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9일 마지막주 사순절 다섯째주

 

 

아름다운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사순절 5번째 주일에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예배하는 자리에 서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하여 세계가 신음하는 때에, 만민에게 영을 부어주시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이 자리에 섰으니, 주의 품에 거하게 하시고, 우울한 세상에 번지는 영적 어둠을 고치고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 예배로부터 승리의 능력과 지혜를 얻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게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

 

 

3월의 마지막 주,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에, 지금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모든 교우들께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막바로 말씀으로 들어가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 마을이 완강했다.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흔히 예수님을 몰라보고 믿음 없는 행동을 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지나서, 가다가, 마찰을 빚기도 했고, 어느 마을에서는 집단살상이라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들이 막아서자 야고보와 요한도 화가 났다. 지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이런 꼴을 당하면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적개심이 들고, 그것이 앙심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야고보 요한은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말했다.

주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시는가? 꾸짖으셨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

 

56절에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이 ‘다른 마을’이 사마리아의 다른 지역을 말하는 지, 아니면 사마리아 바깥지역을 말하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지역을 예외로 두지 않으셨다는 생각이다.

이야기가 단순히 예수님을 받아들지 않은 사마리아에 대한 이야기에 그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마을에 찾아온 복음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있다. 하기는 주님께서 “인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말씀하셨는데, 고향에서 “사람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고”(마13),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마가6)고 복음서가 증거하고 있다. 이것처럼 사마리아는 복된 기회를 놓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 마을이 앞으로 어떤 장래를 맞게 될 지예견해 보라.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비전과 소망이 생기기를 바란다.

 

첫 번째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과 이유와 핑계를 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두 번째는 70인의 파송이야기와 그 보고에 대한 이야기 나오고

세 번째는 율법사와 주님과의 대화가 나온다.

 

1) 첫 번째의 모습은 어떤가?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한다. 그런데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씀하신다. 주님의 사역에 대한 달콤한 약속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게 하신 것이다. 신천지에서는 “144,000”에 들어야 제사장의 직위를 누릴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 했다고 한다. 주님께서도 달콤한 말씀을 하셔야 하는데, 하신 말씀을 들으면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의와 다짐도 식을 것 같다.

또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부르신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저런 이유를 댄다. 핑계 같아 보이기도 하다. 주님은 그의 속마음에 따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아셨는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말씀하신다.

 

이렇게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고 복음의 일꾼들을 찾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사명자들을 찾는데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주님은 10장 2절에서 뭐라 말씀하셨는가? 분명히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사명자들을 찾는데 실패했다면, 정작 주님은 경험해보지도 못한 공허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신앙은 안 될 것 같아 보이고 안 되는 것 같아보여도 되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새 역사가 일어난다. 모집의 결과는 어땠을까?

 

2) 곧 바로 이어서 70인의 파송이야기가 나온다. 방금 전까지의 이야기만 보자면 주님을 따를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 것만 같았다. 10장 1절을 보자.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70명을 파송하셨다. 그것도 “따로 70명”을 세워서 말이다. 주님을 따르는 숫자가 더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세웠다는 말은 “아나데이크뉘미”(ἀναδείκνυμι)인데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을 내세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무나 그렇게 하는가? 체험과 확신을 바탕으로 훈련된 사람이나 능히 감당할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즉 주님은 몸소 경험하셨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 애쓸 일꾼들 찾고 부르실 때, 누가복음9:57-62에서 하시는 말씀으로만 봐서는 아무도 주님을 따르는 이가 없었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합당한 이들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70명의 파송자들에게도 체험에서 우러나와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용기를 내어 전도하고 복음을 증거하다보면 뿌린 씨앗에 비해 결과가 초라하고 미미할 것 같지만 어느새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는 놀라운 섭리를 보게 될 것이다.

 

70인의 파송자들이 마을 곳곳을 다니면서 행했던 일을 상상해보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우리가 험악한 세상을 살고 있다. n번방 사건만 봐도,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한 번에 보여주는 것이다. ‘길거리캐스팅을 한다.’라는 작자들 중에는 미성년자들의 영혼을 악마처럼 집어삼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주님이 지나가시려던 사마리아 마을에서는 편견, 혐오, 차별, 적대심이 갈라놓은 깊은 상처의 골이 있었다. 사마리아에는 그리심산이라는 성전이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만으로도 ‘그리심산에 성전’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자존심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향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다만 선입견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 깊게 패인 상처의 결과다.

