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3일, 주현절 마지막 주

 

코로나 때문에 걱정이다. 정부가 선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처구니없는 데서 일이 터졌다. 이 와중에 이것을 정치적으로 악용, 선전 선동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자고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전 교회적으로 신천지 경계령이 내려졌다. 하도 거짓말을 잘하고, 일반 교회에 숨어들어서 무시무시한 행동강령을 지령하고 있다. 모두 뉴스를 통해서 알 것이다.

저는 요한계시록의 한 장을 읽는 것 같다. 자칭 백마탄 자라고 칭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사칭하며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혼란에 빠트린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8장은 이런 예언의 말씀을 들려준다.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다.”,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스스로 견고한 도성 바벨론성을 쌓아 올렸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기에 우리 역시 영적으로 깨어서 주의 군사들이 되어야 할 때이다. 또한 국민들이 힘을 합쳐 지혜롭게 코로나19 감염성 질병을 신속히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하갈도

오늘은 우리 신앙의 증거를 보는 눈과 예배에 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하나님은 예배라는 확신을 주시고 예배라는 응답을 주신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이야기 중에 하갈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광야에서 물과 음식이 떨어져 곧 죽을 지경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여셔서 바로 옆에서 발견하게 하셨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인생에서 벼랑 끝에 섰다고 할 때, 바로 옆에 하나님의 방법이 준비돼있을지도 모른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부르고 간구하는 자에게 그 눈을 열어주신다.

 

또 하갈의 이야기 중, 사래와 갈등을 빚고, 사래 학대가 괴로워 도망치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아브람의 씨로 임신한 상태였다. 성경 창16:4은 사래의 입장에서 이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 지라.”

그래서 하갈이 처음의 마음과 자세와 자기의 신분과 위치를 망각하고 사래 주인을 넘어서려는 배은망덕한 우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꼼꼼이 읽어야 한다. 하갈의 입장에서는 그 반대다. 창16:4절에 이은 5-6절은 사래의 마음이 변한 것처럼 비춰진다. “주인을 멸시하는 여종이라고 아브람에게 원망하듯 말하고 있다.” 이 제안을 한 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면서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처음과 달리 마음이 달라지고 오해하고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의 선택과 결정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성숙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택정함을 입거나 선택적인 사람에게 임한다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팔자’에 대한 믿음과 다를 바가 없다. 팔자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 타고난다고 믿는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여기는 사람이라서 믿음과 비전과 그 언약을 이루어 주셨으나, 그 특별함이 자신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 것이다.

‘팔자’에 대한 인생관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우물이 동할 때, 운이 좋아 먼저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이 고침을 받는다는 ‘어떤 신앙’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그 근처에서 머물렀던 38년 된 병자처럼 오늘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뿐만 아니라 하갈도 만나주신다. 그 역시 운이 좋아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니라 성경은 전혀 기대할 수도 없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 곁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애굽사람이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왜인가? 애굽출신의 여종은 하나님의 복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은혜의 손길이 미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이스라엘만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 누구와도 만나시고 은혜주시며 언약하신다. 아니 어쩌면 여러분은 아브람이나 사래보다 더 크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주님은 세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칭찬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을 만한 조건에 너무나도 부족하고 한없이 작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주님은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고 특별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믿음도 부족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도 못하고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곤경에 빠진 자신에게 우리에게 그 누군가에게 찾아가신다.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16:11)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하갈에게 어떤 언약을 주셨는가? 창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이 언약이 누구에게 주신 언약과 같은가? 오늘 말씀으로 읽었던 창15;5,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같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과 전혀 격이 다르지 않고 복 주시는 강도(剛度)도 역시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있거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심중이나 무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기대하지 못하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확신 있는 믿음을 갖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6절 말씀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

 

이런 것들을 바랄 수나 있었겠는가? 그럴 형편이었는가? 그런데 6절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기를 바라신다.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이기고 승리하기를 바라신다.

