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8일, 성령강림절후 26주, 추수감사주일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오곡이 자라게 하시고, 따뜻한 햇볕과 은은한 바람으로 백과를 무르익게 하신 사랑의 하나님, 뜻 깊은 추수감사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이슬과 비, 그리고 햇빛을 먹으면서 자란 열매들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감사의 절기에, 한 해 동안 지켜 주신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이 드리는 감사의 찬송과 예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3;3)

 

 

없어도 되요

(마태복음6:24-34)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은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의 추석과 흡사하다. 방점은 감사에 있지만, 많은 감사의 이유 중에서 추수에 대한 이유를 감사로 드리는 날처럼 여겨진다. 이 날 만큼은 풍성하고 여유가 넘치길 바란다. 그런데 보다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광야와 같은 인생의 애환 속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감사.

 

죽을 뻔했는데, 살았다.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 아니 길이 없었는데, 신기한 것은 걸어왔다. 강을 건널 수 없을 거라 여겼는데, 건넜다. 누구의 이야기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이고, 신대륙을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청교도들의 이야기이며, 또한 우리의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추수감사절은 넉넉한 한가위와 같은 명절과는 좀 다르다. 설 땅을 잃었던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기대가 있다. 하나님은 궁핍과 곤고함과 척박한 현실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주신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은 자주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다. “너희가 나그네 되었던 것을 잊지 말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되돌아 보아야할 추수감사절의 의미와 결단은 무엇일까?

 

1. 우리의 모든 것, 생명은 물론이고 일용할 모든 것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

다시 한 번, 광야의 백성을 생각해보라. 농사를 짓지 못해 추수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목마를 때, 물을 주셨고, 굶주릴 때,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다.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광야의 백성을 돌보셨다.

우리는 어떤가? 정약용의 글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외가의 인척이자 제자였던 윤종심에게 보내는 글에서, 가난으로 입에 풀칠할 것에 대해 걱정하는 그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정월 초하룻날 가난한 선비가 앉아서 일 년 먹을 양식을 따져 보면 진실로 아마득하다. 생각으로는 하루도 못 가 굶주림을 면치 못할 것만 같다. 하지만 섣달 그믐날이 되어도 여전히 여덟 식구가 모두 살아남아 한 사람도 축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되짚어 봐도 어찌된 셈인지 알 수가 없다. 너는 이 이치를 능히 알겠느냐? 누에가 껍질을 까고 나오면 뽕잎이 움터 나온다. 갓난아이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한번 울음소리를 내면 어미의 젖이 벌써 주르륵 흘러내린다. 양식을 또 어찌 근심하겠느냐? 네가 비록 가난해도 근심하지 마라. (내가 살아온 날들, 22)

 

예수님 때, 토지를 가졌던 사람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소작인은 날품팔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하고, 그마저 안 되는 사람은 누군가의 종이 되었다. 사람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생계유지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인심도 각박해지고, 사람들은 비전도, 꿈도, 소망도, 삶의 의미와 목적도 잃어갔다.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며 가르쳐 주셨다. 들의 핀 꽃을 보며 가르쳐 주셨다. 신비하지 않은가? 자연의 모든 생물과 존재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다 먹고 살기 마련이다. ‘그러니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일을 잊지 않도록 복음을 전하셨다.

 

이런 점에서 추수감사절의 온전한 신앙고백은 무엇인가? 단순히 먹고 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뿐만 아니라. 인생의 애환 속에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인생의 의미를 되찾으며,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 자녀로서 살기로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후에도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우시고, 허락하시고, 갚으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방법은 신비하다.

