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9일 부활절 2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들녘의 푸른빛이 생기를 자랑하며,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때에,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저희 심령 속에 가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는 서오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 삼손의 힘의 원천은 머리카락에 있지 않다.
오늘은 본격적인 농사를 돕는 비가 내린다는 곡우(穀雨)다. 만물을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빈다. 코로나19 때문에 여전히 고통이다. 그런데 인간의 활동이 멈추자 자연은 토질, 공기질, 수질 모두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이시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 생각, 마음 모든 것을 멈추고 주님께서 정화시켜주시고 회복시켜주시며 충만히 채워주시는 은혜가 풍성하길 바란다. 주님께서 원하신다.
특별히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힘주시고 능력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달으라. 지혜와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돌아가시길 빈다.
1) 삼손의 이야기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도 많이 만들어졌고,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이야기와 함께 주일학교 단골 이야기이다. 그마 만큼 널리 잘 알려져 있다.
2) ‘삼손’ 하면 떠오는 것은 ‘힘이 세다.’는 것일 것이다. 맨손으로 젊은 사자(힘이 좋은 사자)를 새끼 염소처럼 찢어 죽였고, 블레셋 사람 1천명을 혼자서 해결했다.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이십년 동안 지내면서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켰다.
3) 딤나에 사는 한 여자를 보고, 그와 결혼하겠다고 한다. 부모는 왜 블레셋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뜯어말린다. 당시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며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삼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부모와 함께 내려가서 딤나 여인을 데려오려고 하는데, 거기에는 풍속이 있었다. 그 지인들을 불러서 잔치를 베풀며, 상견례 같은 것을 하는 것이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냈는데, 그 친구들이 풀지 못하자, 삼손이 아내 삼으려고 했던 여인을 통해 정답을 알아낸다. 삼손이 삐쳐서 집에 돌아갔다.
얼마 후, 삼손의 마음이 풀려서 아내를 데릴러 갔다. 그런데 장인되는 사람이 혼사가 깨진 줄 알고, 그 여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다. 삼손이 단단히 심통이 났다. 그래서 여우 삼백마리를 붙들어서 꼬리와 꼬리를 묶어, 거기에 홰를 달고는 곡식밭으로 몰았다. 한 해 농사가, 아수라장이가 됐다.
블레셋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듣고, 원인제공자인 여인과 장인을 불살랐다. 삼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피신했다.
일이 일파만파 커졌다.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에 올라와서 공격하려고 했다. 15장 11절을 보라. 유다사람 3천명이 삼손에게, 어쩌자고 블레셋을 건드렸느냐고, 그들이 유다를 다스리고 있는데, 일을 왜 이 지경으로 만들었냐고 하면서,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겨준다. 삼손만 넘겨주면 공격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삼손이 포승줄에 묶여 블레셋에게 넘겨지는데, 밧줄이 불탄 삼 같이 떨어져 나가면서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들고 블레셋 1천명을 죽였다.
4)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가 들릴라에게 머리를 한 번도 잘라본 일이 없다는 비밀을, 결국은 알려준다. 들릴라가 삼손을 그의 무릎에서 자게하고, 그 동안 블레셋 사람들을 부른다. 마침내 삼손은 붙잡히게 되었다. 눈이 뽑히고 놋줄에 포박되어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나 후회가 됐을까? 한 순간, 순식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5) 삼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 흔히 한 번도 잘라보지 않은 긴 머리카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삿16:22을 보면, 삼손의 머리가 밀린 후에 다시 자랐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나중에 삼손이 블레셋에 복수를 한다. 그래서 마치 긴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오는 것처럼 인식하게 됐는 줄도 모르겠다. 어릴 적,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머리가 자라도록 내버려둔 블레셋도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가 복수를 당하니 말이다.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면 힘이 생길 것 아닌가?’
6) 결론을 말하자면, 긴 머리카락이 정확한 본질이 아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지, 아닌지에 달려있다.
-14장6절을 보라.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사자를 찢었다.
-14장19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아스글론 30명을 쳐 죽이고 노략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굉장히 문제이다. 어쨌건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
-15장14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블레셋사람 1천명을 죽였다.
- 구별된 사람의 비행(卑行)
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이었다. 나실인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진 사람을 말한다. 독주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되고, 포도주는 입에도 대지 말아야 하며,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대함으로 더럽히지도 말아야 한다. 혹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정화를 위한 ‘자가격리’와 같은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머리에 칼을 대서도 안 된다. 그래야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인지 알 것 아닌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삼손의 머리가 완전히 밀리고 힘을 잃은 것이 아니다. 고작 7가닥이 밀렸을 뿐이다. 그런데 힘이 없어졌다. 그는 나실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어긴 샘이 됐다. 마치 잘못 이해하면 7가닥 때문에 힘이 없어진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떠나셨다.”는 것을 삼손이 깨닫지 못했다.
삼손에게 이럴 힘과 능력을 주신 것은 결코 긴 머리카락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용하길 원하셨기 때문에, 나실인으로 구별된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 그런데 그에게 넘치는 힘만 스스로 맹신했지, 하나님의 그 뜻을 헤아리지는 못했다.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길 원하심을 깨달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에 있다고 했다.
- 삼손은 왜 그 능력을 잃어버렸는가?
