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9일 성령강림절 후 16주

길고 참으로 무더웠던 여름날을 거두시고 선선한 바람과 함께 아름다운 결실의 계절을 펼치시는 창조주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더 높아진 파란 하늘과 두둥실 떠가는 양떼구름으로 가을이 슬그머니 다가온 때에, 계절을 통해 주시는 평화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진리로 영혼을 채워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라반의 계략을 이겨낸 야곱

1. 여러분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래 있던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작 떠나는 게 좋았을까? 결과적으로야 그렇다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는가? , 이해를 돕기 위해 내막을 살펴보자.

1) 형 에서의 낯을 피해, 삼촌 집 라반에게 왔다. 그를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르자, 서로 불편하게 됐다. 그 불편한 기색을 먼저 드러낸 것은 라반이었다. 야곱이 비록 생질이지만 어떻게 공짜로 일을 시키겠느냐며, 품삯을 정하라는 것이었다. 야곱은 거기서 라헬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얻는다면, 그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초심은 순진한다.)

신부를 얻을 지참금이 필요했을 텐데, 7년의 기간이면 마련할 수 있는 액수였다. 라반도 흡족하게 생각했다. 사랑하는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이것이 났겠다 싶었다. 순진한 야곱, 성경이 증언하기를,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말한다.

2)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심해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중이 처음보다 더 나은 사람도 있다. 성숙해갈 경우에 말이다. 그런데 세월에 욕심이라는 떼가 묻으면 어떻게 될까? 변질되기 십상이다. 라반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싶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며 성숙해갈 수 있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7년이 되자, 라헬을 아내로 주어야 할 때, 라반은 첫째 레아를 아내로 주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라반의 변명은 이랬다.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보내는 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그 지방에서 말이다. 그래서 다시금 7년을 일하기로 약속하면, 7일 후에 라헬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야곱이 이것을 수락하고 7년을 다시 일하기로 한 까닭은 오로지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시간을 견디고 버티고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의 힘 때문이다.

3) 순진했던 초심은 어느새 현실적이 돼간다. 삼촌 집에 아무리 있어봤자, 결국은 삼촌만 좋게 해줄 뿐 자신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게 됐다. 이제 자기도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떻게 독립하느냐는 것이다. 두 아내와 그간에 얻은 자녀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만약에 라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찌할까? 외형적으로 허락하는 것 같지만, 아내들과 이간질 하여, 라헬과 레아가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결국 빈손으로 떠나야 하는가?

우리의 삶에서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고민에 빠져야 하는 때가 있다. 섣불리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더 관계가 악화되거나 사이가 안 좋아지는 경우가 있고, 차라리 말을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도 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4) 야곱은 어느 정도 가족에 대한 힘을 얻고, 심사숙고 끝에 라반에게 말한다. 25-26,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람이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임함으로 어떤 복을 받게 되는지는 여기서 다 말할 필요가 없다. 핵심은 안 되는 것 같아보여도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형통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삭도 그랬고(창26:28), 요셉(창39:3,23)도 그랬다.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깨달았노니”(26b-27)

5) 라반이 제안한다.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여러분, 바로 여기에 처음 질문의 포인트가 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을까? 거절해야 했을까?

라반은 일단은 야곱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야곱의 요구는 고향으로 돌아갈테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지, 품삯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라반은 이런 제안으로 야곱의 요구사항의 變異를 일으켰다.

이런 식이다. 고향에서 가업을 일으키든, 여기서 가업 일으키든 어차피 같은 것 아닌가, 품삯을 정확히 하는 일부터 바로잡으면 될 것 아닌가, 그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협상을 할 때, 이런 요구사항의 변이를 경계해야 한다. 때로는 어떤 미끼를 넙죽 받았다가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야곱의 마음은 이랬을 것이다. 라반이 처자식을 데리고 떠나겠다는 말을 받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염려는 가지고 있는 터에 이런 제안을 하니, 결국에는 차선책으로 받아들였다.

품삯을 이렇게 정하기로 했다. 양과 염소 중에 아롱진 것이나 점이 있는 것을 야곱의 것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보통 양이나 염소는 희거나 검은 색이다. 아롱진 것이나 점 있는 것은 구분하기가 쉽다. 이렇게 하면 소유에 대한 시비를 적게 하고, 그것을 구분해 내기가 쉬웠을 것이다. 나중에 엄연히 야곱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라반이 자기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거나 억지를 부리면 그 위협을 어떻게 당해내겠는가?

