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7일, 주헌절후 제 3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모처럼 상쾌하고 맑은 날, 주님께로 향하는 열정으로 주님을 예배하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은혜가 힘과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3)
- 일어나라 함께 가자
오늘은 주현절 후 3주이다.
예수님 계신 곳에 여러분도 있는가?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이 현존하시는가?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를 통해 일하길 원하신다. 우리가 그 마음을 헤아리고, 믿음으로 우리의 손과 발을 주님을 위해 드린다면, 주님의 현존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주현절은 적극적인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주님은 병든 자에게 찾아가셨다. 몸이 병들면 마음도 병약해지기 쉽다. 주님은 병약해진 사람의 손을 붙잡아주셨다. 주님이 붙잡아 주시니 회복되어 일어났다. 가난한 자들에게 찾아가셨다. 마음이 누추해지거나 사나워지기 쉽다. 하나님께서 가난 속에 숨겨둔 천국의 신비가 드러나게 하셨다. 오병이어의 열매가 그것이다. 외면당하고 핍박당하는 이에게 찾아가셨다. 죄책감에 잠 못 이루는 이들에게 찾아가셨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고공농성을 하거나 사회에서 불온하다고 낙인을 찍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할지 늘 헤아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힐난하고 정죄했다. 율법을 근거로 불온하게 만들려고 했다. 대신에 모세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 주님은 겸손히 섬기는 자리에서 누구보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감싸주셨다.
로마의 방위분담금이 올라감에 따라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 하는 상황에서, 세리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서 자신들에게 돌아올 세비의 떡고물 또한 놓치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다. 몰락한 사람들과 가정들이 도처에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 종교의 책임적 위치에 있던 어떤 이는 ‘공공의 이익’을 내세워 누구 하나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공고한 자신들만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명분을 찾는 이들의, 철저한 후견인 역할을 했다. 거짓뉴스를 만들고 모리배꾼들을 양산해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
세상이 악하고 어두운데, 우리가 예수님 잘 믿는다고 세상이 좋아지거나 나아질까? 자기에게 득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회의적인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마가를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은 이런 생각에 대해 주님을 오해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면 한 자리를 원했던 제자들, 노중에서 서로 누가 높으냐고 서열을 정했던 제자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막아서려고 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가? 십자가상에서 벌거벗겨진 채 매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그 옷을 누가 차지할까 제비뽑았던 무지한 군인들의 모습과 어둡고 매정한 세상에서 자기 이익을 먼저 구하는 이의 모습은 닮아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얼마나 무지하고 비겁하고 연약한지, 즉 죄인인지를 보여주는 증표와 다름없다.
회의감이 들 때면, 공생애의 주님의 모습에 용기를 얻는다.
누군가는 사나운 욕심을 부리고, 개들이 사람의 헌데를 핥을 정도로 생명과 인간의 존엄이 땅에 곤두박질치는 때에,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사람 취급할 때, 주님은 죽은 자를 잔다고 하시며 깨우러 가자 하셨다. 잠자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자느냐 ‘일어나 함께 가자’(마26:46)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장정만 세어도 5천명이 족히 넘을 사람들과 함께 나눠먹자고 하셨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캄캄해도,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바꿀 수 없다고 해도, 작은 촛불하나가 주변을 조금이나마 밝히듯이, 그 역할을 감당해주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어떤 장님이 더듬더듬 길을 가면서, 호롱불을 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그를 어리석다 비웃었다. 장님은 왜 앞도 못 보면서 호롱불을 들고 길을 걸었는가? 장님은 자신을 비웃는 사람에게 말했다. “제가 든 이 호롱불이 어리석어 보여도, 다 저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저와 부딪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우리가 빛 되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 길을 따라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런 것 아닌가? 세상으로부터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말이다.
비슷한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있다. 장님이 호롱불을 들고 걷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쳤다. 장님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든 이 호롱불도 보지 못했소?” 부딪친 사람이 그 호롱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사과했다. “그랬군요. 그래서 호롱에 불이 꺼진 지도 모르고 애써 들고 걸으셨군요. 죄송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예수의 불을 우리 안에 밝혀져서 세상의 빛을 비추는가? 우리 안에 그 불이 꺼진지도 모르고, 기독교인이라는 호롱만 든 채 걷고 있는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신다.
- 다시 켜는 호롱불
고린도 교회는 이랬다. 그리스도의 불이 꺼진지도 모른 채, 걷는 장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은 어떻게 다시 그 불을 밝힐 수 있는 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있다.
어떤 점에서 불꺼진 호롱을 든 장님과 같은가? 알다시피, 계파간의 갈등을 겪었다. 계파 갈등이 별것 아니다. 끼리끼리만 어울리려고 하고,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며 패거리문화를 만들어내는 조악(粗惡)한 마음이다. 죄의 마음이 들고나면 눈이 어두워진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들이 숭상하는 사람이 보였다. 베드로, 바울, 아볼로, 어떤 사람은 예수께 직접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영적인 우월감에 빠져들었다. 성도들 간에 다툼과 갈등으로 세상 법정에 고소고발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자기 의(義)에 눈 먼 대신 신앙인이라는 꺼진 호롱을 든 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었다.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았다. 계파문제, 세상법정소송의 문제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 영적인 우월감이나 교만….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어디서 비롯됐을까, 새로운 힌트를 얻게 됐다.
먹는 문제로 시험에 들어본 적 있는가? 사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도 사람을 굉장히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오는 격’이다. 식탁에서 우리는 받아들여지는 체험을 하기도 하고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체험을 하기도 한다.
고전11:21의 모습을 보니까, 주의 만찬의 시간이 준비돼 있는데 어떤 사람이 먼저 와서 먹어버린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은 먹을 게 없어 굶는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이런 것에 크게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제는 빈궁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조차 굶주림을 경험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장함을 헤아리지 못한 식사. 예수님의 성찬식의 정신을 망각한 식사법이다. 그래서 그보다 앞서 고린도전서10:31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 교인들 칭찬. 혹 매운 음식이나 누군가 그 메뉴를 잘 먹지 못할 음식이 있으면, 최대한 따로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서 준비한다는 점은 칭찬받을만하다. 잘하는 일이다. 귀찮을 수도 있을텐데, 그렇게 준비하는 마음을 정말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묻자. 다툼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가? 남에게 지지 않으려 하고, 남을 비난하고 힐난하면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마음에 주님의 은혜가 있는가? 세상적인 욕심이 있는 곳은 어떠하며, 교만과 자랑과 허영이 있는 곳은 어떠한가?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 기도의 나눔, 겸손함, 온유함, 다정함이 있는 곳들은 어떤가?
식탁은 이것들을 나누는 좋은 자리이다. 때로는 식사를 하며 삶을 나누면서 그의 어려움과 수고한 소식을 듣는다. 공감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에 관한 교회의 구조적인 비유와 얼개로 이해해왔다.
한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는데, 다 똑 같은 게 아니다. 또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또 상호작용을 할 때 건강하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결국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나눔, 기도, 나눔, 겸손, 온유함, 다정함 이런 기쁨들과 즐거움이 오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5절 말씀을 보라.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가지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교회 안에서 이런 기쁨을 먼저 맛보도록 부름 받았다. 이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었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 믿음으로 사랑과 섬김과 나눔의 기쁨과 즐거움을 배운다. 그리고 세상에 나아가서도 이웃들에게 다정한 이웃의 모습으로 작음 불 빛 되어 줄 수 있다. 사랑의 호롱불을 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