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6일 부활절3주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정직으로 만민을 판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현장에서의 예배를 재개하기 시작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온 대지가 생명의 기운으로 찬란한 때에, 생동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 안에서 소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1. 인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셔서 쉬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이 시간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빈다.

 

약국에 한 사내가 들어와서 “딸꾹질 멎게 하는 약”을 달라고 했다. 약사는 “잠시만요.” 하면서 약을 찾는 척하더니 갑자기 사내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렸다. 그리곤 히죽거리며 말했다. “어때요? 멎었죠?” 그 사내가 약사를 한 참 바라보더니, 말한다.

“나 말고 우리 마누라가 한단 말이야.”

 

지레짐작이 낳은 참사였다. 우리도 지레짐작을 참 잘한다. 당해보지도 않고 섣부르게 말한다거나 넘겨짚어 말하다가 오해와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할 수 있는 일인데도 해보지도 않고 못한다고 포기하거나, 자기에게 찾아온 기회이자 행운인데도 겉으로 보이기에 안되는 것처럼 보여서, 딱 그 앞에서 스스로 관두는 일도 많다.

때로는 인생에서 애굽의 군대에 쫓김과 동시에 홍해를 만나기도 하고 골리앗을 만나 두려움과 걱정과 공포에 싸이기도 하는데, 인간적인 생각을 하느냐 하나님의 방법을 찾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한 문제다. 오늘의 선포되는 말씀 속에서 위로와 힘과 용기와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1. 물맷돌의추억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일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는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주웠다. 목자들이 매는 가방주머니 같은 데 넣었다. 군사들은 그 행동이 뭔지 몰랐다. 전쟁에 나아와 본적이 없는 민간인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맞서려는 자체가 말이 안됐다. 그런데도 그것을 그냥 지켜보고 있는 이스라엘군을 생각해보라. 사기가 완전 바닥이었다. 무기력해졌다. 방관하고 있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의 행동을 질책했다. 동생을 사지로 내몰 수 없어서, 지키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저 사람들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울이 투구를 씌워주고 갑옷을 입히고 칼을 차게 한다. 그러나 곧 그것을 버리고, 막대기를 들고 골리앗에 가려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 군대 모두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이 상태로 골리앗과 싸운단 말인가?’ 잠시 후 처참한 상황을 보게 될게 뻔했다.

 

그런데 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인물이 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맷돌의 추억’이라고 정했다. 누구일까? 맞다. 사울이다. 사울은 다른 한 손에 든 물매를 보았다. 끈처럼 보이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은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사울의 눈에는 그 보이지 않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다. 베냐민 지파의 특징은 왼손잡이가 많다. 사사기를 보면 게라의 아들이었던 사사 에훗도 왼손잡이다(삿3:15). 이들은 전쟁을 할 때, 왼손으로 물매를 돌리다가 던지면 정확히 맞추는 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오른손에 무기를 든다. 그래서 상대방의 오른손에 어떤 무기를 가졌으며, 그 무기의 사용을 예측하며 방어도 하고 공격도 한다. 상대방의 태세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베냐민 사람들의 왼손을 예측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날아온 물매에 맞아 중상을 당했다. 그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사사기20장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내전이 벌어져서 베냐민 사람들과 전쟁을 하는 상황이다.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달인이랄까, 명수랄까,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람.

그런데 바로 그 다윗이 한 손에는 막대기와 다른 한 손에는 물매를 들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사울이 이 모습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베냐민 사람들은 어릴적부터 이런 놀이를 하면서 성장했는지도 모른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왕인데, 그가 왕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자주 보아왔고 익숙했다.

 

 

  1. 본것과못 본 것

골리앗은 다윗이 오는 것을 봤다. ‘이런 사람이 전장에?’ 급 무시당한 느낌이어서 화가 났다. 삼상17:43을 보면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말한다. 기가 차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골리앗 무엇을 봤는가? 한 손에 든 막대기를 봤다. 다윗의 한 손에 있는 물매는 못 봤다. 그는 큰 칼을 가졌다. 체구가 커서 누구도 맞서려고 하지 못했다. 이 싸움은 보나마나다. 골리앗이 휘두르는 칼에 다윗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서, 골리앗이 말한다.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에게 주리라.”(44)

 

그렇다면 사울이 본 것은 무엇인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다. 곧 물매를 돌려 골리앗에게 던질 다윗을 예감했다. 골리앗은 막대기를 보았지만 사울은 다른 한 손에 든 물매를 보았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가까이 달려가더니, 손을 주머니에 슬쩍 넣어 아까 챙겨뒀던 돌을 뺐다. 그리고 물매를 돌려 골리앗에게 던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데, 사울의 직감은 적중했다. 물맷돌은 총알 같은 속도로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히 박혔다. 그가 여리고성처럼 쓰러졌고,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를 벴다. 성경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51b) 증거하고 있다.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승리하시면 사방으로 에워쌌던 굶주린 사자와 같은 원수는 썰물처럼 빠져간다. 사마리아성을 둘러쌌던 아람군대도 물러갔다. 예루살렘을 완전 포위했던 앗수르 군대도 물러갔다. 여러분의 삶을 포위하고 있는 어둠과 캄캄함, 고통과 재난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를 빈다.

