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3일, 주헌절 제 1주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새해를 맞는 감격이 벌써 가뭇해지는 때에, 이처럼 양과 같은 저희가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기로 다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부름 앞에 겸손한 자세로 응답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37:9)

 

  • 타락과 암흑의 시대

주현절 후 첫째 주일에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고, 그 사이로 담대한 믿음과 평화가 임하시길 바란다. 주현절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나타났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더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주현절은 예수님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능력과 현존하심을 배우도록 초대하는 절기이다.

그런데 이 시대야 말로, ‘하나님께서 도대체 어디 계시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지난 해, 윤창호, 김용균 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윤창호 씨는 음주운전의 피해를 당해 숨졌다. 그래서 윤창호 법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 가해자들이 사고 직전에 나눈 이야기며, 행동들이 고스란히 블랙박스에 녹화가 되었는데, 돈과 자기가 가진 힘만 믿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물 같은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김용균 씨는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졌다. 하청 시스템의 부조리도 문제였지만 저비용으로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기업의 욕심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보여주었다.

지난주에 또 참 애석한 일이 있었다. 택시기사 한 분이 분신해서 사망했다. 두 번째다. 그의 입장에 처해보지 않아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생계문제를 절실하게 여기는 가장(家長)들은, ‘안타깝다’고들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서울의료원에 근무 중이던 간호사 한 명이 자살을 했다. 그런데 “병원사람들은 조문도 오지 말라.”는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살인무기는 단순히 날카로운 칼과 뾰족한 창뿐만 아니라, 마음을 물들이고 있는 독이다.

몇 가지만 예로 들어서 그렇지 이 밖에도 최근에 드러나고 있는 체육계의 폭행과 추문, 법조계의 불의 등등 너무 많이 곪아있다.

 

이런 암울한 이야기들은 피하고 싶어 하고, 잊으려고 한다. 기억하거나 입에 담는 것을 꺼려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 헤아릴 수 있는가? 주전 8세기 무렵의 타락의 시대를 보는 듯하다. 신구약 중간기의 영적 암흑기를 보는 것 같다.

 

예수님은 주님을 찾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셨다. ‘목자 없는 양같이 여기셨기 때문이다(6:34).

 

수능을 마친 학생들이 강원도에 놀러갔다가 변을 당한 강원도 펜션사건. 이 중에 상태가 좀 괜찮은 몇몇 학생들이 퇴원했다. 병원 측에서 어떤 의도에서인지, 기념촬영을 하자고 했다. 이때는 사망한 친구들의 장례식이 있던 시각이었고, 몇몇은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타락의 시대와 영적 암흑기는 이처럼 분별력을 상실한 모습니다.

 

잊으려하고 외면하려는 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 슬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파괴된 세상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용균 씨는 우리 사회가 안전과 생명에 심각한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경각심을 주었는데, 그런데 보라, 외면하고 잊으려고 하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 산재 사망사고로 3명이 더 숨졌다.

 

목자 없는 양같이 여기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이리가 들끓는 세상이요, 삯꾼이 목자인양 대접받으려는 세상이다. 얼마나 위험해졌는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아무도 위험한 세계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의 삶을 위해주지 않는다. 각기 제 갈 길로 가다가 아비아미 없는 자식처럼 되고 만다. 결국은 황폐해진 세상에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방법만 남아있을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슬퍼하셨다.

 

마태복음23:37-39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예수님의 선언적인 말씀처럼,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같은 처지가 되지는 않을까?

 

이 땅에서 예수님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무엇인지 알기에 ‘예루살렘’을 향해 목 놓아 이르시는 음성이 어떤지 다가온다. 상처와 아픔으로 길을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어둠에 빠진 이들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세상의 탐욕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의 공격에 맞서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을 더 선명히 그리도록 하셨다.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며 쉬셔야 할 만큼 온몸을 불사르셨다. 그런데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셨을까?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역부족이다. 홀로 세상을 이기시기에는 말이다. 제자들을 모으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평화의 씨앗을 울면서라도 심으려고 하셨지만, 세상의 죄와 악에 대해 온 몸을 십자가에 드리는 수밖에 달리 구원의 방법이 없음을 아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다.

  1.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이 처음 하신 일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계신단 말인가?’ 이런 물음이 들려올 때면, 동시에 들려오는 말씀이 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의 눈은 봄으로, 너희의 귀는 들음으로 복되도다.”

 

정말, 우리를 일깨우는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가 죄악에 물들어 영적으로 취해버린 잠에서 깨어나기를 바라신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린다면, 사실 믿음 없는 것이다.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손에 들고 다니거나 장식된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처럼, 사람들이 잊거나 외면하고자 하는 고난의 자리, 고통의 자리, 상처와 아픔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세월호 사건, 김용균 씨나 윤창호 씨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난으로 얼룩진 세계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고난과 죽음의 땅에 부활과 생명이 꽃이 피어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라신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뒤에, 비로소 복음을 전파하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처음으로 하신 일이 있다.

예수님을 단순히 내생에서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대단히 오해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죄악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누구를 보낼꼬 찾으셨다. 이사야는 그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자원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죄악으로 생명파괴와 그 횡포가 만연해있는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기를 바라신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제자를 찾아 부르신 일이었다.

 

해변에서 베드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부르셨다. 이어서 다른 제자들도 부르셨다.

 

그들은 학식이 있거나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었을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현절 후 첫째 주를 맞아, 예수님께서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가? 죽임과 광포가 욕망의 이를 드러내는 때에,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운 영광들이 꽃피어나기를 바라는가?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이유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마술적인 신비를 통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소망하는 중에, 능력과 권세가 임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비일뿐이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어둡고 악취가 나며 암울한 세상이 밝아지고 하나님 나라가 꽃 피어나며 주님의 향기가 퍼지길 바라신다.

 

 

  1. 작지만 큰능력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목회초년병 시절에 하나님께서 일깨워 주신 사건을 지울 수 없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바 있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하자.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리라는 큰 기대를 안고 시작한 목회, 지방 작은 읍내 개척 교회의 현실은 무기력하다 못해 존재 이유까지 회의적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2가지가 큰 힘이 됐다.

 

작은 아버지께서 다녀가시면서 이런 기도를 주셨다. “하나님의 허락없이 세워진 교회는 없는 줄 아오니, 그 사명 감당하게 하소서.”

오렌지 나눔. 하나님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눔이라는 의와 뜻을 거두게 하셨다. 동네 사람들과의 나눔은 낯선 이에 대한 경계를 허물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도왔다.

 

오늘 제목을 공생애의 처음 영광으로 정했다. 생계를 위해 살던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건이 바로 그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에서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오늘 주님께서 부르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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