라반은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해서 수락한다. 아롱진 것이나 점 있는 것이 나오는 게 얼마나 희박한지 잘 알기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2. 왜 그랬을까? 라반이 그날에 취한 행동 말이다. 35-36절을 보라. 숫염소 중 얼룩무늬와 점 잇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에 검은 것들을 가려서 아들들에게 보냈다. 34절에 야곱의 제안대로 하겠다고 해놓고, 이런 것들을 사흘 길이나 떨어진 아들들에게 보내고, 남은 것들을 야곱에 맡겨, 치게 했다.

1) 라반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다. 야곱과의 약속은 자기에게는 너무나 좋은 계약 조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롱진 것들, 점있는 것들이 유전돼서 그런 품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다른 데 보내서, 교배를 막으면, 실상은 야곱에게 아무 품삯도 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속내를 단적으로 내러냈다.

31:7을 보면 그 후에도 라반은 야곱을 이런 저런 방법으로 구슬리고 속여서 품삯을 10번이나 변경하였다. 그리고 31:29을 보면, 언제든 야곱을 해할 가능성도 있었다.

분명코 야곱은 이런 저런 함정에 빠지고 올무에 걸렸다. 삼촌 라반을 어떻게 이겨내며 손아귀에서 온전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도망치는 방법 외에 무엇이 있을까? 그런 점에서 진즉에 빠져 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야곱에게 그만한 힘과 방법이 있었을까?

2)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의 올무에 빠지고, 함정에 빠질 때가 있다. 눈에 확실한 함정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함정도 있다. 죄라고 하는 영적인 함정도 있다. 용기를 얻지 못하고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때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아예 그럴만한 힘이 없이, 완전 역부족인 경우도 있다. 지금, 동일한 일을 만나면 잘 이겨낼 수 있을 텐데, 그때는 너무나 어려고 경험도 없어서 실패했던 적도 누구나 있는 법이다.

 

3. 경험은 용기를 얻어 지혜를 발휘한다. 하나님은 강자의 횡포를 마냥 용납하지 않으신다.

저는 37-43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있는 손길을 발견한다. 이건 기적도 아니고 이적도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있는 감춰진 손길일 뿐이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불리한 계약을 맺었는가?! 삼촌은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이미 괴물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피할 길을 내시고 약한 자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며 지혜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주님은 그 속에서 기적과 이적을 나타내길 바라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을 보여주신다.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무늬를 냈다. 주석가들은 껍질이 벗겨진 나무들에게서 나오는 액취가 양이나 염소들의 발정을 도왔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민간요법일지도 모르겠지만 야곱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방책이었다. 유전적으로는 우성과 열성이 만나면 우성이 나타나지만, 열성과 열성이 교배될 때에는 순종(純種)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감추어진 손길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검은 것과 검은 것이 만나서도 흰 것이 나올 수 있고, 아롱진 것이 없거나 점이 없는 것이 만나도 그런 것이 나올 수 있다. 유전적 상식이 있는 분들이라면 따져보라. 얼룩한 것, 점이 있고, 아롱진 것들끼리 만났을 때는 그런 종자들만 나온다. 결과적으로 야곱의 양 떼나 염소 떼 등등, 가축은 번성하는데, 다른 것들은 점차 사라진다. 42-43은 이로써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됐으며,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다고 증거한다.

오랫동안 남도 아닌 일가친척 삼촌에게 서러움을 당하고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실패와 상처와 속임수와 불합리한 억지를 바탕으로 더 이상 당하지 않도록 지혜와 꾀가 있는 사람이 됐다. 그렇다면 삼촌의 술수는 사라졌을까? 31:7에, 라반이 야곱을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아롱진 것, 점 있는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얼룩얼룩한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데, 억지를 부려서 라반의 것으로 취했다. 그러면 또 빼앗기는 것이다. 술수는 계속됐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기고 극복하는 야곱의 속사람도 강건해졌다.

31:9은 이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담대하게 하셨다. 지혜도 주셨다. 그의 인생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똑같은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지만, 참고, 견디고, 인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갚으시고 상주시고 큰 도움이 되셨다. 그리고 야곱을 야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난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억울하거나 괴로운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사용하신다.

 

  1. 오늘 인간적인 갈등과 번민에 휩싸여 있는가? 억울하고 가슴 아프고 괴로운 일을 당하는가? 야곱은 참고 견뎌온 세월이 20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장은 안 되는 것 같아 보이고 잃는 것이 많은 것 같아 보이고, 빼앗기는 것이 많아보여서 허무한 생각이 들더라도,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믿음으로 서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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