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8일, 성령감림절후 23주, 종교개혁주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 오늘 뜻 깊은 종교개혁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단풍과 낙엽이 함께 어울려 가을을 노래하는 계절에, 주님의 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불안과 불평 대신 희망과 사랑이 채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 종교개혁주일
오늘은 종교개혁 501주년을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이다.
종교는 시대를 앞서갔을 때, 보배로운 빛을 발했다. 시대에 뒤쳐졌을 때, 시대의 암세포이기도 했다. 고려가 망할 때, 권문세족의 부패도 있었지만, 호국불교가 그것을 촉진시킨 면도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다. 기성 종교인들은 기득권의 자리를 차지하고 백성들의 삶이나 고통과는 무관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가 깨어 있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권력이나 물질에 기생하기 시작할 때, 정말 세상은 위태하다. 종교가 깨어있을 때에는 길을 잃은 시대에 길을 만드는 역할을 했지만, 잠들어 있을 때에는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종교는 광야로 단련될 때, 바라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들을 얻었다. 하지만 광야를 버리고 화려한 성(城)에 안주하며 익숙해질 때, 사변과 궤변에 빠져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됐다.
종교는 깨어서 시대를 앞서가거나 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개혁적이어야 한다거나 진보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가져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진리로 가졌던 초대교회 교인들은, 두려움에 숨어 있던 다락방에서 용기를 내어 뛰쳐나와 예수 복음을 전하며, 복음 실천의 삶을 살았다. 매일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에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성전에 모였으니, 예배에 힘썼고, 떡을 떼며 나눴으니 사랑과 섬김의 삶을 실천했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으니 감사의 삶을 잊지 않았다.
‘개혁’, ‘단결투쟁’, ‘거창한 명분이나 슬로건’, ‘조직력’ 등등의 말들을 사용하거나 거창한 운동을 일으키지 않아도, 예수 진리를 가진 자유함과 깨어있는 삶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넘어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다.
- 종교 타락의 이유
주중에 어느 목사님과 통화를 했다. 어느 식사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단순한 식사모임을 주님 안에서 갖는 것 같지만, 사실은 2년 후에 있을 감독회장 선거를 위한 모임이다. 팀을 꾸리고 조직력을 확장시켜나가려는 의도를 가진 모임이다. 제가 그 모임의 진짜 성격에 대해서 콕 집어 물었다. 어느 줄에 설 것인가에 따라 목회의 성공여부가 갈라지는 현실이니, 판단을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유혹이 될까? 안될까?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의 쓰임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것에 만족하고 싶다.”
정치적 모임에 대한 판단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유혹이 찾아올 때, 사람의 쓰임을 받으려다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 될 수 있는 위험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저를 쓰시고자 할 때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도록 주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그런 소신을 잃지 않도록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하옵소서.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판단의 잣대로 나를 유혹하고 판단하려고 할 때, 십자가만이 유일한 저의 판단이 되게 하옵소서.”
종교가 타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다. 출세와 성공과 번영. 이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자체가 목적이 됐을 때, 위험하다. 출세, 성공, 번영의 우상 앞에 사람의 눈은 어두워졌고, 예수의 진리를 잃어 버렸다.
- 신앙적 무지와 오해
오늘 말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자리를 구하고 있다. ‘우리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다. 주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역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가, 한국교회가 되돌아볼 지점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주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은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다. 41을 보면 이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내고, 다툰다. 제자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는 말이다. 주님의 일과 사역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종교정치 모임에서 줄을 잘 잡아야 한다는 사심 속에는 좋은 자리를 원하는 여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잘 보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보다는, 사람의 영광을 위해 타락하는 것이다. 우리 교인들은 이런 분별력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작은 교회 목사님이고, 저 교회 목사님은 큰 교회 목사님이니까, 영력이 다를 것’이라고 편견을 갖지 말고, 어디를 나가서도 당당하게 우리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자랑할 수 있기를 빈다.
여름 수련회 때 성산교회에서. 그 교회 목사님. 좋은 전통이 있다는 자랑에, 우리교우들이 느낀 자부심
- 섬김의 힘
이들은 주님께 무엇을 구했는가?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기를 바라시는가?
야고보와 요한은 성공하고 출세하고 싶은 욕망을 구했다. 우리 역시 세상에서 그런 기도제목을 가질 수 있다. 승진, 번영, 출세, 성공.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적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교회를 찾아다니고 옮겨다니기도 하며, 액세서리와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
40절을 보면, 주님은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말씀하신다. 이 의미를 두고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주님께서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은 따로 있다. 42-45절 말씀이다. 누구나 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번영하는 것은 아니다. 자리는 정해져 있고 오르려는 사람도 많다. 그 자리는 누구에게 주어지든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그 자리와 지위를 얻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정말 으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빛나는 것도 아니고, 존재가 고상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저급해지는 것도 아니고, 막돼먹은 것도 아니다.
주님은 42절에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은 우리가 이웃을 종처럼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44절에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셨다. ‘사람의 종이 돼라.’는 말과는 다르다. 한 사람의 종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힘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사람 앞에서는 강한 졸장부에 그칠 때가 많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은 약자 앞에서 강자일 수 없고, 강자 앞에서는 약자 일 수 없다.
주님은 우리가 눈에 좋아 보이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존재가치의 옷을 입고 추구하기 보다는 겸손과 섬김과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거룩함을 옷 입기를 원하신다.
종교개혁주일에,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며 기독교든 타종교든 부패의 문제가 개선될까? 초대 교인들은 그 세력이나 숫자나 힘 면에서 모든 것이 미약했다. 그런데 섬겼다. 나누었다. 교회는 부흥했고 성장했다. 복음은 전파되고 퍼져갔다.
섬김을 받으려 하지는 않았는가? 섬김을 결단하라.
나의 섬김을 되돌려 받으려 하지는 않았는가? 그에게 돌려받으려 하다가 나의 섬김의 의미가 퇴색된다. 주님의 은총을 구하라.
주님의 보상과 갚으시는 은총을 자꾸만 자꾸만 받아서, 우리 교회의 지경과 우리 삶의 지경이 확장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