 

 

  1. 확신을 요구하는 아브람

그런데 아브람도 사람인지라, 인간인지라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8절,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참고 견디고 이기고 승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 보이는 증거가 희미해서 염려하고 확신이 약해서 걱정하고, 그러나 고난과 시련과 거센 인생의 풍파 속에 낙심하고 괴로워하고 힘겨워한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확신을 주시는가?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나가 미디안에 맞서 싸우기 전 양털 뭉치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신명기6:16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아마도 인간의 기준에 하나님의 뜻을 제한하지 말라는 말씀일 것이다.

 

아브람에게는 어떤 확신을 보여주시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로 여기실 정도로 아브람이 믿음을 가졌던 비결을 깨달으시라. 9-10을 보면, 하나님께서 암염소, 암양,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들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렇다. 하나님의 언약과 비전과 계획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만나는 가운데 구체화되고 믿어지고 확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우리를 감싸고 있던 인간적인 생각, 불안, 염려, 근심, 걱정을 벗어놓고, 세상에서 묻어 더러워지거나 굳어져서 영적으로 무디어졌던 욕심의 군살들을 제거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진정으로 닿게 된다. 그리고 믿음을 선물로 받아 확신을 얻게 된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물었을 때, 어떤 증거들을 보여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가장 확실한 증거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 심령 안에 인격적으로 찾아오시고, 힘과 용기를 주시며, 은혜와 평강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확실한 응답을 얻는 것이다.

기억하라. 우리가 어떤 상황과 힘겨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 속에 놓였을 때, 자꾸만 증거들과 확증할 만한 것을 찾을 때, 혹 아브람이 하나님께 요구하듯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할 때, 하나님은 예배라는 확신을 주시고 예배라는 응답을 주신다.

 

11절을 보면 솔개가 아브람의 제사를 방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예배를 방해하고,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지금 여러분에게 그런 것은 무엇인가? 예배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셨는가? 의무와 당연함만으로 이 자리에 있을 뿐, 사모함과 간절함을 잃고 있지는 않는가?

예배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동일하게 말하는 게 있다. 오늘날 감동적인 예배, 현대화된 예배, 그래서 은혜롭다고 하는 예배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교인들의 삶은 그대로이고, 교회의 성숙은 점점 세상의 기대와 멀어지고, 예배와 영적인 상태가 오히려 황무하고 건조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공감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목회자가 예배를 통해 만족과 기쁨을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예배를 관람하려고 들뿐 그 속에 전심을 다해 녹아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 미디어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탓만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필요에 의해서 바라기만 하는 저급함이 더 문제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미디어 환경의 연출력을 자랑하고 맹신하기도 한다. 대신에 우리의 영적인 감수성과 감각은 제로가 되었다.

 

당장의 응답과 기쁨과 만족을 좆으려 할뿐, 자신의 예배를 방해하는 솔개를 쫓으며 주님의 응답을 사모함으로 기다림이 어떠한가 이 시간 돌아보자.

 

17절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 아브라함은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고 있는 화로를 보았다.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추론)

 

충분한 시간이 흐르자, 역사가 나타났다.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더라.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이런 체험이 있기를 바란다. 타는 횃불이 지나가는 체험은 어떤 것인가? 성령의 응답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는 순간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물었다. 하나님은 그 확신을 어떤 증거나 증명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 아니라 예배 중에 임하는 은혜에 대한 체험과 확신을 통해서 나타내주신 것이다.

 

  1. 예배 중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을 만나라.

하갈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덧붙여 보자. 하갈은 하나님을 만나고 언약을 응답받고 이런 고백을 한다. 창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의 심령을 살피고 계시다. 로마서8:26-2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나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여러분의 상황과 그 심령을 모르시는가? 여러분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도움이 되며 그 가는 길과 방향을 모르시는가?

 

이 시간 기도하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한 주간의 삶을 떠올리고, 힘에 부쳐 어려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주님 앞에 토로해보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신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언약하셨던 것처럼, 하갈과도 만나주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심령에 찾아오시며, 삶에 개입하시고 응답하길 바라신다.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삶을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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