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5일 사순절 3째주

 

  • 소중함에 대한 분별력

코로나19로 인해 힘겹다. 그리고 세계에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진정국면에 들어간 것 같은데, 아직은 방심할 수 없는 상태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집단 감염이 발생하고 있다. 좀 더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개인위생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이번 달까지는 주일 예배와 새벽예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것을 생략하겠다. 그렇다고 신앙적으로 나태해지지 말고, 깨어있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일상의 고마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잊고 살았던 것들을 회복하는 것도 깨어남을 위한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신천지문제는 연일 화두였다. 그 거짓말과 농간에 시민들의 감정도 격해지고, 동시에 피로도도 높아진 것 같다. 신천지를 비호하는 듯한 뉴스 기사, 두둔하고 돕는 듯한 정치인들의 언행, 그 틈을 놓칠새라, 신천지 내부에서는 그걸 역이용해서 ‘성경에 나타난 대로 세상이 자신들을 박해하는 것’이라는 식의 인식으로 내부결속력을 다지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 때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진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열리기를 바란다.

초대교회에도 이단과 사이비들이 교회 안에 몰래 침투해서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하고 분열을 만들고 그 틈에 기생하면서 세력을 넓혀나가고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어지럽게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아는 것과 복음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은 그것을 극복하게 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1. 이단

이단(異端)은 텍스트는 같지만 해석이 다른 것이다. 사이비(似而非)는 비슷한 것 같으나 아닌 것이다.

1900년대 초반에 김성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7세에 부잣집에 시집가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정신질환을 앓다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정신질환이 어느 정도 호전됐다. 그러다가 자기가 입신하여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고 하면서 이단이 됐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망상을 가진 자의 말에 사람들이 빠진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도 보면 귀신들린 여자의 예언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고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배후에서는 그것으로 돈벌이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와가 뱀과 동침’한 것에서 죄가 시작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인간의 원죄를 음란으로 보았다. 그래서 모든 성적인 결합을 죄로 여겼다.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자신이 그 사역을 완성하는 재림주라고 했다. 이 이단을 새주파라고 불리는데, 그 남편이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네 어머니가 새로운 주님이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오늘의 이단들은 대부분 다 뻗어 나왔다. 구원파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수입 이단을 제외하면 말이다.

왜 교리가 잘 못 됐는가? 성경에 뱀과 하와가 동침했다는 내용도 없을뿐더러,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뱀이 간교했다는 말과 하와를 꾀어내는 과정을 그런 식으로 자의적으로 멋대로 억측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간의 원죄는 불순종이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이 죄의 모습이다. 아가서는 ‘성’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름다운 성은 인간의 행복과 세상을 윤택하게 만드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섭리이다.

 

이단은 합리적인 판단만 하게 되면 쉽게 분간할 수 있다. 특히나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를 주어 마음을 도둑질 하려는 사람을 주의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디모데후서는 말씀하고 있다. 죄에 대해 생각나게 되더라도 오히려 예수 복음으로 인하여 자유함을 얻게 되고, 인생의 고난과 재앙 앞에 두려운 마음이 들더라도 오히려 예수 십자가로 인하여, 사명감과 소명감을 갖게 된다.

 

  1. 사이비

그런데 사이비는 거기에 빠질 위험이 더 크다. 왜냐하면 유사하기 때문이다. 신천지는 위장교회, 위장시설을 굉장히 많이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신천지인들이 스스로 신천지인임을 속이고 부인한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박해시대에 교인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결속됐다.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해내려고 할 때, 트라얀과 플라니가 서신을 교환한다.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숨기고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발본색원할 수 있는가에 대해, 플라니가 물었다. 트라얀 대답은 이것이다. ‘그들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임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천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사이비가 그래서 유사한 것 같지만 다른 것이다.

