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6일 성령강림절 후 17주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계절에, 마음을 잠근 자물쇠를 풀고 마음껏 주님을 호흡하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이 주시는 새롭게 하심의 물결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의 채취로 물씬 적셔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43:3)
낭떠러지 믿음과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
- 낭떠러지 믿음
신앙심이 좋은 크리스천이 말을 한 마리 구입했다. 그는 말을 훈련시키면서 어떻게 훈련을 하면 기독교인의 말다운 말로 훈련을 시킬까 고민 고민을 하다가 ‘할렐루야!’ 하면 말이 달리고, ‘아멘!’ 하면 말이 멈추도록 훈련을 시켰다. 어느 날 친구가 그 집에 놀러 왔는데 친구에게 말을 자랑했다. “우리말을 내가 훈련을 잘 시켜서 ‘할렐루야!’하면 달리고, ‘아멘!’ 하면 멈추어 선다네.” 놀러온 친구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내가 한번 타 볼 수 있겠는가?” 친구가 말을 탄 후 ‘할렐루야’를 외쳤다. 그러자 말이 힘 있게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놀랍고 신기하게 생각한 친구가 “할렐루야!”를 외치며 초원을 달리는데 그만 친구가 멈출 때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를 잊고 말았다. ‘임마누엘, 예수님,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친구는 알고 있는 신앙의 단어를 다 나열했다. 12제자의 이름을 모두 부르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성경 책이름을 모두 불러 보지만 말은 조금도 멈출 생각을 않고 앞으로만 내달렸다. 큰일 났다. 말은 계속 앞으로 치달리고 저만치 앞에는 낭떠러지였다. 위기일발 계속 가다가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것 같았다. 친구는 이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대로 가면 죽게 됩니다. 말을 멈출 수 있는 단어를 생각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자 낭떠러지를 향해 달리던 말은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탁 멈추어 서며 히히힝 콧바람을 냈다. 말이 멈추자 친구는 너무너무 기쁜 나머지 두 손을 번쩍 들면서 소리쳤다. “할렐루야!”
위태한 인생이 낭떠러지 앞에서 멈추고, 죄로 인해 저주받을 인생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때문에 구원받았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어떤가? 은혜와 응답을 경험한 이후의 삶은 어떤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추격해오는 애굽의 군대와 홍해의 사이에서 건짐을 받았는데, 물을 얻지 못하여 불평했고, 엘림의 단물을 마시고도 광야에서 배고프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요단강의 거센 물살을 마른 땅과 같이 건너고 철옹성 같았던 여리고를 믿음으로 무너뜨린 이스라엘은 사소한 사리사욕 때문에 아이성에서 걸려 넘어졌다. 엘리야는 바알선지자와의 결투에서 절대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세벨의 협박 한 마디에 마음이 녹아 광야로 도망쳤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서도 자신의 교만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의로움만 믿다가 넘어졌다.
이 모습과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어떤가? 낭떠러지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경험하고서도, 그 이후의 삶은 영적 자만이나 태만에 빠지지 여전히 실패와 절망, 심하게 말하자면 구원받지 못한 삶이요, 파멸의 길을 가려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인생문제가 중할 때는 하나님을 절실하게 의지하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잊고, 또다시 인생의 고난이 생길 때 하나님을 찾는 삶을 반복하지는 않는가? 그러다가 믿음의 파선을 당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어찌 보면 훨씬 중요하다. 성령을 소멸치 않게 하는 일, 믿음을 지키고 키워가는 일,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서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일 등등 말이다.
히브리서10:38절,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 말씀하고 있다.
신앙적인 퇴보를 자각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성숙한 신앙인에 이르러야 한다.
-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위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
1) 복음을 믿으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과 인생에서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무속행위를 따라가는 사람도 있고, 미신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유모를 죄와 형벌이 두려워 불안에 떨다가 비관하기도 한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교만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불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감춰보려고 율법주의에 빠졌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스스로 의로움에 취해 남을 정죄하기까지 했다.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라. 그것을 믿는 것이 복음이다. 상선벌악과 인과응보로 이어질 수밖에 없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을 철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이다. 19-20을 보라.
오늘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복음을 확신하는가? 주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신다.
①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다(v.19).
②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을 발견하고 소망이 생긴다(v.20).
예수님을 사모함을 만나라. 21절,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예수님이시다.
22-25을 읽어보자.
①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 죄의 씻음을 경험하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길 사모함을 가지라.
② 인생의 시련과 괴로움이 찾아왔을 때, 23-25절 말씀을 우리가 붙들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위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
2)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가장 성숙한 성도들의 척도는 무엇인가? 흔히 성숙한 성도가 된다는 것에 대해, 인격적, 도덕적, 사회의식적으로 고상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희생과 헌신의 정도가 남다르며, 타인에 대한 태도나 교양을 갖추고 세상에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 남부끄럽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세상사람들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이런 자질과 능력을 상식적 차원에서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신앙인의 성숙이란 기독자의 완전에 이르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전도의 열정이 있는지의 여부로 판가름된다. 자기의 의와 나라와 뜻과 영광과 기쁨이 있지만 주님의 의와 나라와 뜻과 영광과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 성숙이다.
우리가 실제의 경험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은혜를 지속시키는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애쓰는 것이다.
왜 구원받은 뒤에 실패한 신앙인의 삶을 사는가? 자신의 문제만 해결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본성 때문은 아닌가? 하나님께 구할 때는 간절하더니, 일이 해결되면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려다보니까,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젖먹이 신앙에 머물고 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자기 코가 석자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불행과 괴로움에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하는가? 세상사람들은 외면하기 일쑤다. 우리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리 없다. 도와줄 수 있는데 한계가 있다. 그를 구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일에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길 원하신다. 감히 우리가 누군가를 구원하고 특히 영혼을 구원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그 일에 능력과 권세와 은사로 기름 부으셔서 사용하길 원하신다.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는 능력과 권세와 소망이 없지만 예수를 만나, 예수 안에서 발견하고, 그 능력이 내게 부어졌음을 믿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고백했다.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이 있으면, 또한 능력주시는 자에 대한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시간에 성전을 향하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봤다. 그에게 물질을 나눠준다고 삶의 복지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때로는 목회자가 신앙상담을 하며 성도들의 문제를 들을 때가 있다. 해결은 해주고 싶은데 해결할 방법과 능력이 없다. 그런데 강하게 권면하고 싶은 게 있다. 은과 금이라는 세상적인 방법과 인간적인 방법은 제게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과 용기를 얻고 담대히 걸으라.”
이 시간 여러분에게 성숙한 신앙인을 사모함이 심령가운데 뜨겁게 일어나길 빈다.
단순히 내 마음을 평안케 할 만한 은혜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함의 능력을 가진 은혜를 구하자.
1) 우리 교회가 말뿐이 아니라 행함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돌아오는 교회 되게 하소서
2) 우리의 가정과 삶의 자리에서 인간적인 눈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보다는 먼저 믿음의 눈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은혜를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