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5일 사순절 마지막 주, 종려주일 주일설교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들녘의 푸른빛이 생기를 자랑하며,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때에, 세상은 코로나 19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저희 심령 속에 가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 방어용 검?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화두는 온라인 예배를 언제까지 하느냐, 처음엔 2-3주면 될 줄 알았는데, 한 달이 넘어가면서, 모두가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고난주간입니다.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신 주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능력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상의 삶의 자리, 그리고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왠지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주님은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뒤에,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평소 사랑과 용서와 평화로운 말씀을 하신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통적으로 해석하기 참 어려운 대목입니다. 도대체 칼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흔한 설명은 칼은 공격용과 방어용을 목적으로 하는데, 공격용은 안 되지만 방어용은 된다는 설명입니다. 여리고 같은 지역에는 노적(路賊)들이 출현하곤 했습니다. 이럴 때, 어쩔 수 없이 자기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노략 당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처, 자식, 사람들이 눈앞에서 능욕을 당하고 사로잡혀갔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행복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 중 기드온 때에는 미디안이 괴롭혔습니다. 미디안이 몰려오면, 그것을 피해 절벽 같은데 방공호 같은 굴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지내야 했습니다. 거기는 약탈을 당해도 최소한 목숨은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눈앞에서 고스란히 약탈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오늘날도 미국인들은 방어용으로 총기소지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래서 더욱 총기범죄나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자기와 가족의 신체와 재산을 지킨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악학으로부터 피해와 불행을 당했다는 것보다도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가책이 더 심하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검을 사라는 말씀에 대한 또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로마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벌이던 집단이 있습니다. 젤롯이라는 열심당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세상을 바꿔놓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바랐다는 것이죠. 그래서 적어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지지하거나 편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던 주님께서 암묵적인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37절에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게 되실 겁니다. 주님은 세상 권력자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성도 말입니다.
분명 권력자나 기득권자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불의함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 희생양을 찾겠지요. 그렇다면 불법자와 동류인 취급을 받도록 온갖 음모들을 꾸미고 함정에 넣을 시도들을 하게 될 겁니다. 거짓 증인들을 내세울 테고, 내부자를 협박하고 포섭해서 명분을 만들겠죠.
역사가 그래왔습니다. 이세벨이 아합왕이 탐내던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불량자 두 명을 섭외했습니다. 그들의 거짓 증언 때문에 나봇은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었다. 아합왕은 나봇의 죽음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포도원에 눈이 멀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과거에 장관을 지낸 어느 작가에게 검찰과 한 언론사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시장우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선입견, 오만과 편견, 인간의 무지가 어울어져 옳은 판단력을 잃곤 합니다.
N번방 사건에서 조수빈의 성적 착취와 악마적인 범죄의 본질 보다도 손석희에 대한 의심의 방향으로 본질이 흐려졌습니다. 천박해진 언론이 하는 일들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근거 없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추측성 기사를 더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이 가진 죄성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마가복음에 보면 거짓 증인들이 많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26: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막14: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너무 많다 보니 증언들이 불일치했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하고, 설령 조금 있다 하더라도 죽일만한 죄는 아니니, 채찍질 하고 놓아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라바를 풀어주는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사건의 본질이 왜곡되고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흉계대로였습니다.
37절의 말씀을 보면 주님은 죄악된 세상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뭐라고 증언합니까?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고,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을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아무튼 이미 제자들은 방어용이었겠습니다만,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검을 가지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하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나면, 제자들은 잔당으로 취급당하게 될 테고, 그 때 스스로 방어할 무기를 준비하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열심당원들은 방패가 되어줄 수도 있겠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하신 말씀.