왜 하나님의 영이 삼손을 떠난 것일까? 좀 더 살펴보자. 성경을 보면 그의 머리카락은 어떻게 됐었는가? 처음부터 완전히 밀린 것이 아니라 삼손이 여자의 무릎을 베고 자는 동안 7가닥 밀렸을 뿐이다. 단순히 머리카락 7가닥을 밀었기 때문일까?
14:6에 딤나로 내려가다가 사자를 찢어죽였는데, 성경은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왜? 나실인에 대한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사자를 그냥 죽인 것이 아니라 찢어죽임으로 피를 봤을 것이다. 성경은 피를 생명으로 여기기 때문에, 함부로 피를 봐서는 안되고, 나실인은 접해서는 안된다. 부정해지기 때문이다. 부정해졌을 때에는 정결해지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가, 세상에서 얼룩진 마음을 가지고 마음이 부정해질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서 마음의 정결을 위한 시간을 갖지 않으면 온갖 세상적인 생각이 가득하게 된다.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부모가 상심하거나 근심하게 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뜩이나 반대하는 혼담을 위해 내려가는 중인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얼마 후에 혼담을 위해서 다시 내려가는데, 그 사자의 주검에 벌 떼와 꿀이 있는 것을 봤다. 삼손이 그것을 떠다가 부모에게 드려 먹게 했다. 그런데 이때도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죽은 사체와 접함으로 부정하게 됐다.
자기 욕구를 해결하거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마치 나실인처럼 기독교인으로서 구별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을 구별하지 않기 시작할 때, 우리 안에 세상적인 것들이 점차 들어서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능력, 성령의 역사로 채워질 공간은 적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침내 삼손이 마지막 남아있던 것을 버린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릴라에게 말한다. 들릴라는 블레셋 이름이 아니라 셈족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자꾸만 와서 삼손의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아내면 큰돈을 주겠다고 한다. 16:5, “각각 은 천백 개씩을 주리라.” 10명이면 1만1천개이다. 사람은 물질에 약하다. 들릴라가 여러 차례 그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삼손도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날마다 재촉하고 조르니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었다.”(16:16)고 성경이 말한다.
“삭도를 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른 조항들은 어겼어도, 자기 밖에 모른다. 남들은 모른다. 그런데 머리에 삭도를 대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삼손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자는 동안, 드릴라가 머리카락 7가닥을 밀어보았다. 힘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블레셋이 닥쳤을 때,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다.”(20절) 그러나 “여호와께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다.”
기도할 때, 이런 기도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현존하심이 드러나는 것이다. 로마의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한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예수 십자가 아래에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된다.
삼손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자는 동안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 것처럼, 마찬가지로 세상의 달콤함과 안정감에 취해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떠난 사람처럼 살게 된 것은 아닌가? 때로는 교회가 세상의 질타를 받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같은 취급 받을까봐 부끄러워, 미움을 당하고 배척을 당할까봐 어떤 사람은 기독교신자임을 감추고, 아닌척하며 살아갈 때도 있다. 우리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머리카락’과 같은 표시는 무엇인가? 예수십자가다. ‘나는 기독교인이요.’ 해서 기독교인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에서 기독교인임의 표시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세상이 유혹하고 조르고 강요하는 것에 전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이 부으실 영을 사모하자.
블레셋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는 날, 삼손은 블레셋에게 원수를 갚았다. 블레셋의 방백들을 비롯해 남녀 3천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 흥건히 취해있었다. 삼손을 불러다가 재주를 부리게 하자고 제안한다. 삼손은 볼 수 없으니, 이 집의 기둥에 세워달라고 한다. 그리고 28절 같이 읽어보자.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갚에 하옵소서.”
그리고 기둥을 넘어뜨려 결국 원수를 갚았다.
다시 이런 힘이 생긴 까닭은 무엇인가? 22절은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말씀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머리가 다시 자랐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머리가 자라지 못하도록 수시로 깎았어야 한다. 그리고 머리가 자라면서 삼손 스스로도 힘이 다시 세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머리가 다시 자랐다.’는 성경의 증거는 무엇인가?
1) 뉘우침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정화되는 시간이었다.
2) 영적인 회복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길 원하시는 은혜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3) 영적으로 구별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명감을 갖고 결단하는 순간이 됐다.
누구나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마음과 영혼의 정화가 찾아온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살았던 삼손이다. 부정한 것에서 떠낸 달콤함 때문에 자신의 사명이니 목적이니 존재니 하는 것들을 잊고 욕심 부리며 살았다. 욕구나 욕망에 이끌려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그러나 머리가 다시 자라는 동안 시간은 그를 회복시키고 그가 누구인지 사명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고 구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만, 저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아직 많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만을 드리거나 병행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영적인 기회이다.
안타까운 최후였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힘과 능력을 주셨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때, 삼손은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방금까지도 무기력한 줄만 알았던 그에게 기둥을 쓰러뜨릴 수 있는 강한 힘이 그 속에 점차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국가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블레셋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한 힘이었다.
시대가 힘들고 피로감이 쌓이게 하고 괴로울 때,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빈다.
주님은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히 함께 있게 하겠다.’(요14:16) 약속하셨다.
요엘 시대에는 심각한 재난이 지나간 뒤에 사람들이 망연자실해서 힘을 잃고 낙심하고 있을 때, ‘주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선포됐다.
성경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말씀하고 있다.
에베소서3:16은 뭐라고 증거하고 있는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주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들을 여러분에게 채워주신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이시간 오늘의 말씀을 깨닫고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