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30일, 성탄절후 제 1주, 송년주일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뜻깊은 송년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빗장을 잠그고 들어가는 집 주인처럼 한 해가 마무리 지어지는 날에, 한량없는 은혜로 일으켜 주시고 감싸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내년에는 더욱 더 충성하기로 결단하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중심을 기뻐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22:13-14)
- 능력의 시작
어느덧 한해가 지났다. 이제는 한해의 끝과 시작에도 둔감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시간은 연속적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의식하지 않으면 표류하기 십상이다. 부인할 수 없다. 시류는 무엇일까?
양력으로는 오늘이 한해의 마지막 주가 되겠지만, 교회력으로는 성탄절 후 제 1주이다. ‘시작’과 ‘끝’이라는 매듭도 중요하지만 달리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의 생명과 삶을 지속시키고 끌어가는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교회력은 우리에게 이런 물음을 안겨준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여러분 안에 빛이 있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은총 안으로 들어가며, 길과 진리와 생명을 주시고자 했던 능력이 발생하고 있는가? 그 은혜와 능력을 우리의 삶의 원동력으로 삼을 준비가 됐는가?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말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서 일어나 저주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을 때, 제자들은 숨죽여 숨어있던 골방에서 뛰쳐나와 복음을 전했다. 부활의 능력이 제자들 안에 발생했고, 사방에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됐다. 말씀이 흥왕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삶은 변화되기 시작했으며, 어둠이던 세상이 그것을 알게 됐다.
마찬가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맞이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요한복음은 말씀한다. ‘사람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寸鐵殺人과 같은 말이다. 가인과 아벨이 동시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 가인이 스스로 죄를 다스리지 못한 고로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 낯을 피하여 제사했다. 죄의 달콤함을 즐기면서 그것이 드러날 새라,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게 된다.
성탄절 후 첫 週를 맞이한 우리는 이제 다시, 아니 다시 한 번, 주님의 빛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 능력이 발현되며 삶에 나타나기를 기도하고 바라야 한다.
바울은 그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가 약할 때 곧 강함 되시며 부족할 때 충만이 되시고,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일체의 비결을 경험하고 체험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 깨어라
이런 점에서 오늘 주님은 우리가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길 바라신다. 이사야를 통해서 주님은 바벨론 포로기라는 어둠의 터널을 지낸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게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린다 해도, 그러나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요,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난다.”(사60:1-2)고 말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앙생활 열심히, 뜨겁게 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 뜨거운 열정이 내 안에 자리하는 것인가?
SKY캐슬이라는 JTBC 드라마에 나오는 권사님이 있다. 그는 겉으로 보면 덕망 있는 캐릭터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과 인정을 받는 교회권사다. 그런데 그 캐릭터를 보면서 신앙의 진정성을 다시 묻게 된다. 종교성과 상류층이라는 허위의식이 만든 가면의 속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실하고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종으로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말씀이 그것을 가늠하게 해준다.
오늘의 말씀은 말세와 같은 때에,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맥락에서 말씀하고 있다.
성경주해
마태복음 24장에서 재난과 환난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뒤에, 29-31은 인자가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32절은 마치 무화가 나무의 잎새를 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게 되는 것처럼 시대를 분별하여 주님 오실 것을 알라고 말씀하신다.
37-39은 영적으로 잠든 시대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홍수 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다.”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들의 행위가 악하여 어둠을 더 좋아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외치고 경고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어떤가? 아직도 세상의 것이 더 즐겁고 미련이 남는가? 그래서 영적으로 무디어지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순간순간 외면하거나 피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선악과의 맛을 본 아담을 찾으실 때,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이와 같지는 않은가? 세상 가운데 숨어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어차피 안되는 것을…’ 하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주님은 44절에서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도둑처럼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종이 깨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45절-51절에서 말씀하신다.
45-46절과 48-49절은 대조적이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그 집의 권속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주며 살피는 종은 복이 있다. 반면 악한 종은 어떤가? 동료들에게 인색하며, 자기 측근들에게만 관대하다. 그는 엄벌에 처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
여기에서 이상한 점이 있다. 세상적인 경영과 하나님의 경영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세상적인 경영은 주인의 것을 아끼고 인색할 정도로 절약하여 주인의 것을 많이 남기는 사람이 칭찬을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영은 베푸는 데에 인색하지 않고 나누어주고 배려하고 보살펴야 한다.
① 하나님의 마음에 깨어 있어야 한다.
충성된 종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악한 종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다. 그는 아마 주인이 있을 때에는 잘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주인이 없을 때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마치 자기가 주인인양 착각하고 횡포를 부린다. 그리고 주인이 늦게 오기를 바라면서, 직전에만 잘하여, 매사 위기를 모면하려는 사람이다. 어떤 식으로 위기를 모면할까? 주인이 이윤을 바라거나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적당하게 채워서 인정받으려고 한다. 달란트 비유에서 1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의 변명을 통해 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주인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대체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반면에 충성된 종은 주인은 이윤을 바라거나 욕심을 부리는 이가 아니라 인자와 자비가 넘치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 마음도 헤아려서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잘하는 사람이다. 주인을 대행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 이름에 누가 되게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하나님은 고통과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 그 신음 소리를 들으셨다. 불쌍히 여기셨다.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도 깨닫고 우리의 마음이 무정해지기 보다는, 나눔과 배려와 돌봄의 마음을 갖는 데서 깨어있음과 준비됨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② 하나님의 방법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혜 있는 종은 어떤 종일까? 주인의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지혜 있는 종은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고 행동한다. 악한 종은 세상적인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주인의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을 채근하고 괴롭힌다. 인맥을 위해 술친구를 만들고 결국 그 인맥은 세상적인 방법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종인지 명시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님께서 물으셨다. 만약에 그 사람의 외모와 가능성과 되돌아올 결과를 생각하고 나누어준다면 어떨까? 반면에 그의 절박하고 시급한 정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생각하고 나누어 준다면 어떨까?
품꾼을 불러 일을 시키면서 먼저 들어온 사람과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있는데, 셈을 치러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일한 시간이 짧으니, 수당을 깎고 심지어 너무 짧은 노동의 시간을 핑계로 셈하지 않는다면 어떤가? 반면에 나중에 들어온 사람부터 불러서 먼저 들어온 사람까지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나눠준다면 어떤가?
③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어떤 결론을 주는가? 깨어있다는 것은 주님이 언제 오실는지 시간을 체크하고 미리미리 준비하는 차원이 아니다. 언제 오실는지 알 수 없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주인의 방법을 따라 그 마음을 헤아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칭찬을 바라서 하는 것도 아니요,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늘은 어둠 속에 있다가 내일은 빛 속에 있으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늘 참 빛을 사랑하고, 그 빛 속에 거하려는 삶을 사는 인생을 주님께서 칭찬하신다.
혹시 아직 졸고 있거나 자고 있지는 않은가? 깨어나라. 새로운 용기와 힘을 내라. 주님을 사모함을 가지라. 봉사와 섬김의 실천과 사명감이 충만해지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능력의 시작, 그 은총과 평화가, 우리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발생, 발현되기를 주님께서 이 시간 바라신다.
올 한해 수고 많았다. (선물 증정)
새해에는 더욱 예수를 사랑하고 복음을 자랑하며 전도에 박차를 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