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0일, 주헌절 후 제 5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계속된 겨울 가뭄으로 인해 메마른 대지를 적셔 줄 단비를 기다리는 때에, 은혜의 단비를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사모하는 영혼에 주어지는 놀라우신 은혜가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니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1. 언덕밥

인생에서 진정한 행운은 무엇인가? 정말 소중한 선물은 무엇인가? 어느 분의 전화를 받고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옛날 어느 마을에 시부모랑 이제 막 결혼한 부부가 살았다. 시아버지는 된밥을 좋아하는데, 시어머니는 진밥을 좋아한다. 며느리가 밥을 짓는데, 되면 되다고, 질면 질다고 구박을 받으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를 모르겠다. 며느리의 시집살이가 어땠는지 짐작된다. 흔히 이럴 때, 불평하고 불만을 갖기 쉽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럴수록 삶은 고되고 느껴지고 괴롭게 된다. 며느리는 어떻게 했을까? 좋은 묘수를 생각해냈다.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느 여인 두 명이 찾아와서 한 명의 갓난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했다. 잠자다가 한 아기의 엄마가 아기 위에 누워 압사됐다. 그러자 아이를 바꿔치기했다. 우리야 내막을 알지만, 솔로몬은 어찌 알겠는가? 솔로몬의 판결은 간단했다. 칼로 반으로 나누어 각각에게 주라고 했다. 두 여인의 반응은 누가 진짜 엄마인지 드러나게 했다. 진짜 아기의 엄마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

 

지혜는 어려움을 만나고 큰 난관에 부딪쳤을 때, 해결하는 힘을 주고 헤쳐 나가게 한다. 지혜는 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에게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두려워했다고 증거 한다. 솔로몬을 무섭게 여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있음을 알았다는 말이다.

 

언덕밥을 아는가? 고두밥은 아주 된 밥을 말하는 것이고,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서 한쪽은 질게, 한쪽은 되게 지은 밥이 언덕밥이다. 며느리가 지은 밥이 언덕밥이다. 밥이야기가 나왔으니 몇몇 단어들을 더 배워보자. 드난밥은 드난살이하면서 얻어먹는 밥이다. 기승밥은 논밭에서 김을 맬 때 집에서 가져다가 먹는 밥이다. 감투밥은 그릇 위까지 수북이 담은 밥이고 강다짐은 국이나 물이 없이 먹는 밥, 매나니는 반찬 없이 먹는 밥이다. 생계가 어렵던 때에 삶의 애환과 지혜가 담긴 말들이다. 어려움을 만나도 방법을 강구하고 찾으면 길이 있고, 해결책이 있기 마련이다.

 

 

  1. 하나님의 좋은 선물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무엇인가?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인가?

은과 금이 많다고 행복한 것 아니고, 잘 사는 것 아니다. 세상의 권세와 명예가 있다고 다가 아니다. 내세울 만한 업적과 공로가 많다고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까 구하라, 하셨을 때, 지혜를 구했다. “장수하기를 구하거나 부나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함으로 칭찬을 받았다.

 

욥은 “은은 나는 곳, 금은 제련하는 곳, 철은 흙에서, 동은 돌을 녹여서 얻지만(욥28:1-2), 과연 지혜는 어디서 오며 머무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것”(28:20)이니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난 것이 명철”(28)이라고 말했다.

 

잠언은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 말씀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지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임할 때가 많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교회사는 이 말씀을 지혜처럼 여겨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느끼게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가? 어쩌면 하나님의 지혜가 더해졌을 때 완성의 빛을 띠게 하시려는 섭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른다.

흔히들 ‘하나님의 힘’(Power)을 생각하면서 기사와 능력과 이적을 베푸는 장면들을 고대한다.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신적인 능력이 더해지기를 구하고, 신화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치 신앙의 주인공은 특정한 소수자들에 있는 것처럼 여길 때도 있다. 아니다.

 

야고보서는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1:5) 말씀하셨다.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명철을 선물로 주시기를 축원한다.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에 응답하시고 능력이 되심을 알 수 있다.

 

 

  1.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어느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인생의 궁극적인 물음을 물어왔다.

 

한국사회에 3가지 ‘죽어라…’ 모순이 있다고 한다.

① 죽어라 일해서, 노후준비도 못하고 자녀 사교육비로 다 소비한다.

② 죽어라 세금내서, 안보라는 명분으로 국방비와 특정계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③ 죽어라 장사하고 사업해서, 건물주와 대기업 갑질에 헌신한다.

 

갖가지 사건사고가 많은 험난하고 광야와 같은 인생길 위에서, 고되고 허무한 생각이 들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아무래도 제가 목회자이니까, 상담을 얻으려 했던 모양인데,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이 이런 걸 물으면 난감하다. 제가 무슨 답을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예수가 답이라면 무슨 대답이 필요하겠는가? 예수가 대답이 되지 못하고 그것은 진실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쉽게 답으로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실상 이런 회의감이 몰려 올 때도 있다. 목회자로서 새롭게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역할일 텐데, 그래서 요즘 읽고 있는 책이야기, 성경말씀 등을 나누다가, 기도 중에 기억하겠노라 하고 통화를 마쳤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듣노라면 참 감사와 은혜가 넘친다.

 

주님은 우리가 몇 평의 집과 연봉 얼마 이상의 소득으로 살고, 어느 위치의 사회적 계층에 속해서 살며, 내세울 만한 공로와 업적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증거와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말씀한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찾던 이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말씀하셨다.

 

다만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시고,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가? 어떤 수준이 되어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있는 자리에서 있는 모양 그대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니 말이다. 어느 수준에 올라야 복되고 행복한 사람, 축복 받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복되고 행복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세상이 얼마나 어둡고 캄캄한데, 내가 비추는 빛이 세상을 얼마나 밝힐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 먼 산에서 길을 잃은 사람도 산속 한적한 곳에 불빛이 있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고 빛을 향해 나아간다. 망망대해에 작은 등대 하나에 배가 육지가 가까움을 보고 순항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지혜라는 가장 좋은 선물과 은총을 얻으면서 빛의 역할 소금의 역할 하고자 살아가는 삶, 그 자체로서 보람과 의미가 있다. 요컨대 하나님의 지혜를 더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어떤 선비가 술이 거나해져서 집에 오는데, 사립문 앞에 도깨비가 서 있었다. 자기랑 씨름해서 이겨야 이곳을 통과할 수 있다고 도깨비가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대결에 응했다. 얼마나 고약한지 자기가 힘을 주면, 꼭 그만큼 도깨비도 힘을 주고, 힘을 빼면 도깨비도 힘을 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막상막하였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 도깨비와 씨름하던 생각이 나서 사립문에 가보았다. 싸리비가 부러진 채로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전래동화는 사람들이 얼마나 허깨비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지를 교훈으로 주고 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믿음의 눈을 뜨고 진실되게 살아간다 할 때, 정말 예수님이 우리의 답이 될 수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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