 

70인이 승리에 찬 기쁨으로 돌아와 보고한다.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 70인의 파송자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을 때, 능력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8) 치유와 회복, 마을마다 경험한 한 가지 사건들이었다. 오늘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에는, 그 이름을 믿음에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것은, 단순히 이 땅에서 부유함의 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방식의 천국시민사회운동과 같은 일들을 하면서, 서로 신뢰하고 관대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꿈을 다해 노력하는 것 아닌가? 그런 역할을 외면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것 아닌가? 그것은 바로 예수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주님께서 사마리아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하셨을까, 아니면 더 깊은 이해와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상처의 깊은 골들이 조금이나마 메워지고 회복되는 일을 하고 싶으셨을까? 관심에서 지우길 바라셨을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되고 지속되기를 바라셨을까? 사마리아에 이런 마을이 한두 곳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사마리아가 제외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뒷받침 해주는, 연결고리와 같은 표현이 있다. 52절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10:1절 “둘씩 앞서 보내시며” 주님은 사마리아도 포함하고 계셨다는 확신을 해도 좋다. 어떤 상대나 그룹이 말이 안 통하는 대상 같지만 상처의 골이 매워지고 신뢰가 회복되고 나면 통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심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 주님은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로 세상 가운데 여러분을 내세우기를 바라신다.

 

3) 야고보와 요한은 분개한 나머지 이렇게 주님께 말한다.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주님께서 꾸짖으셨다.

 

이 대목은 엘리야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잡으러 군대를 보냈을 때,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해, 그들을 불살랐다는 것이다.

 

무모함이었을까? 아니면 교만이었을까? 누가복음 9장1-6에는 제자들의 파송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면서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병든 자들을 고쳤다. 자신들이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하고 온 친구 목사가 있다. 최근에 ‘내가 왕이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사사기와 관련한 책을 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을 물리쳤다. 그런데 후에 그가 왕이 되려는 욕망을 드러내자 변질됐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의 영이 한 번 임했다고 해서 그가 영원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늘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그 유혹을 이기고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내가 왕이었습니다, 141, 규장)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능력을 행했는데, 자신들의 명성과 자존심을 지키는데 사용하려고 할 때, 얼마든지 변질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경계하셨기에 꾸짖으셨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은혜를 입고 성령충만함을 받았다고 해서 영적으로 교만해지면 안된다.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제자들은 분하고 화가 났다. 그러나 주님은 자비와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온유하고 겸손하시다.

 

70인의 이야기 뒤에 나오는 내용을 보라. 율법사와 이웃에 대한 쟁론을 하실 때, 여리고에서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제사장이 언급되고, 레위가 언급됐다. 예상을 빗겨나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등장한다.

 

제자들이 품고 있던 마음이라면 이 대목에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킬 수 있었을까? 자신들의 진행을 막아섰던 이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이나 자비를 기대할 수 있을까?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감정상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인정 없다.’고 단정 짓거나 정죄하고 싶지만 주님은 그렇게 여기지 않으셨다.

감정적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 고유의 존재의미나 그 속에 있는 선함은 찾을 수 없고 적대관계에 들 수밖에 없다. 온유하고 희망적인 사람은 누군가의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 돋보이게 해준다. 바로 주님이 그러셨다. 저는 정말 주님의 이런 모습을 닮고 싶다. 우리가 이런 사모함을 갖자.

 

그러기에 56절,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이 증거가 외면하거나 제외시켰다는 의미로 들리지 않는다. 앞으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상관하지도 않겠다는 메시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참고 기다려주며 노력하기 위한 기회로 삼았다는 메시지로 들려온다.

그래서 WEB(World English Bible)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for the son of man didn’t come to destroy men’s lives, but to save them. they went to another village”

 

“인자는 그들의 삶을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마을이 어느 곳보다도 복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을까?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을까? 언젠가는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를 믿게 되는 때가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으셨을까? 마찬가지로 주님은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가장 먼저 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기를 바라신다. 문제가 해결되고 상처가 회복되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라신다.

실제로, 누가가 쓴 사도행전 8장을 보면 70인의 파송 받은 자들이 마을을 두루 다녔던 것처럼, 제자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 보고를 듣고 내려갔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오늘 우리가 동시에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혹시나 제자들처럼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목적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복음을 체험하고 주의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혈기가 가득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구원할 일이나 사명을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이 이런 우리를 꾸짖으시지는 않는가?

 

우리 교회 앞에는 포레샤인 아파트단지가 있다. 곧 교회 옆으로는 산책로가 조성되고, 장지천에는 다리가 놓여 이동이 쉬워진다. 그 뒤로는 수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온다. 앞으로 우리가 전도할 때, 혹 비슷한 일을 경험한다면 그때 이 말씀을 떠올리며 오히려 더 기도하고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따르는 이가 적을 것 같았지만, 70인을 따로 세워 파송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부흥의 결실이 있게 하실 줄 믿는다. 다만 우리가 누군가를 복되게 하고 예수 안에서 ‘존재의 의미’가 가져다주는 힘을 회복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사모하자. 예수의 이름이면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삶의 자리 뿐 아니라 이 지역에 치유와 회복과 온전한 은혜가 있기를 바라신다.

 

하나님, 이렇게 드릴 힘과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고백하오니,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뜻에 잇대어 살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옵소서. 우리 교우들 건강을 지켜옵시고, 주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마음껏 쓰임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게 하시고 능력 얻게 하옵소서. 이 와중에도 희망을 잊지 않고 밝게 살 수 있도록 마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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