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2일 주일 온라인영상 예배

 

 

여는 기도

창조주 하나님,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이자, 춘분점을 지나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희망찬 때에, 우리는 너무나 어려운 현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잘못된 삶의 방식과 욕심으로 인함은 아니었는지 두려운 마음을 가지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하며 결단하여, 다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의 궤도에 들기를 원하며 예배하오니, 우리의 각 처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님의 거룩한 뜻에 부합하는 깨달음과 합당한 삶을 결단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의 소망과 영을 부어 주옵소서. 세상의 거짓된 것들을 주인삼았던 삶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공중기도

이스라엘을 보호날개 아래 품으신 하나님, 산수유가 피어오르고,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린 곳도 있습니다만 지금 겪고 있는 세계적인 감염병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사람들 마음에 가시돋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는 이것이 하나님의 채찍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갈등과 정쟁을 일으키는 송곳니를 드러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재빨리 돈벌이의 기회와 수단으로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멈추고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가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마스크를 양보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제자들 보다 먼저 가겠다고 하신 주님을 도와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했던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사순절 기간입니다.

가시돋친 사람이 아니라 꽃망울 틔우기 위해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결단의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극심한 기근 중에 나그네를 맞이한 사르밧 과부의 모습을 비추어보았습니다. 나눔과 섬김과 헌신의 기쁨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사. 오늘의 처한 어려움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슬기를 배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사순절 4번째 주일이자, 밤낮의 길이가 바뀐다고 하는 춘분점을 지나 맞는 주일입니다. 원근각처에 있는 우리 교우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해야 하는 게, 참 낯섭니다.

지금 우리 교우들의 예배환경과 분위기는 어떤지도 궁금합니다.

성전에서 주악에 맞춘 찬송의 소리가 울리고, 서로의 몸과 마음이 빚어내는 소리에

합력이 이루어지고 하나가 되며, 하나님의 임재를 믿으며 예배했는데,

혹여나 사람은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기에, 마음이 삼지사방으로 흩어지지는 않았을까,

염려도 됩니다.

그러나 예배의 중요한 요소는 신령과 진정한 마음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 심령에 하나님을 모시고, 만나고, 나를 맞추는 영적 행위와 순종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진행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예배당에 모여 예배해도 주님의 타작마당만 밟고 되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의 자리를 그 어느 때보다 복되게 하시고,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절망과 희망의 길이가 바뀌고, 불평과 감사의 길이가 바뀌며, 어둠과 밝음의 길이가 바뀌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에서 한 주간 살면서 혹여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이 들었던 영적 게으름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부지런한 마음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 질병 자체에 대한 걱정이, 세계에 확산되는 양상이라 근심을 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에서 열심히 해주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탈리아는 하루 6백 명이 넘는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공포심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몰고 온 경제적인 타격과 걱정 때문에 사실 더한 패닉상태에 빠진 것 같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럴 때, 신앙으로 잘 이겨내고 견뎌내고, 승리하는 사람들이다.

 

엘리사 때 있었던 일이다.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에워쌌다. 그 때문에 사마리아가 아사직전까지 이르렀다.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성전세가 반 세겔이었던 것과 비교);이것은 보통은 맛이 없어 먹지도 않는 것이다. 비둘기 똥으로 불리는 것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 이런 것을 어떻게 먹나 싶을텐데,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기근에 고통을 받다보니까, ‘아들을 삶아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굶주림과 기근을 인한 물질적인 고통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다. 하물며 비둘기 똥일지라도 생존을 위해 뭐든 입에 발라야 하는 잔혹한 현실을 맞고 있었다.

엘리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일이면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이렇게 말하자, 한 장관이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무시하듯 말한다.

 

저는 ‘내일’이라는 말과 ‘한 장관의 말’을 주목해본다. 엘리사는 희망을 주는 말을 했다. 한 장관은 현실을 직시하는 말을 했다. 그의 눈에 엘리사의 말과 약속은 마치 ‘희망고문’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맹목적이고 말도 안되는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당연하다. 우리의 삶과 현실에 비추어 보면 장관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희망고문’ 같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한다. 장밋빛 청사진을 이용해서 착취와 폭압이 있다면 아마도 이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잔인한 현실과 고통 앞에 그것을 버티고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것이 희망이다. 가뜩이나 국민들이 힘들어 하는데 위로와 희망을 주지는 못할망정, ‘희망고문’하지 말라고 원망하고 비난하고, 날을 세우는 사람들을 보면, 바로 이 성경 속 관료의 모습이 떠오른다.

