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5일, 성령강림절후 마지막 주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엉성해진 길 옆 가로수의 달랑거리는 잎새가 가을이 슬그머니 그 문을 닫으려함을 알려주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희망을 가슴에 품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어루만지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1. 한 주간 살면서 우리의 영혼과 심령은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 의해 오염된다. 상처를 입기도 하고, 안 좋았던 일의 잔상이 남아 뭔가에 얽매이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돈 때문에, 일 때문에, 수많은 이유가 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부르셨다. 이 시간 주님은 우리가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새 힘을 채우길 바라신다.

 

  1. 오늘 주시는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처음 성경을 펴면서, 순간 깜짝 놀랐다. 성경을 이렇게 읽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존재 안에 의외의 어떤 진동을 일으키시기도 한다.

지난주에 오후 예배 때, 우리 교회가 우리 명의의 교회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과 방법에 대해 비전을 나누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과부가 이웃들에게 빈 그릇을 빌렸는데, 조금 빌린 게 아니라 빌릴 수 있는 만큼 빌렸다. 그런데 그 그릇들 마다 기름으로 채워졌다.

 

  1. 오늘의 말씀의 내용을 더 살펴보자. 한 과부가 엘리사를 찾아왔다. 그는 선지자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으면서 많은 빚을 남겼고, 그 빚을 갚느라, 두 아들을 팔아야 할 처지다. 엘리사가 가진 것을 묻자, 그가 가진 것은 기름 한 그릇 밖에는 없다고 한다. 참 애석한 일이다. 뭐라도 있어야, 방법을 생각해볼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과부의 죽은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엇 때문에 많은 빚을 남기고 죽었던 것일까? 1절 중간에 보면, 과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것으로 봐서는 과부의 남편에 대해 그 여인과 엘리야는 서로 잘 알고 있다.

전래돼온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오바댜이다. 오바댜는 누군가? 오므리 왕조 아합 왕의 폭정 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하나 둘씩 제거될 때, 100명을 50명 씩 둘로 나누어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몰래 가져다가 먹이면서, 생존을 도와주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은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열상18:3) 증거하고 있다.

자기의 처지와 형편도 어렵지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내서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목숨 걸고 보호하고 지켰다.

이렇게 보자면,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에 대한 충성과 봉사를 잊지 않으시고, 과부의 빈 그릇을 채우셨던 것처럼, 우리의 가정, 자녀가 복을 받게 된다는 영적인 깨달음과 확신도 가져본다.

 

분명 오바댜의 이런 믿음의 행동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은 신앙생활도 자기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 하는 때다. 자기에게 손해가 찾아오고,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쉽게 교회를 옮겨 다니고, 심지어 교회를 등지기까지 한다. ‘시험에 들었다’고 하고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를 원망하고 교회 공동체를 탓하고 심지어 목회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믿음으로 감당해야할 십자가는 외면한다.

저는 교회의 크기와 규모와 숫자를 자랑하고 유명한 교회, 소문난 교회를 추앙하는 현 시대에 이사야에게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하나님이 오늘 우리시대에 찾으시는 이가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아합왕의 시대는 우상의 시대였다. 바알과 앗세라의 우상에 기대면서 사람들의 신앙과 믿음이 왜곡되고 변질된 시대다. 우상은 신이라는 존재를 사람의 눈에 보이도록 인위적으로 다듬어 만들고 행복만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선전한다. 마치 오늘 우리 시대의 황금만능주의라는 우상과 그것이 주는 편리함에 기대어, 사람의 눈에 보이는 성과만을 추구하며 행복과 바꾸려고 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갚으신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인의 현실적인 문제를 직면해보자. 남편의 채무 때문에 자식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한 과부의 안타까운 사연 속에는 바로 오바댜라는 사람의 헌신과 희생과 섬김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 말씀에서 바로 이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행복만을 가져다주는 우상에 대한 선전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어떤가? 하나님께서 무작정 빈 그릇을 채워주심 같이, 물질과 풍요를 채워주시고 번영하게 하실 것이라는 바알신앙의 잔영만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자본으로 100억을 만들었다고 하는 어느 여성의 강연이 큰 교회를 휩쓸었고, 제가 아는 분도, 저에게 그 유명한 강연, 훌륭한 강연을 모르시냐고 묻더라. 그런 거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은 10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푼돈이지.”

“그러면 천 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1초에 불과하지.”

그러나 이 사람이 하나님께 한 푼만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1초만 기다려라.”

 

 

  1. 헌신과 섬김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여인은 삶의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심각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두려움, 걱정, 염려, 괴로움, 채무에 대한 압박감으로 탄식하는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왔다. 그런데 그가 돌아갈 때는 은혜와 믿음을 얻게 됐고, 문제가 해결됐다.

 

빈 그릇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셨다. 엘리사는 그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고 한다.

 

믿음이 없으면 가진 것 밖에 보지 못한다. 믿음을 갖자니, 빈 그릇이 채워질지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비어있기 때문에 두렵고 걱정한다. 빈 그릇 때문에 불안하고 허전하다. 빈 그릇 때문에 괴롭고 힘들다.

그런데 그 빈 그릇들이 채워졌다. 사실 우리에게는 두려움의 빈 그릇, 걱정이라는 빈 그릇, 염려, 괴로움, 슬픔, 어둠, 미움 등등 온갖 빈 그릇들이 있다.

성 어거스틴은 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선의 결핍. 마치 어둠은 빛의 결핍이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혜의 결핍이 어리석음이요, 믿음과 확신의 결핍 때문에 염려와 근심이 찾아온다. 사랑의 결핍 때문에 시기, 질투, 미움이 생긴다. 이웃들에 대해서 영적으로 빈 그릇과 같은 마음이 생기고 원망과 분노와 나쁜 마음이 찾아오기도 한다.

 

여러분, 이시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채우라. 여러분들의 그 빈 그릇에 하나님의 은혜, 지혜, 사랑, 기쁨, 소망, 믿음 수많은 성령의 기름들이 채워지길 바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부르신 주님께서, 채우지 않으시겠는가?

이사야55장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 야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 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과부의 빈 그릇을 채우신 기적에 대한 말씀과 하나님께서 값없이 돈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채우시겠다고 이사야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일맥상통한다.

 

양선희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집

 

늙은 어머니의 집에는 / 再生이 가득하다./

제 수명을 다한 것이나 / 다 목하고 버려진 것이나 /

어머니가 손을 대면 / 재생을 한다.

 

(중략)

 

어머니는 생기 넘치는 얼굴로 / 기쁘게 재생을 가르치신다. /

나도 진지하게 재생을 공부하고 / 몇 번 재생을 지도해봤지만 /

再生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

再生으로 再生으로 再生으로

생을 매만지는 어머니의 집을 다녀오면

반갑게 내 생은 生生해진다.

 

주님 안에서 충만한 기쁨과 은혜가 넘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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