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2일 부활주일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새 생명의 기쁨을 온 인류에게 허락하신 소망의 하나님, 기쁜 부활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무서운 전염병 앞에 무기력함과 피로감을 느끼며 지친 심령들이, 무덤을 깨치고 일어나셨던 주님의 승리를 힘입어 소생하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희망을 한 아름 안겨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들이 잇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1. 죽음과 사망의 돌문이 열렸다.
부활절 아침,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김없이 꽃들이 피어나고 이파리들이 나무의 옷을 입히고 있다. 생명의 신비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시다. 부활절 아침 주님의 새 생명이 여러분에게 가득 하길 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축원한다.
우리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실정이다. 코로나19가 우리나라에서는 점차 줄어드는 형국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전 세계는 아직도 확진자가 늘고 있고,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여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방심은 금물이다. 미국에서는 하트섬이라고 불리는 외딴 섬에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은 무연고자들을 집단 매장하고 있다고 한다. 슬픈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고 있다.
예수의 시신을 보려고 향품을 준비한 여인들이 찾아갔다. 그 무덤을 막아둔 돌문을 누가 옮겨 줄까, 걱정했다. 그 돌은 심히 컸다(막16:4). 마치 그것처럼 사망과 죽음의 권세에서 누가 심히 큰 슬픔과 고통의 바위를 옮겨 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사망과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힌 부활주일을 맞았다.
그러나 무덤에 가까이 가보니, 돌문은 굴려져 있었다. 나사렛 예수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 살아나셨다. 사망과 죽음의 권세가 예수를 가두지 못했다. 그 권세를 깨뜨리셨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맞는 아침의 현실은 무겁고 꽉 막혀 있지만, 부활의 역사를 우리 모두가 체험하길 기원한다.
흰 옷을 입은 천사들이 증거한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막16:7)
여러분, 천사들의 증언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란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뵈오리라.’ 왜 주님은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거기에서 뵈올 수 있다는 것일까? 천사들이 말한 증언의 의미는 무엇일까? 주님은 이 신비의 눈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뜨길 원하신다. 주님은 여러분의 삶의 현장과 자리에 먼저 달려가 준비하고 계신 분이다. 그 믿음으로 특별한 사명을 우리가 맡아주길 원하신다.
2. 갈릴리에 나타나신 주님
주님께서 갈릴리호 서쪽 디베랴호수에 나타나셨다.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함께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이 주님이신 줄 몰랐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당연히 없었다.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일러주셨다. 그랬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순히 수확량이 많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심으로 역사가 나타났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하갈이 옆에 있는 샘물을 두고도 절망했다.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시니, 그 샘물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다.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도록 하신 것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믿음의 눈이 열리는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한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한다. “주님이시라.” 말한다. 육지에 올라와보니, 주님은 허기진 이들, 밤새 지친 이들을 위해 조반을 차려놓으셨다. 숯불이 있었고, 생선이 구워지고 있었다. 떡도 준비돼 있었다. 주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셔서, 그물을 확인해 보니, 153마리나 됐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많았다.
식사의 자리를 함께 하면서 어느 누구도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바로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알기 때문이었다.”고 증거한다.
요약하자면 처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이신 줄 몰랐다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주님이시라는 말에 제자들은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감히 묻지 않았다.
3.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누구일까? 추론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추측해보라. 이곳에 있는 7인의 명단은 이렇다. 베드로, 디두모라 하는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 야곱과 요한, 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제자.
베드로는 이미 제외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는 사도 요한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근본주의자들 외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디두모라 불리우는 도마도 후보에 속했었다. 구체적으로 언급된 이름은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와 나다나엘이다. 중요도와 관련있다고 보았을 때, 구체적인 이름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는 추론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근거가 없다.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한다. 그런데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대목이다.
첫 번째로 요한복음 13장 23절에 나온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주님께서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할 것을 예고할 때, 주님의 품에 기대 있던 사람이다. 주님과 아주 가까이 있는 제자이다. 성경은 거리적인 가까움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징적인 가까움을 읽어야 한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베드로는 이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묻게 한다. 베드로가 물으면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를 통해 묻게 된 것인가? 아니다. 충분한 공간 안에 있다. 그는 주님과 그마 만큼 친밀감이 넘치는 이를 상징하고 있다. 여러분은 주님과 얼마나 친밀감을 유지하시는가? 주님의 품을 의지하고 기대 있는가? 주님의 품을 사랑할 만큼 가까운 인격적인 관계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두 번째로 나사로에 대해서다. 나사로가 병사하기 직전에 그의 누이들이 주님께 사람을 보내며 말한다.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죽은 나사로에게 가셨을 때, 주님은 불쌍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셨다. 조문을 온 유대인들은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말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호명된 이이다. 나사로는 죽음의 굴에 놓였었다. 부패해서 냄새가 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수족이 베로 동인 채로 그 동굴에서 걸어 나왔다.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걸어 나오라. 영혼의 질병으로 죽음이라는 절망을 만났을 때, 때로는 포기 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고, 아무 힘이 없어 주저앉고 싶을 때, 죽음이나 다름없는 것을 선택하고 싶고, 죽음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무기력함의 동굴 속에 놓였을 때,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곧 듣고 걸어 나오라. 아시는가? 주님께서 비통해하시고 울고 계신다.
