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덤을 돌문으로 막았으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진주 방화 살인사건의 사망자는 모두 노약자였고 거기에는 10대 청소년과 초등학생도 있었다. 부활절 아침을 맞은 우리의 현실이자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땅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기에는, 울음을 멈출 수 없는 이들이 있기에, 진심으로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고자 하는 마음이 막힌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누구는 징하게 해쳐 먹는다고 말했고, 징글징글하다고 말했다. 영원히 치유할 수 없을 지도 모를 아픔을 가진 이에게 던진 말치고는 타락한 언어에 가깝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교회와 성도들이 이런 말들에 동조하고 있다면 어찌 감히 부활절 아침을 마음 편히 맞을 수 있을까? 그런데 한국교회의 모습 안에는 이러한 부류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부활절 아침, 예수 부활했으니 모든 것을 잊고 상처와 아픔을 끝내자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게 될 할까봐, 더욱 부활절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저의 마음은 무겁다. 교회가 그래왔다. 아픔을 충분히 감싸 안고 보듬기도 전에, 교회 부흥과 성장과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저해가 된다고, 물론 그 명분을 겉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복음이라는 미명하에, 은혜가 안된다고 아픔과 슬픔들을 너무나 빨리 묻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부조리가 너무나 커 보인다. 4.3제주, 518광주,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등등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너무 빨리 묻혔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정준영 단톡방 사건에서 보여주는 것은 돈과 권력으로 얼마든지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고 영원히 지울 수도 있다는 오만한 마음을 가지고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통하지 않게 됐다. 세상을 농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에 분노한다. 사건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인간이 이렇게 괴물 같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빨리 잊고 덮어버리고 넘어가자는 속물 같은 마음 때문에 오히려 악을 숨겨두고 감춰두고 두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예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동굴에 가두고 부활하지 않기를 실상은 바라지 않았던가!

 

예수님 당시에도 사건을 빨리 덮고 그 자체를 밀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활의 소식마저 왜곡하는 시도도 있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무덤에 경비병을 둘 것을 요청했다.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마27:66)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마28:12-13)

 

아무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게 만든 잘못을 서둘러 감추려고 했고 덮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막을 수 없었다. 경비병으로 지킨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부활의 소식을 왜곡하려 했지만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은 결국 드러나는 법이다. ‘경비병이 잘 때에 제자들이 도둑질 하여 갔다’고 증거한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경비병은 졸 수 없다. 교대를 할지언정 경비병이 졸았다는 것은 곧바로 처벌대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변명과 핑계와 그 거짓말이 오히려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1. 고통과 슬픔 위에 피어나는 부활의 꽃

고난주간을 맞아 주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기도를 하면서 시 한 편을 지어봤다. 마침 세월호 5주기 기념행사가 있는 때였다.

울보(父)

 

그 아이들의 죽음에 아직까지

눈물이 나는 것을 보면

그 아이들도 내 애(愛)였구나.

 

내 아이의 이름을

부르다 부르다 넋 놓아도 : 이름의 넋이라도 되어 돌아오기를 바라는

또 이름을 부른다. 고통당하는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았다.

 

예수예수(愛羞噯壽) 부르며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애절함으로 :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모자랐을 사랑에 너무 미안해서

아무것도 아니던 그때 그 일이

너무너무 미안해서 : 일상의 부재에서 느꼈을 슬픔을 생각해보았다.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사진3장)

울었을

아버지처럼.

(사랑애, 바칠수, 탄식 숨애, 목숨수)

 

제자들을 비롯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믿고 따르던 모든 이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절망이었고 고통이었다. 괴로움이었다. 죽음의 슬픔 자체가 그렇다.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절망과 고통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부활을 막으려 했고, 감추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통함 중에 부활하신 주님이 다가오셨다. 주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가슴을, 떡을 떼고 식사를 하는 중에 뜨겁게 하셨다. 제자들이 고기를 잡던 자리는 주님과 함께 보냈던 소박한 일상의 자리였다. 주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빈 그물을 걷어 올리던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 그리고는 허탕 치던 아쉬운 마음을 풍성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신 부활의 주님께서 조반을 차려놓고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요한복음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아는 고로 아무도 감히 누구냐고 묻는 이가 없었다고 증거한다. 그 부재의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던 것이다.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의심하는 제자에게는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신학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없이는 부활 영광도 없다.’는 바울의 메시지에서, 십자가를 우리가 당하는 고난, 슬픔으로 해석하여, 마치 하나님은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도 주신다고 말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 이런 슬픔을 주셨다고 말한다면, 아니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렇게 말한다면 납득이 되겠는가? 위로가 되겠는가?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우리를 고난에 빠뜨리시는 분이시란 말인가? 바울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자기 안에 주님이 사시는 체험을 통해 변화에 눈을 뜨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고난의 자리에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다.’ 히브리서2:18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으시지만 고난을 당하셨지만 부활 영광을 얻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살다보면 고난을 당하고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큰 슬픔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그 자리에서 부활승리의 영광이 꽃피어나길 바라신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공허함과 회의감을 느끼고, 불안과 염려와 괴로움에 가득 차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일어나 초록빛 소망으로 가득차기를 바라신다.

 

오늘 말씀은 고난주간에나 선택할 만한 본문이다. 십자가 곁에서 주님을 지켜보던 어머니와 제자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어머니께, “여자여(μήτηρ, 母體)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직역을 하다보니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의미상으로는 ‘어머니 보소서. 아들입니다.’라는 뜻이다. 제자를 일컬어 아들이라고 했다. 또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하셨다.

위태로워 보이고 불행해 보이는 이 시대, 예수의 부활을 마냥 경축할 수만은 없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부활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 본문을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초대교회에서 부활을 경험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던 사람의 부재의 자리를 어머니 혹은 아들의 이름으로 채워준다는 것, 더 크게는 누군가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활신앙의 원리였다. 그래서 교회는 한 가족과 같아야 하고, 교회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이다.

 

김영오 씨는 유민이 아빠다. 무뢰배들이 그의 단식을 방해하고 괴롭혔다. 기레기들은 그가 더 많은 보상금을 뜯어내기 위해 자녀팔이를 하고 있다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로 질타했다. 정비담 군은 고 정성철 소방경의 아들이다. 세월호 수색 현장을 지원하고 복귀하던 중에 헬기추락으로 사망했다. 원인은 미상이다.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세월호 유족들을 원망하고 증오할만한데, 그렇지 않았다.

정비담 군은 팔뚝에 큰 리본 문신까지 하고 하루도 세월호를 잊지 않고 함께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호 씨에게 다가가 유민이 아빠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다.

유민이 아빠는 이런 심정을 전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하는 딸 유민이를 보내고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들이 생겼습니다. 비담아! 아들이 되어주어서 고맙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의 부탁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부활주일, 우리는 누군가의 빼앗긴 일상 속에 찾아들어가, 따뜻한 아들과 딸, 부모, 형제와 자매가 되어주라는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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