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1일, 성령강림절후 25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구르는 낙엽을 보며 중심이 없어 흔들리는 삶을 반성하게 되는 계절에, 주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 채워지게 하여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시오,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117;1-2)
- 똑바로 보고 싶어요, 특송
반전이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겠다. 지난주에 궁정교회와 연합예배를 했다. 재밌는 교회 – 교회 이름이 그렇다. – 이재은 목사님이 특송을 했다. 체구가 크고 목둘레가 굵다. 그래서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모창)
가스펠 가수 박종호 씨 정도의 음색을 기대 했으나, 가늘고 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은혜가 됐다. 우선은 빵 터질 뻔했는데, 회중들이 웃음을 참아준 것도 은혜였지만, 열심히 부르는 모습이 은혜가 됐다. 찬양은 우리의 실력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찬양하고, 그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다. 잘 부르지 않아도 진심이 담긴 마음이 중요하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
왜 이 찬양을 선택했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선곡에서부터 은혜가 됐다.
재밌는 교회는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작됐다. 놀이터에 나와 있는 아이들을 모아서, 축구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점차 운동장 교회가 됐다.
젊은 목사에게 때로는 정체성에서부터 사명에 이르기까지 흔들리고 갈등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때도 있었을 테고, 일반적인 교회들과 스스로 비교하면서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곁눈질의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저도 목회 초년병 시절 아이들 중심의 교회를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더 그 애잔한 상황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 하며 외면을 하네요.”
죄인취급은 하지 않더라도, 그의 실력과 영성을 의심하고 무시당하는 순간은 왜 없었겠는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 똑바로 보는 믿음의 눈
여러분, 주님을 똑바로 보겠다는 신앙고백과 다짐이 있기를 바란다. 누구에게나 유혹이 찾아오고 시험이 찾아온다. 고난이 있을 수 있고, 세상에 비추어 믿음이 흔들릴 수 있다. 삶의 고통과 질고가 계속 될 때 ‘주님은 어디 계신가?’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 눈물을 삼키다 믿음이 파선당하기도 한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들이 잘되고,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갑질하는 시대를 만났다. 하나님은 즉각 응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회의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내적인 갈등이 일어났다.
다윗은 원수들의 모략과 책략이 끊이질 않는 현실 속에서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다. 그 부당함 때문에 괴로웠고, 인간적인 마음이 들끓는 때도 있었다.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더 악행으로 보복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그래서 시편73편에서는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고백한 바 있다.
성경은 사람이 보고 듣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는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이익은 보지만, 역사의 배후에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한다. 귀에 듣기 좋은 말과 달콤한 말은 쉽게 듣고 욕망과 이기심의 말은 잘 듣지만 하나님의 뜻과 약속의 말씀은 듣지 못한다. 왜일까? 모두가 믿음으로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박국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정녕 이루어지리라.”(2:4) 악인이 잘되고 죽어서도 잘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 이상일 수 없다. 내일 일을 알 수도 없다. 심지어 죽음을 모면할 수도 없다. 더구나 하나님의 심판은 어떨까?
다윗에게는 보여주신 것은 이것이다. 역사의 배후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교만을 목걸이로, 강포를 옷으로 입은 자들이 입을 하늘에 두고(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말하고), 혀를 이 땅에서 두루 다니게 할 수 있는 것 같지만(세상을 얼마든지 호령할 수 있는 것으로 알지만),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신다는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라고 고백한다. 무슨 말인가? 실족할 뻔하고, 회의감이 들고, 그래서 괴롭고, 믿음이 흔들릴 때, 하나님을 똑바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과 역사까지도 볼 수 있었다.
가나안을 정탐한 사람들은 아낙자손을 보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바라봤다. 헤브론을 바라본 이스라엘은 요새지역의 불가능을 봤지만, 갈렙은 그 땅을 취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봤다. 사울의 군대는 골리앗을 바라봤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봤다. 앗수르 군대는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을 첩첩이 둘러싼 자신의 힘과 세력을 과신했지만, 히스기야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미약한 자신의 처지 속에, 강한 군대가 되시는 하나님을 봤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큰 비를 내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표징을 보았다. 엘리사의 사환은 그를 둘러 싼 아람군대를 보고 마음이 녹아내렸지만, 엘리사는 그를 둘러싼 하나님의 군대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인생 속에서, 유혹이 찾아오고, 시련이 찾아오며, 괴롭고 힘든 질고의 시간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은 ‘주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뜨기를 바라신다. 용기를 내고 힘을 내라. 지혜를 구하고 소망을 가지라.
- 똑바로 본다는 것.
우리에게 똑바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알았지만 똑바로 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어떤가? 요즘 교회는 어떤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가?
주님은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시몬이라는 이름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그 반석 위에, 음부의 권세도 흔들지 못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인생에서 답을 찾지 못할 때가 있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나, 누가 나를 구해줄 사람조차 없다. 죽더라도 예수와 함께 죽고 살더라도 예수와 함께 살겠다는 믿음을 가지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걱정하지 말라. 주님께서 여러분의 처지와 형편을 모르시는가?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된 하나님의의 아들이 외면하시겠는가? 십자가를 대신 져주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질책하고 책망하고 벌하시는가?
이 시간 이 메시지만을 여러분께 드리고 싶다.
복음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라.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는 봄으로 복되고, 들음으로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믿음은 구원을 보게 한다.
왜 복음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만 전하려는가? 전부 상황이 다르다. 처지가 다르다. 형편이 다르다. 그 모든 것에 가장 좋은 응답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말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실 정도로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인도하시며, 섭리하시며, 주관하신다.
세상의 여러 것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의심하게 만들고, 흔들려고 할 때, 심지어 극심한 괴로움을 주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게 만들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지라. 허울뿐인 육신 속에 그리스도의 참빛을 심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는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