주중에 어느 자매와 전화통화를 했다.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아니 그마저도 남아있지 않아 나쁜 선택 밖에는, 선택할 게 없는, 자매의 상황을, 이야기 들으면서,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왜, 울고 계십니까? 얼마나 아프시길래 비통해하십니까? 그에게로 찾아가 그를 어둠과 절망에서 불러주십시오. 그가 걸어 나오는 것이 주님의 기쁨임을 알게 하옵소서.”
기억하라. 여러분은 죄와 절망과 어둠과 죽음에서 주님께서 호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존 쉘비 스퐁이라는 미국 성공회 주교는 나사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지나 생명속으로 들어간 그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마치 포도나무의 생명이 가지들을 통해 흘러 들어오듯이, 그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존 쉘비 스퐁, 요한복음,325) 부활절 아침, 어둠과 고통과 상처가 여전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 가운데 흘러넘쳐 나길 주님께서 바라신다.
세 번째는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키던 제자이다. 요한복음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욥과 친구들이 언성을 높이며 싸운다. 사실 처음엔 이러자고 한 게 아니다. 욥은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그 친구들은 불원천리하고 달려왔다. 위로하고자 말이다. 참 좋은 친구들이다. 그런데 위로하고 힘이 돼준다는 게 언쟁이 됐다. 서로 날카로워지고 말이 뾰족해졌다. 급기야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 그래서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욥이 말한다.
요즘처럼 힘들 때 누군가 의지할 만한 대상이 있다는 것은 참 큰 복이다. 좋은 사람은 누군가 힘들어할 때, 옆에서 버팀목이 돼주는 사람이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갔다. 그런데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십자가 고통을 당하는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지, 해줄 수 있을지 지키고 있다. 그리고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당하고 있는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주고 있다. 어머니로 보살피고 있다. 주님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밖에는 그 부탁을 감당할 사람도 없으며, 자신만의 특별한 사명임을 깨닫고 기쁨으로 감당하는 사람이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이다. 그와 같은 은혜가 이 아침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원한다.
네 번째는 오늘 말씀에서 나타난다. 갈릴리 호수 서편 디베랴호수에 나타나신 주님이 부활하신 주님인 줄 최초로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증거하며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4절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7절에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12절에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즉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부활을 모르거나 소망없는 일상을 지내고 있는 사람,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활을 알게 하는 사람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하심을 알게 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만나게 되면 돈 맛을 알게 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음란한 쾌락만 알게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의 맛을 알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의미와 맛을 알게 하고 평안을 깃들게 만들며, 그러기 위해서 부지런히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도 있다.
요즘 개그맨들이 없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유튜버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시민들 곁에 다가가서 ‘몰카’ 형식이기는 하지만 유쾌함과 기쁨을 주고 있다. 웃음을 주는 일을 천직처럼 여기고 소명감으로 안고 찾아가는 유튜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들의 최고의 사명은 무엇인가?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소망되심을 알고 절망하는 이들, 괴로움에 빠진 이들, 불평과 불안과 언쟁과 욕심이 사나운 곳에 찾아들어가 복음을 나누는 사람이다.
박해 중에 빌립이 사마리아에 들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게 하자,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사도행전이 증거한다. 고린도교회를 위해 바울이 인내심을 갖고 눈물로 기도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자 우상이 가득하고 다툼과 분열이 심했던 곳에 화해와 용서와 일치의 역사가 나타났다. 에베소 교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증거되자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 넘치기 시작했고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에 남아 사명을 감당하고 겸손히 섬기면서 교회는 성숙해갔다.
21장 20절을 보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표현이 또 등장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다. 그런데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드로가 결코 배신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실패한 믿음을 가진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보고 있다. 예수님 믿으면서 믿음이 무너지고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다시 주님께로 나아오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믿음이 부족한 자의 믿음을 도와주고, 의심하는 자의 심령을 붙들어주며 주님의 변함 없는 사랑에 포도나무 가지처럼 붙어있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누구인가?
여러분, 누군가가 우리 교회에 대해서 물으면 이런 식으로 대답되지 않는다. 어떤 모임이나 단체처럼 말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인격으로 말하게 된다. 우리 교우들을 말할 때, 한 사람 한 사람 아름다운 신앙적 모습이 인격으로 어울어져 말하게 된다. 어떤 부분을 말할 때는 어떤 권사님이 모델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부분을 말할 때는 어떤 집사님이 모델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을 말할 때에는 모두가 어울어져 빚어지고 있는 모습이 인격체처럼 조합되어 말하게 된다. 교회는 그래서 모든 지체가 하나가 된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누구이길 원하시는가? 요한은 이런 증거를 하고자 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모습은 어느 누구를 특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12제자를 넘어선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부활절 아침 우리는 막막하고 어렵고 힘든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여전히 현장 예배를 하느냐, 온라인 예배를 하느냐가 논란거리가 되며, 때로는 이유 없는 질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 부활절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어 세상에 들어가 참 생명과 평화의 소망을 심어놓는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