 

골리앗이 못 본 것이 있다. 무엇인가? 흔히 여기까지 말하면 ‘물매’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막대기만 보고 물매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무엇인가? 그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고 계셨다. 그걸 모르고 하나님을 모독했다. 45절을 같이 읽어보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하나님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 다른 말로 현존하심, 더 간단한 말로 살아계심을 나타내길 사모하는 자에게, 그 인생 가운데 함께 하신다.

이것은 사울이나 이스라엘군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들을 골리앗은 보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골리앗의 위협하며 조롱하는 말은 들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했다.

 

 

  1. 살아계신하나님신앙점검

신앙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것이 있다. 다윗이 싸우러 나가겠다고 하니까, 사울이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17:35) 말한다. 용사로 훈련받으며 자라난 사람을 어떻게 이기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말한다. 그도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숙달된 것이 있다. 양을 지키며 사자나 곰이 와서 그 새끼를 물어가면 쫓아가서 새끼를 그 입에서 건져내고 사자와 곰을 쳤다. 숙달된 것이 있기는 종류는 다르지만 둘 다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다.”고 말한다. 골리앗은 인간적인 방법의 숙달을 의미한다. 다윗은 신앙적인 방법의 숙달을 의미한다. 여러분 신앙의 숙달과 성숙을 사모하자.

사울은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축원한다.

사울은 그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은 시인하나 살아계심을 나타내려는 열정은 이미 식은 지 오래다. 잘 알 것이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하지 못하고 자기 필요를 위해서 예배했다. 전리품에 대해 불순종 했고, 왕이 돼서 권력에 안주하고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에만 마음이 흐르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게을리 하기 시작했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을 원치 않았다.

다윗이 싸우러 나아가겠노라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사울은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축원은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것은 참된 신앙과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용기를 잃었고 담대함을 잃었다. 골리앗을 해결하지 못하여 주저하고 있고 패배에 대한 자존심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왜 주저하고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사울은 소년이나 다름없는 다윗 뒤에 숨으려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반면에 다윗은 골리앗과 싸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고 하고 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칼과 창과 단창이라는 인간적인 무장과 방법과 생각이 완벽할지라도 다윗이 평소에 익숙했던 물맷돌 한방에 어처구니없이 쓰러졌다. 처음부터 그 방법으로는 승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점이 오늘 우리 신앙의 점검사항이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수준에 그치느냐? 아니면 그분의 살아계심을 믿음으로 승리하여 나타내느냐? 사울의 말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누구나 해당될 수 있다. 그런데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르다. 오늘 우리 모두가 아는 신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으로 나아가고자 사모한다면, 주님 안에서 힘들고 어렵고 거친 삶에 담대함으로 맞설 힘과 용기를 내라.

 

 

  1. 작은것을들어 쓰시는 하나님

그러고 보면 힘으로만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생각 같지 않다. 물매와 같은 것으로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능력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장정들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조금씩 모금을 한다고 해도 이백 데나리온이나 부족하다고 했다. 그러나 어린 아이 하나가 주께 드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주님은 원하는 대로 풍족히 먹고 12광주리나 남게 하셨다.

부산 기장군에서 재난 지원금을 제일 먼저 지급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보다는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써 달라며, 받은 지원금을 도로 기부하는 감동의 행렬들이 이어졌다. 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을 하면서, 누가 기부를 하겠느냐며 논쟁이 불붙고 있다. 한 번도 남을 도와본적이나 나누고 섬겨보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욕심 차리기에만 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딱한 처지에 놓인 이웃이 있는 것을 알고 자기를 양보하며 내려놓는 사람들을 통해서 국난을 극복하고 어려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을 볼 수 있다. 칼로 이기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물맷돌처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이기려는 사람들 아니고 무엇인가?

 

개포교회 예화) 마지막으로 먹고 죽겠다고 하는 가련한 여인의 음식을 가져오게 해서 먹음으로 그 불쌍한 여인을 지킬 수 있는 게 목회인 것 같다. 성도의 절망 섞인 눈물을 먹어야 성도도 살리고 목회자도 살고, 이겨낼 수 있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들어 쓰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여러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두가 힘들다. 경제적으로 어둡다. 우리 중에는 개인적인 일로 절망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분도 있다. 누구나 인생에서 골리앗을 만난다.

 

이 시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눈이 열리시길 빈다.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포위하고 에워쌌다. 사환 게하시가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가득 에워쌌음을 보고 두렵고 떨려서, 엘리사에게 급하게 알린다.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이제 꼼짝 없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빠져나갈 방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라는 것이다.

그때 엘리사가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열하6:16)

엘리사가 기도한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의 눈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여시매, 불말과 불경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있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여러분, 믿음의 눈이 열려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 능력과 힘과 권세로 여러분을 감싸고 보호하고 지키심을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고진하의 장님굴새우라는 시가 떠올랐다. 삼척 환선굴에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데 장님굴새우가 산다고 한다. 장님굴새우의 툭, 불거진 눈은 칠흑의 석회암동굴 속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대신에 길쭉한 뿔더듬이로 더듬더듬 더듬으며 산다.

 

“생각해보면, 질퍽거리는 물욕의 어둠에 빠져 허우적이며 신의 빛을 더듬어 찾는다는 당신도 장님굴새우보다 나을 게 없지!”(고진하, 우주배꼽, 68)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신앙의 더듬이로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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