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8일 사순절 제 2주

 

 

1. 성숙을 위한 자기반성

사순절 둘째 주에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를 주의 이름으로 환영한다. 규모가 큰 교회들은 인터넷으로 가정예배를 드릴 때, 우리들은 이렇게 모였다. 예배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단하고 반응하는 것만이 아니다. 형제자매들 간의 친교와 만남을 통해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다. 중요한 덕목은 관심과 배려와 관용 그리고 사랑이다. 이것을 제한해야만 하는 이 때, 이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오늘은 서로 ‘거리두기’라는 배려 속에서도 그 범사가 잘되고 영혼이 강건하기를 사랑으로 빌자.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수모를 당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한다. 코로나19를 의심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얼마나 부당한가? 인간은 놀랄만한 과학적 문명을 발전시킨 위대하고도 합리적인 존재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허술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어땠나 생각해봐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하지 않으면 성숙된 존재로 나아갈 수 없다. 제 3세계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 혹은 우월의식, 혐오와 선입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혹은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속에 이런 죄성이 자리하고 있다. 혐오와 차별은 낯선 타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불안감으로 생긴다. 참종교는 이러한 근거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맹신과 광적인 모습이 아니라 차분한 이성과 신앙적 합리성을 겸비하고 헌신적인 사랑과 절대자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말이다.

WHO에서 이번 바이러스를 ‘코비드-코로나19’(COVID-Corona19)로 부르기로 했는데, 우한폐렴이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가장 지지하던 사람들이 있다. 대구코로나19라는 말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심정을 무시하고 또다시 상처를 주었다고 엄청난 항의하며 매스컴에서 시끄러웠다. 그리고서도 여전히 우한폐렴이라는 말을 쓴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신천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경계심에서부터 적대감까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완전히 그 뿌리를 뽑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세균은 썩은 부분에 기생해서 번져간다. 기성교단의 곪고 썩은 부분이 있었기에 이단과 사이비들이 기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부분들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회개하고 뉘우쳐야 한다.

 

 

2. 진일보한 믿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여러분의 호감도는 어떤가? 동경(憧憬)할 만한가? 당대 사람들이 갖는 호감도는 어땠을까? 율법적이고 그것으로 까탈스럽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삶의 모든 특혜와 이권과 이익, 필요조건들을 독식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할까? 항상 남을 정죄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길 좋아하며, 다른 사람들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을 동경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비호감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실상은 어땠을지 보자.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마23:7)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마6:1).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마6:5).”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동경하고 부러워하며 소망하고 있기에 이런 행동들이 나오는 것 아닌가? 외식하는 것이다.

 

시대를 객관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데,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무지해 보인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길 바랐던 군중들의 함성은 언제나 세상이 주입한 왜곡된 의식으로 내면을 지배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교우들도 이것을 경계해야한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떡을 챙겨오지 않아 하신 말씀인 줄 알았다. 막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러시니까, 당황했을 것 같다.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이런 구절로 미루어 이런 의문도 든다. 잊은 건가? 재정부족 같은 문제 때문에 못 챙긴 건가?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아’ 책망하신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잘못 알아들을 수도 있고, 음식은 당장 현실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도 있는 건데, 그런 논의를 하고 있느냐고 나무라시듯 말씀하시는 것일까? 주님은 “떡 다섯 개로 5천 명, 떡 일곱 개로 4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상기시키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단순히 못 챙기거나 잊은 것이 아니라, 재정부족의 문제 같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염려와 근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걱정이 믿음을 압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 보다는 인간적인 것들이 가득하게 된다. 주님은 떡의 문제, 현실적인 문제보다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담대하고도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갖추기를 요구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말씀해주셨다.

 

그러니까 오청(誤聽)했다고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늘 현실의 문제에 아등바등 하면서 믿음으로 진일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떤가?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어떤 믿음의 진일보를 원하시는가?

주님께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다시 말씀하시고 나서야, 제자들은 그 누룩이라는 것이 “교훈을 삼가라는 말씀”인줄 깨달았다.

 

 

3. 깨달으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기 위해 12절의 말씀을 주목해보기 바란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덕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가복음에는 이 대목이 없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막8:21)로 매듭짓고 있다.

 

어떤 차이인가? 마태는 제자들이 깨닫고 진일보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마가는 그렇지 않다. 언제 깨닫고 변화하며 진일보할지 아무도 모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삶의 자리에 대한 차이 때문이다. 마가는 지속적으로 교회 내의 불신앙을 지적해왔다. 특히 믿음의 연조가 깊다고 하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제자들의 무지, 오해, 불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공동체에 대한 모순을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공동체는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말씀을 전해도 나아지지 않는 데가 있는가하면, 어떤 공동체는 조금씩 깨닫고 변화되면서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성숙해가는 교회가 있다.

