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0월, 주현절 후 제 2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뿌연 도시의 미세먼지로 사람들의 눈과 호흡이 고통 받는 때에, 우리의 심령을 메우고 있는 죄와 사망의 미세먼지를 씻어내며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정결과 성결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주님이 부르셨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부르셨다. 구원받을 만한 영혼을 애타게 찾으신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를 속히 부르시고, 애태우며 기다리셨다. 우리 각자에게 응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복되기를 원하시는 지, 깨닫고 믿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세대에 대해 이르는 말씀에서, 장터에서 소년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가슴을 치지 않았음과 같다고 비유하신다.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마저 이렇게 변해버렸다면 얼마나 비정한 세상일까?
현대적으로 예화를 바꿔보자. 인천에서 중학생이 동년배들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옥상에서 투신했다. 지난 주 재판이 있었다. 가해자들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때린 것은 인정하지만(1시간 반 가량), 숨진 학생이 스스로 뛰어내린 것이라고, 즉 ‘폭행과 투신’의 인과관계를 부인했다고 한다. 자기들 때문에 죽은 친구에 대해 조금의 인간적인 마음만 있어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이렇게 만드는가?
아이들이 이런 전략을 짠 것은 아닐 것 같다. 변호사가 알려준 전략일 것이다. 돈으로 해결되고 돈이면 죄도 덮거나 감형할 수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그래서 단언컨대 사람들은 돈과 황금의 우상을 따라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런 세상에 대해, 차라리 소돔과 고모라가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4)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틴 땅은 몇 가지 기치가 있었다. “팍스 로마나”의 기치 아래 세계의 모든 질서와 힘들이 로마로 향한다고 생각했다. “디베랴, 가이사랴”와 같은 로마의 문화를 모방한 신도시 건설. “염장사업”과 같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전환. 실물경제 중심에서 급속도로 변해버린 화폐경제체제,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금융경제 시스템. 사람들은 어디로 마음이 향하고 어떤 기대를 가지고 살았을까? 보통 세상을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보기 보다는 가짜뉴스와 편견과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속성은 사실 사람 안에 내재돼있는 것이다. 삶의 몰락이 찾아왔지만, 엉뚱한데서 이유를 찾거나 약삭빠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도록 유도하고 노렸다.
주님은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피로감이나 상처와 곤고함, 인생의 무게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말씀하신다. 주님 안에서 쉼과 힘을 얻고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그 다음 어떻게 살기를 바라실 지는 여러분이 생각해보라.
크로산이라는 신학자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 근처에 거점을 두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찾아 나오는 대상들을 두고 사역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곤함과 고단함을 감수하고 주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다니셨다.
인자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러 왔다고 하셨는데, 얼마만큼 애타는 심정을 가지고 계셨으면 그러셨겠는가?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도 없다고 하셨다. 살 집, 소유된 집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심령을 구원하고 회복시켜며 그 절박함을 도우시기 위해, 애타게 찾아다니시느라, 살 집, 소유된 집이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다.
-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9:35a)
예수님께서 오늘 어디를 제일 먼저 가실까?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는가? 이 동네 사람들을 몇몇을 만나보니, 어떤 사람들은 헬리오씨티나 위례나 법조단지에만 온통 마음이 가 있다.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셨다고 했으니까, 거기에 안가셨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모이고 있는 황금을 보기 위해 가신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상처와 상실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생과 그러다가 힘에 부치고 어려워서 기진한 무리들을 고치시기 위해 가셨을 것이다. 주님께서 거라사 지역이나 이방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그 땅을 정화하고 고치셨던 것처럼 말이다.
신축 아파트분양을 기다렸다가 자금 마련하느라 고생하고, 부동산 업자 말만 듣고, 큰 결심을 했는데, 집값이 생각처럼 오르지 않거나 떨어져서 마음고생을 하고 대출금 상환에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해서 골병드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해도 온통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듯하다.
우리가 버거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마음을 무겁게 하며 병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집 장만하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하고, 또 출세와 성공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삶을 올인하려는 사람이 많다. 마음의 병을 얻는다. 시기, 질투, 열패감, 스트레스 등등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지 못하고, 아니 하나님을 버린 채, 세상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영혼이 병든다.
주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36) 신기루를 따라 가는 사람들 속에서 목자 없는 인생의 고단함을 보셨다.
주님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가르쳐 주셨고 천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의 복음을 듣고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 기뻐하시며 계획한 섭리를 따라가도록 고치시길 바라신다.
- 추수할 일꾼을 부르자.
앞에서 요한은 거점 중심의 사역이었고, 예수님은 마을 고을 찾아가시는 사역이었다고 했다. 크로산은 주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신 것은 아니지만, 세례요한의 목이 달아나는 것을 보면서, 지도자 한사람 중심의 사역은, 자칫 지도자 한 사람의 제거로 하나님 나라가 좌초될 수 있다는 것을 목도했기에, 주님은 전략을 바꾸셨던 결과를 낳았다고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찾아 들어가 직접 하나님 나라와 평화의 복음을 심고 선포하고 전해야 한다고 말이다.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낙담하고 절망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이 곧 좌초된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사방에서 복음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일어나 부흥기를 맞았다.
37절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주님의 말씀을 주목해보자. 씨를 뿌릴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며 사는 사람들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음을 보셨다. 그리고 구원해야할 대상임을 보여주셨다. 주님은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