여전히 방어용으로는 허용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는 칼을 빼 들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의 귀가 잘려 나갔습니다.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베드로의 의협심을 보여주는 대목이죠. 그런데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마태복음서에서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 말씀하셨습니다. 방어용도 허락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휘둘러서가 방어용이 아니라 가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방어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경계적 혹은 소극적 방어라는 것이지요. 소극적 방어로서는 괜찮지만 적극적 방어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 방어가 무엇입니까? 선공이 최대한의 방어다는 말처럼 선공이나 실제로 휘둘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합니다.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족하다.”(enough) 말씀합니다. 즉 소극적 방어로서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도 궁색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아예 십자가 피하셨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주님을 고발하고 만들어낸 죄목을 말할 때, 스스로 아무 말씀이라도 하시면서 충분히 사형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 복음과 능력의 검
1) 그만 됐다. 하지마!
저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무지를 발견합니다. 주님께서 ‘족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 충분하다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숙고하지 못하고, 진지하게 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그만 됐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설명해도,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겁니다.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제자들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달라진 상황과 환경에 대비하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겁니다. 십자가 고난이 찾아올 겁니다. 혹 억울한 상황을 당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 때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믿음 가운데 서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준비되지 않고 깨어있지 않으면, 흔히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붙들었던 하나님나라까지도 버리게 될 겁니다.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줄 알았지, 주님의 마음, 이루시려는 비전, 사명의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모습을 제자들이 보였습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주님의 나라가 임했을 때, 자리다툼이라는, 벌써부터 제자들은 착각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중에 서울남연회 젊은 목회자들의 조찬 모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유력한 목사님이 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코로나19로 빚어지는 각자 교회의 상황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보건당국에게 권하는 대로 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예배를 드리며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의 자녀는 유튜브 2배속 안되냐고 그러더래요.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환경이 어떤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겠죠.
그런데 유력한 목사님의 교회에서는 예배를 강행했다고 합니다. 온라인예배에 참여율이 20%에 불과하대요. 교인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계좌로 보내고 그럴 것 같지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에 대해 사족을 붙입니다. 사회주의적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정책이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을 쓰면 사회주의자다? 이상한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반대한대요. 어리석은 문자주의자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죠.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니까, 무식한 변론을 일삼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가지신 생명성이나 사랑의 영원성에 잇대어 있기보다는 전혀 상관없는 경우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이념과 사상에 더 사로잡혀 있습니다. 세상이 강요하고 부과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서 헌신과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기를 게을리 합니다. 교회에서는 헌신과 봉사를 잘하는데, 실상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거리가 멀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탄이 너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2) 전대와 배낭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는 전대나 배낭이 없어도 몸만 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이름이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고 귀신들도 항복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고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삶을 몸소 살아내야 하는 사명이 남았습니다. 그 때는 전대를 마련하고 배낭을 짊어져야 합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사명을 여전히 감당하기 위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복음과 능력의 검
이기심, 욕심, 미움, 불신, 교만이라는 사탄이 주님을 부인하도록 만들 때, 내게 있는 것을 이웃과 나누고 누군가 설 땅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고 예수님의 생명과 여전히 연결되도록 하는 일에, 우리의 전대와 배낭을 사용하라는 말씀 아닐까요? 사탄이 좌우를 나누게 하고 이간하며 분열하도록 만들 때,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는 힘은 내게 준비된 것으로 이웃을 섬기고 나누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검은 공격용과 방어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림용도 있고, 치료용도 있고, 도구용도 있고 다양합니다. 어쩌면 검은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야할 힘과 능력이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은 그것을 연습하고 키우고 노력해서 준비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겉옷은 그리스어로 “하마티온”입니다. 야고보서 5:2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재물과 대구(對句)가 되는 단어에 쓰이고 있습니다. 자기의 기쁨과 과시와 뽐내는데 사용할 수도 있는 세상적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것을 팔아 검을 사라는 것은, 바울을 통한 성경말씀이 기억나게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피하라.” 세상적인 정욕과 자랑을 소비하는데 자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힘을 쓰도록 준비하고 예비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 말미에 이런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초대교회의 믿음의 사람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뒤에 어땠습니까? 예수 없이 의기소침할 수 있던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자신의 가진 소유와 물질로, 이웃들을 섬기고 공동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아 말씀이 흥왕해갔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능력을 지닌 이들이 되십시오. 자기 것으로 섬기고 나눔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