아브라함의 집을 나온 하갈을 생각해보라. 먹을 것, 마실 것이 떨어져, 이스마엘과 함께 고사 직전에 있었다. 그때 우물을 발견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다던 ‘만나’의 뜻은 ‘만후’에서 왔다. ‘이게 뭐지?’라는 뜻이다. 아침에 온 들녘에 내린 만나를 거둬보니, 영양분이 풍부한 음식이었다.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엘리야를 섬긴 사르밧 과부를 생각해보라. 비가 내려 기근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재료가 떨어지지 않았다. 한 과부가 부채 때문에 아들을 종으로 넘겨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기름병 하나뿐이었다. 엘리사가 빈 그릇을 빌릴 수 있는 만큼 준비하라고 했다. 그 빈 그릇에 기름이 차고 넘쳐, 생활할 수 있었다. 아람군대에 이스라엘이 포위됐을 때,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세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로 매매 될 때, 엘리사는 고운 밀가루 한 포대에 은 한 세겔, 보리 두 포대에 은 한 세겔로 매매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 문둥병자들이 아람군대 진영에 가보았더니,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철수했었다. 이런 예화는 무수히 많다.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채우시고, 허락하신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할 수도 없고 생각해낼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모르시는가? 어려움을 모르시는가? 하나님은 하갈의 절규에 응답하셨다. 이스라엘의 원망을 무색케 해주셨다. 사르밧 과부의 순종과 충성된 마음을 귀히 쓰셨다. 과부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 가운데 도움이 되셨다. 그 가진 것은 미미하고 작고, 사라질 것이지만, 사라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게 하셨다. 신비들을 경험하라. 깨달으라.

 

그렇다고 요행을 바라거나 게을러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일용할 것들 때문에 걱정하거나 애착을 넘어 집착과 욕심을 부리는 마음을 고쳐, 하나님을 믿고, 그 신비한 방법과 놀라운 섭리를 신뢰하고 힘과 용기를 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이 있음을 믿고 소망을 가지시길 빈다. 하나님이 계신데,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 근심, 걱정 하는가? 주님은 그 걱정을 하느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먼저 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오늘 우리를 초대하셨다.

 

주님이 아무런 경험을 해보지도 않고 하시는 말씀일까? 주님은 40일간 금식하며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다. 물질 앞에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질 수 있는 지, 아신다. 출세와 성공의 기회 앞에 흔들리지 않고 버티기가 얼만 어려운지 아신다. 사람이 명예를 위해서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지도 알고 계시다.

주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을 마을에 파송하시면서 전대나 주머니를 갖지 말라고 하신다. 사사로운 보상과 댓가를 바라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그마 만큼 물질의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복음은 증거됐고, 마을과 고을 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주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됐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신비한 방법, 채우시고 갚으시는 놀라운 섭리를 감사함으로 믿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기를 빈다.

 

 

3.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29절을 보면,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의 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2:25,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보았으랴.” 솔로몬의 부와 명성에 대해서 역대하9:27은 이렇게 압축해서 보여준다.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도 같이 흔하게 하였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솔로몬이 부와 명성과 힘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다 누려봤지만, 전도서는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증거하고 있다. 주님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솔로몬의 번민과 곤고함을 꿰뚫고 계셨다. 세상적인 기쁨, 자랑, 즐거움, 감사란 이런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인생의 애환 속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그 결실을 보는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길 바라신다.

 

 

4. 복잡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 십자가의 삶을 감사히 여기며 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희가 당한 것은 감당할 만한 시험밖에는 없다.”라고 고린도전서는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저보고 이것을 어찌 감당하라고 그러십니까?’ 아무리 극심하게 느끼는 어려움 같아도 지나고 보니, 감당할 수 있었다. 험산준령 같던 인생의 고비도 넘고 보니 별 것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 감당할 만하기에 시험도 주시는 것이다.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다. 또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당할 즈음에 하나님은 또한 피할 길을 내신다고 성경이 증거 한다.

우리의 곤고한 인생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다. 우리에게 감당해야할 시험을 주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시기에 때로는 일꾼으로, 종으로, 군사와 같은 충성스러운 사명자로 부르신다.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라고 고백했다. 그는 솔로몬 정도는 아니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명성과 부를 누렸던 사람이다. 그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의 부르심과 십자가 앞에 사명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기쁨이 찾아왔다. 하나님이 그를 충성되이 여겨 십자가를 감당하는 일에 사용하고 계심을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누구에게 직분은 고생이고, 십자가이다. 현실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사명이고 직분이며 십자가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불퉁거리는 고생일 뿐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다. 그분은 약할 때 강함 되어주셨다. 주님께서는 감당할 힘과 능력을 주신다.

여러분은 솔로몬의 영광을 부러워하는데 그치길 바라는가? 십자가 사명으로 나아가길 바라는가? 이 시간 결단하라.

 

주님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한 마디로 이런 배짱을 가지라. 세상 부러워하지 말고 “그거 없어도 되요. 전 다른 것 있어요.” 자랑할 줄 아는 성도들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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