마태가 속한 공동체는 이런 면에서는 마가공동체보다 나았던 것 같다. 평생을 가도 깨닫지도 못하고 결단과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귀한 깨달음으로 결단하고 변화되며 성화라는 은혜를 누리는 사람도 있다. 우리 교회가 이와 같기를 바란다.

 

 

4. 악하고 음란한 세대

그렇다면 왜 주의하라고 하신 것일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전의 장면은 이런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님께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시험하는 것이다. 이 때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말씀하셨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는 것은 악인이 만드는 죄악이나 성적타락의 측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악하다’를 뜻하는 포네로스는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주중에 선거운동 문자를 하나 받았다. 현재 힘든 현실을 위로해주고 시민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듯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내용을 보면, 그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불만을 부추겨서 갈등과 분열과 미움과 적대감을 갖도록 하는 문자였다. 겉으로는 괜찮은 행동을 하는 것 같지만 속셈은 참 못된 경우들이 많다.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의도는 악하기 짝이 없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음란하다’를 뜻하는 모이칼리스는 잘못된 사귐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남자가 길을 가다가 요술램프를 주었다. 그것을 문지르니까, 램프의 요정이 나와 소원을 한 가지만 들어주겠다고 했다. 고민에 빠졌다. 남자는 돈과 여자와 결혼을 모두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돈, 여자, 결혼” 모두 불러서 나오는 걸 같기로 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돈 여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욕심이 과했다.

어떤 사람은 돈과 잘못된 사귐을 갖는다. 어떤 사람은 명예와 잘못된 사귐을 갖는다. 어떤 사람은 권력과 잘못된 사귐을 갖는다. 종교와 권력이 잘못된 만남을 갖고, 권력기관과 재계가 잘못된 밀회를 나눈다. 이런 것들이 진짜 음란한 것들이다. 요즘 신천지 사건을 통해 단순히 사이비의 반사회적인 일탈만이 아니라, 정치와 밀회를 나눈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 참 많다. 아합왕이 바알우상의 선지자들과 짝하니까, 그 땅이 황폐화됐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이 누룩처럼 온 세상에 퍼져있는 것을 보셨다. 아니 오늘 언어로 표현하자면 바이러스처럼 온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것’이 퍼지고 썩도록 만들고 있는 것을 보셨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안식일 법의 본질을 왜곡시켰다. 그들은 치료받은 자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왜 법을 어기는가의 문제로 본질을 바꾸더니 곧 예수님을 불법자로 만들고, 죄인과 세리들과 짝하여 지내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을 바알세불의 힘을 얻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확장시키더니, 주님을 괴수로 단죄하려고 했다.

정결법에 의한 인간혐오, 의에 의한 정죄와 분열 그리고 갈등, 율법에 의한 인간소외와 모독 등등.

 

우리 시대는 어떤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오늘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5. 아름다운 호명행위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삼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엊그제 5일은 봄비소리에 개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었는데, 지금이야 말로 깨어날 때고 깨달을 때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다.

 

대구에서 시장이 신천지에게 쩔쩔 매는 듯한 모습 때문에 화가 나고, 한마음 아파트 코호트 격리도 감추고 있다가 언론에서 보도하니까, 뒤늦게 보도한 것도 참 답답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 아파트에 70%이상이 신천지사람들이라는 소식에 ‘악하고 음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국에서 마스크 공적 판매를 하는데, 돈 되는 것도 아니고 인센티브도 없는데, 업무만 복잡하고 ‘마스크 안팔까’ 생각중이라는 어떤 약사의 인터뷰를 보면서 착잡했다. 이제 막 시행인데, 조금 정착되고 적응되면 나아질텐데,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런 무책임한 인터뷰와 뉴스를 보도하나 하는 마음의 무거움도 있었다. 대안 없는 비판은 가장 못된 거다. 그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다.

마음이 답답하던 차에 이런 기사를 봤다. 포항시 간호사협회장이 직접 쓴 손 편지<사진>에 전직 간호사 15명이 자원했다는 것이다. <내용스캔> 아름다운 호명행위이다. 인간의 정신 가운데에는 헌신과 희생이라는 값진 보물들이 있는데, 그것을 불러냈다.

주님은 오늘 우리 시대에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며, 복음 전하여 영혼을 구원할 이들을 찾고 계신다. 이에 응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표지그림 ) 가브리엘 로와(Gabriel Loire), 20세기, 유리화, 레베,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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