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3일, 대림절 제 4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넷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시내 곳곳에 설치된 성탄목과 거리마다 울려퍼지는 캐롤이 성탄절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 안에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 하시리이다.(시86:6-7)

 

 

강릉 펜션 사고, 진학과 세상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기대와 꿈이 컸을 텐데…. 어찌 보면 가장 부러울 나이라서, 그마 만큼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호주에 있는 친구 목사가 TV에 고향 형님의 소식이 나온다고 SNS에 올렸기에 봤더니, 신병교육수료식 참석 후 귀가하던 일가족 중 아버지만 살아남고 모두가 사고사한 소식이었다. 왜 안타까운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어둡고 힘든 세상 속에서 가족의 사랑만큼 큰 힘이 되는 게 없다. 불행한 소식은 바로 우리 주변의 소식이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20대의 꽃다운 젊은이가 죽었다. 자본주의가 타락하면 어떤 속성을 드러내는 지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생명의 가치와 이윤 창출. 욕심스러운 악마가 안전에 대한 불감증을 만들었고, 생명을 집어삼켰다. 여러 가지 사회적인 갈등과 政爭에 우리의 정신이 피곤하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 자체가 우리를 곤비케 해서, 덮어버리거나 외면하며 피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네 번째 절기. 어제는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지였다.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보내야 할 강림절기이건만, 복잡하고 어지러운 현실에 그럴 수 없다. 복된 소식을 기다리라고 말하기조차 조심스럽다. 이제 밤의 길이는 짧아지고 낮의 길이가 길어질 테니 희망을 갖자고 말하기에는 우리 삶의 반복되는 불행과 고통은 끝이 없다. 더 암울해질 것 같다. 세상이 더 나아질까, 회의감을 묻혀 둔 채 산다. 메시야가 와서 우리의 불행과 고통과 슬픔과 이 시대의 어두움을 일시에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칫 절기가 형식적이기 쉽다.

 

이런 현실과 사실적인 삶을 직면한다면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어디로 초대하시는가?

 

1)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저는 오늘 말씀에서 등장하는 이 시몬이라는 사람 때문에 무척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누차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영적으로 지금과 같이 가장 어둡던 시대다. 뿐만 아닐 사회적으로도 로마의 제국질서 치하에서 여러 가지 부조리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을 분별하며 믿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그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며 품고 있었다.

 

25절을 보면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이 주신 내적인 확신이 있었다.

 

오늘 우리가 이 시대만 생각하면 답답함을 감출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만물 대 만물의 투쟁’으로 보고 전투적으로 달려들거나 악행이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세상에 이상적인 현실을 만들어가기 위해 뭔가 대책을 찾고 고심하고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어디로 기우는가? 그런데 그는 어떤 사람에 속했는지 알만하다. 어떤 부분을 통해서 그런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오늘날 ‘구국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단체를 보면 대부분 바람직해보이지 않는다. 폭력적이고 수구와 광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와는 달리, 시므온은 구국의 횃불을 가슴에 품었던 사람이다.

어떤 말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가?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나다나엘도 그런 사람이었다. 마치 구한 말 조선의 어둠에 복음의 빛이 처음 비치기 시작할 때, 구국기도회로 모인 이들이 정말 나라와 사회를 걱정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성전에서 만난 또 다른 인물인 안나라는 여인 역시, 38을 보면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아도 도처에 있었다.

 

‘세상이 다 그러니까’, ‘어차피 안 되니까’, ‘나만 그런다고 소용이 없으니까’ 뭐 이런 말들을 사람들은 품고 사는 것 같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변하고 각박해지고 삭막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세상이 잘 되기를 온몸으로 바라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루터기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 그와 같은 믿음과 신념으로, 때로는 손해를 보고 세상의 거짓에 속아 넘어진다고 해도, 세상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싸매고 회복하는 일에 나서기를 바라신다. 주의 용사들을 부르셨다. 주님의 은혜로 채우고 사랑으로 강해지고 믿음으로 무장하라.

 

의롭고 경건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높은 도덕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엣세네파 사람들 중에는 – 물론 가식적이고 외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훨씬 더 많았지만 – 도덕성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므온을 특별히 의롭고 경건하게 여기시고 성령의 확신을 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의로움은 사람이 의롭다 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움이 의로움이다. 경건은 하나님의 마음을 정성(虔)을 대해 알려고 하고 공경(敬)하는 것을 경건(敬虔)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시므온을 의롭고 경건하게 여기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사모하며, 알려고 노력하며, 품고 있었다. 부모가 그 마음을 잘 아는 자녀를 옳게 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마음, 믿음 없이 식어버린 마음, 메말라버린 마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마음 아파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고치시려는 하나님을 바라며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었다. 고통을 외면한 채 자축하는 소망이 아니라, 고통과 환난과 불행 중에 직면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장 큰 마음은 무엇인가? 바로 세상과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계획과 섭리였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무엇인가? 우리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구원하길 바라심을 깨닫고 믿는 사람이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알고, 구원의 소식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신앙적 감격과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전하기로 결단하라.

2) 시몬에게서 어떤 눈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지를 배운다.

유대인은 모세의 법(출13:2,12)대로 첫 갓난아기는 정결 예식(레위기12:2-4)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은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얼마나 누추했는지 아는가? “산비둘기 한 쌍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고 했다.”는 대목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 중에도 시므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것이다.

 

대부분 메시야의 나심을 어떻게 기대할까? 왕의 가문에서,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군주제 시대의 사고방식에서는 당연하다. 아직도 북한에서는 혈통주의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세습과 체제유지에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스스로가 그것이 권위라고 생각하고 인정하려고 든다.

 

동방방사들은 메시야를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헤롯왕에게 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는가, 경배하러 왔노라.”라고 말했다. 물론 나중에는 별이 인도하는 대로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께 찾아가 경배했지만 말이다.

히스기야 시대의 이사야는 메시야를 예언하면서,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어떤 기대를 했을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혈통과 출생의 신비와 권위를 기대할 것이다. 나다나엘은 빌립이 예수를 선지자로 소개하려고 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무시한 적도 있었다. 인간의 오만과 편견은 그리스도 예수의 나심을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26절을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안고 있는 것을 봤다. 그는 감격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인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너무나 누추해서 그리스도를 기대할 수 없는 가족과 아기에게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단번에 알아보았으니 말이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가 눈 녹듯 사라졌다. 세상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어린 아기 예수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새롭게 꽃피어날 것을 바라보며 위로와 확신을 얻었다.

 

하나님은 신비에 눈 뜨고 오늘 아기 예수의 나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이 시간을 통해서 구원의 새 이정표를 발견하고 다시 힘과 용기를 얻고 일어서길 바라신다.

 

우스개소리 하나하고 말씀을 마치겠다.

 

박쥐는 어떤 캐릭터인가? 자기 신상에 유리한대로 이편에 들었다가 저편에 들었다가 하며 자기 잇속을 차릴 때, ‘박쥐 같은 놈’이라고 말한다.

엄마 쥐랑 아기 쥐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아기 쥐가 밖에 나갔다가 박쥐를 보게 됐다. 아기 쥐가 깜짝 놀라 상기된 얼굴로 엄마 쥐에게 하는 말, “엄마, 나 오늘 천사 봤어.” 이랬다.

 

세상에 바보 같이 속아서는 안 되겠지만, 오늘 우리의 눈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발견하는 믿음의 눈이 준비되길 축원한다.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