 

마태복음10:32-33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참기독교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때로는 피해를 보거나 손해를 보거나 박해를 당해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24:4-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마7:15)

 

요한일서2:18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한일서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베드로후서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1. 예후의 이단척결

예후의 바알척결을 위해,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을 한 곳에 모이게 한다. 바알 신전이었다. 아합이 섬겼던 것보다 더 열심으로 섬기기 위해서라고 했다. 바알신전은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신전과 제단을 만들었다. 바알을 섬기는 현상이 창궐하나, 그 중요간부격에 해당하는 제사장들이 숨어들 수 있기 때문에 내린 ‘행정명령’ 같은 조치였다. 엘리야도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를 한 곳에 모이게 하고,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며 모두 제거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창궐한 것을 보면, 쉽게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후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준비된 예복을 차려 입게 했다. 구분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제거했다. 열왕기하10장은 바알 신당을 헐어 변소를 만들었다고 증거한다. 이세벨의 최후는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되었다고 전 장 9장에서 증거하고 있다. 거름을 뜻하는 단어인 도멘(domen)은 똥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사건의 전말을 신명기 사가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벨은 변(便)이 되고 바알의 신전은 변소가 됐다. 바알 우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권력과 이득을 누렸던 이의 최후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신명기 사가는 예후에 대해서 긍정평가와 부정평가를 내놓는다. 긍정평가는 무엇인가? 28절과 30절을 보라. 바알을 멸하고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아합의 시대가 막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부정평가는 무엇인가? 31절에서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그것은 29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 금송아지라는 사이비

금송아지는 어찌 보면 하나님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욕망과 어울러 진 사이비(似而非) 신앙과 같다. 잘 아는 대로, 출애굽 백성이 광야에서 아론과 함께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사이비인가?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인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정교하게 깎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분이시요, 시각화되거나 어떤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고단한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동행하시며, 피할 길과 살길을 내시고, 보호하시는 손길이 마치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살아 역사하시는 은혜로만 설명할 수 있고, 고백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눈으로 봄으로 확인되거나 체험되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경험하며 체험되는 분이시다.

 

사이비 신앙의 문제를 좀 더 생각해보자. 출애굽기에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예물을 들고 나오는 장면이 두 곳이다. 금송아지를 만들 때, 모든 백성이 귀에서 금 고리를 빼내어 가져왔다. 그것을 녹여 부은 다음 깎아 만들었다. 그리고 성막을 지을 때, 백성들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예물들은 무엇이라도 드렸다. 어느 모습이 사이비인가? 둘 다 신앙심인 것 같지만 전자는 자기를 위한 신앙이요, 후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다. 전자는 자기가 중요하지만 후자는 하나님이 중요하다. 전자는 이기적이고 불평하고 불만에서 비롯되지만 후자는 이타적이고 배려하고 돌보고 아끼려는 데서 비롯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했고, 말씀과 명령을 들으며 순종하는 길을 원했기에 성소가 필요로 했다. 참 신앙과 사이비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사이비는 하나로만 국한된다. 하지만 참신앙의 역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오늘 우리가 번영의 신앙 속에서 물질적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낸 헌금들이 대형교회라는 건축우상을 만들고 하나의 권력과 힘이 되고 있다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겸허하게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1. 사이비와 이단을 극복했다면

오늘 건강한 신앙과 참 믿음 사이에서 이단과 사이비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 속에 오늘 우리가 결단할 점은 무엇인가? 우리와 상관없는 일 같아 보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주인 삼았던 우상들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우리교회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수24:15)

 

가나안 땅에 살면서 자기들도 모르게 섬기고 익숙해졌던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고 결단했던 여호수아의 고백이다. 세상이 강요한 가치관이나 익숙하게 했던 물질과 황금의 우상을 주인 삼지는 않았는가? 그것 때문에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질 줄 알았는데, 황폐화되고 궁핍해지지는 않았는가?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주인 삼기를 바라신다.

 

찬양과 기도 )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사랑의 주님, 이 땅과 세계가 질병과 거짓된 것들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를 들여다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고통을 제해달라는 것에만 아우성입니다. 나라와 나라들은 서로의 문을 걸어 닫고, 혹은 누군가가 나에게 나쁜 것을 전염시키는 않을까, 의심의 눈초리로 타자를 경계하는 데만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백부장의 신앙의 눈조차 뜨지 못하고 십자가를 원망하는 군중들과 같을 때도 많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과 그것을 빌미로 우상을 삼았던 것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구하기 어려운 마스크를 샀다고 인증샷을 올리며 자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은총의 결과라고 황금송아지로 둔갑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노인과 체약자를 위해 배려하는 길을 택하게 하옵소서.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차가워지거나 배타적이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