨다.
- 고엘을 자처하다.
우리 사회의 문제, 교회의 사명, 성도들의 소명과 관련하여 유심있게 살펴볼 내용이 있다.
룻이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서 이삭을 줍는다. 이것을 계기로 보아스와 룻이 결혼을 하게 된다. 성경을 모르면 마치 보아스가 룻에게 반해서 시작된 러브스토리로 읽는데 그칠 수 있다. 더 많은 부인을 소유하려는 남성의 욕심으로 그릇된 해석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형사취수제는 형제 중에 자식 없이 사망하면 먼저는 형제 중에서, 그 다음은 가까운 친척관계순으로 그 사망자의 아내에게 대를 잇게 해야 한다. 이것을 고엘이라고 한다. 모든 땅과 토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분깃이기에 대를 잇게 함으로써 땅에서 나는 소산을 먹게 하는 근본적인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남편의 형제가 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 성읍의 어른들이 그 형제를 불러다가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그를 치욕스럽게 하고 ‘신 벗긴 자의 집안’이라고 그를 조롱했다.(이익상, ‘내가 왕이었습니다.’, 규장, 287)
친척관계를 따져보니 보아스는 두 번째였다. 그래서 첫째 되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고엘’의 의무를 다하겠는지 묻는다.
그가 계산을 해보니 손해보는 장사였다. 결혼을 해서 엘리멜렉의 재산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돈을 지불하고 엘리멜렉의 밭을 산다지만, 그 땅은 희면이 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엘리멜렉 집안의 유산이다. 오히려 아들이 태어나면 성장해서 어른이 될 때까지 이것 저것 뒤치다꺼리를 해주어야 한다. 힘은 힘대로 쓰고 돈도 낭비하는 셈이다.
4:8절을 보라. “그의 신을 벗는지라.” 첫 번째 의무의 대상자였던 그가 신을 벗었다는 의미를 알겠는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지파 공동체 사이에 도움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채 나뉘고 상대의 고난을 방관했다. 전쟁에 나가서도 여전히 전리품에만 관심을 둘 뿐,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몇 번이나 다짐했던 지파 사이의 연대의식도 잊었다. 서로에게 고엘이 되어줄 공동체의 약속과 의무가 사라진 시대가 사사들이 활동하던 시대이다.(이익상, ‘내가 왕이었습니다.’, 규장, 291)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신을 스스로 벗어던져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가 사사시대였던 것이다. 기독교인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고 감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닌지, 나는 어떤지 돌아보아야 한다.
결국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고엘의 의무를 자처했다는 내용이 오늘 말씀의 내용이다. 단순히 룻을 아내로 삼은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가 바뀌고 있고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현실에서 율법 준수와 의무이행은 생략한 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던 시대에, 보아스는 율법을 지키며 손해를 보더라도 자처했던 사람이다. 룻기 저자는 한 가정사의 이야기가, 답이 없는 사사기의 처한 현실과 흡사하다 본 것이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에서 마치 가정과 경제를 근간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실존하는 삶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룻기는 우리에게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참된 회복에 대한 희망은 무엇인가? 이웃의 고통을 나와 상관없게 여겨서는 안된다. 함께 공감하고 아파하고 연대하면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교회가 그 일을 해야 한다. 룻은 그 이름대로 스스로 ‘마라’라고 부르라는 나오미의 ‘친구’나 다름없었다. 선한 사마리인과도 같다. 그리고 보아스와 결혼해서 결국은 ‘풍요’라는 보상을 얻었는 것을 룻기는 전하고 싶은 것 같다. 주님은 집나가 탕자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복음의 능력은 이런 것도 포함된다. 전파력만 복음이 아니라 돌아온 이를 품는 포용력 말이다.
‘이웃의 고통과의 연대’라는 말이 너무 거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었다. 오벳의 뜻은 ‘종’이라는 뜻이다. 기드온 이후의 사사들은 모두가 스스로 왕이 되려는 욕망이 싹텄고, 그것을 감추지 못하다가 스스로 왕 노릇을 했다.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면적으로 고백하지만 실상은 평범한 사람에서부터 사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주인 삼지 못했다.
그런데 사사기 기자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해 가졌던 연대의 소중한 의식을 통해 주의 종으로 겸손한 자리를 회복하자고 말하고 있다. 더욱 오벳이라는 이름을 통해, 겸손한 종,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가질 것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를 섬기는 겸손한 종이셨다. 빌립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씀한다.
이시간 내가 왕이 되려는 마음은 없었는 지 살피자.
주님의 종으로 십자가 진 제자로 결단하자.
이웃을 기억하며 복음의 전파자와 포용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