 

광야의 현실이 사마리아와 다른가? 현실적으로 먹을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곳에서 차라리 애굽에서 죽는 것이 나을 뻔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시기도 했다. 하갈이 굶주리고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서럽게 울며 절망할 때, 눈을 여시고 바로 옆에서 우물을 발견하게 하셨다.

오병이어로 5천명이 넘는 수가 먹게 하셨다.

로마의 수탈이 이어지고,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 되가며, 백성층의 몰락과 하강이 이어지는 때에도,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 아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위로하시는 말로 희망을 주시는 말로 사람들을 일깨우셨다. 희망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분명히 도우시고 이겨내게 하실 줄 믿으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채우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으라. 우울해하거나 염려하거나 근심하고 불안해하지 말고, 좋으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란다.

 

사르밧 과부에게 초라한 행색의 나그네가 나타났다. 그 낯선 나그네가 물을 청하더니, 아예 먹을 음식(떡)을 달라고 한다. 성경은 물론 하나님께서 정한 일로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기에,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나그네를 통해서 천사가 다녀간다는 생각을 보통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보면 이 누추한 행색의 나그네가 하는 요청은 참 경우 없는 행동과도 같은 것이다.

넉넉한 상황이라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 그 나마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시내가 말라버렸고, 오랜 기근으로 힘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더구나 당시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가장 사회의 취약계층이다. 그러니 얼마나 더 힘들었겠는가? 우리 사회에도 항상 취약계층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가 가진 것은 떡 만드는 재료로 쓰이는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 뿐이었다. 여인은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절망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저것을 마지막으로 하나뿐인 자식과 죽으려고 했다. 엘리야가 그를 위로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부드럽게 권한다.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용하지만 줄지 않는 통이라, 이것은 요술통이 아니다. 신앙의 신비로 이해하고 실천적 상징으로 받아야 한다.

 

  1. 절망이던 것이 살림이 되었다.

바라보면 절망이던 떡 재료와 기름이 누군가를 위한 것이 될 때, 나눔의 기쁨과 동시에 살림이 되었다.

이 여인이 나그네를 돌보며 말하는 모습을 통해서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인은 이런 기쁨과 자세를 아는 사람이다. 무급휴가자들이 늘어나고 그러면서 경기는 안돌고 장사는 어렵고 힘들어진다. 그래서 더 인색하게 되고 아끼게 된다. 이럴수록 기독교인들은 나눔의 기쁨을 알고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분명히 누군가를 살리는 능력이 될 것이다.

 

  1. 넉넉한 자가 돕는 게 아니라 부족한 자가 돕는다.

아합의 상에서 먹는 우상의 제사장들이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크게 어려움을 모르는 실정을 가진 사람들도 항상 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선한 일을 하게 하시지 않는다. 과부는 부족하고 가진 것 없고, 사회의 취약층일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가 오히려 누군가를 돕고 베풀고 나눈다.

오늘 나도 힘들고 어렵고 걱정이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나의 손길을 통해서 누군가를 돕는 도구로 살리는 도구 사용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고 결단하며 실천하라.

 

  1.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다시 시작되는 것, 그것이 바로 나눔과 섬김 그리고 헌신의 신비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보라.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주님께 드려 5천 명이 먹고 남았다.

우리가 이 교회로 이전해올 때, 지출할 곳이 많고 돈 들어 갈 일도 많았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심지어 구두수선공과 유리문 사건도 있었다. 외면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우니 말이다. 그런데도 외면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고, 감당해야할 것은 감당하면서 헌신과 나눔과 섬김이 있었다. 신기한 것은 꼭 그날 주님의 채우심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에 있는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사재기로 인해 마트가 텅텅비었다고 한다. 생필품을 사기가 어렵다고 한다. 한국에는 마스크의 어려움만 있었을 뿐, 그런 것 보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스크도 어떤 이들은 일부러 양보하기도 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몰래 이웃에게 주고 가기도했다. 그래서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불안과 욕심이 오히려 모두를 궁핍하고 어렵게 만들지만 배려와 나눔이 모두를 편안하게 만드는 대조되는 사례다.

여러분 이럴 때 일수록,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어려울수록 희망을 갖고 신앙 안에서 나눔과 섬김과 헌신을 실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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