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일  성령강림절 후 15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9월을 시작하는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폭염과 폭우를 거치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 때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인생의 구름이 걷힌 사이로 주를 바라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3:10)

 

 

  1. 주눅든 이스라엘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주리라’ 약속했던 땅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 복되기를 바라신다. 이스라엘에게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이루어주셨다.

출애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가나안 코밑까지 왔다. 이스라엘이 그곳을 바라보니, 과연 좋은 곳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좋기는 좋으나,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두 사람은 달랐다. 그곳에 사는 아낙자손에 비해 자신들이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지를 드러내는 말이다. 열등감, 자괴감에 빠졌고, 무엇보다 그곳의 거민들을 보자 자존감은 제로에 가까워졌다.

 

이게 현재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돌아보라.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못할 거야.’, ‘나의 능력과 가진 것으로는 어림없어.’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좋은 것, 바라는 것을 그림의 떡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보다 좀 우월해보이거나 나아보이는 사람을 보면서 주눅 들거나 동경하고 있지는 않은가?

 

요즘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사회전반적인 인식이다. 학력, 경제력, 사회적 지위가 모두 대물림 된다. 사회학자들은 압력밥솥처럼 꽉 막힌 시대라고 진단한다. 그 갈등과 불만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1차원적 인간(마르꾸제, 독일과 미국의 사회철학자, 특히 프랑크푸르트의 유명한 사회학자)의 길을 선택하기 쉽다. 비전, 꿈, 소망 등이 현실의 장벽에 좌초되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며 적응해 간다. 그러다보니 자유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현세적인 즐거움과 기쁨에 취하려고 한다. 이것이 1차원적인 인간이다.

여호수아나 갈렙처럼 믿음으로 그 땅을 바라보자는 식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기를 바라실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수고와 노력을 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위해 나는 어떤 결단과 실천을 하고 있는가?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1. 고달팠으나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로 돌아가보자.

 

그 삶을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구절이 있다. 출2:23,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 지라.”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노예생활을 하면서 고달팠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라고 해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출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탄식의 소리를 들으시고 마음을 감찰하시며, 약속을 기억하시고, 돌보셨다는 것이다. 왜? 단순히 안돼보여서, 불쌍해서, 자비로운 마음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가 애굽의 바로왕 앞에 섰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 단번에 말하자, 바로가 취한 조치는 무엇인가? 이 백성이 배가 부르고 여유 있으니까, 이런 요구를 한다며, 감독자들을 불렀다. 벽돌짚이나 재료마저도 저들이 구해다가 만들도록 하라고 했다.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출5:9)

 

다음날 감독자들이 벽돌 만들 짚을 주지 않고 만들라고 하니까,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더 팍팍해진 삶과 노동환경이 모두 모세 때문이라고, 문제의 본질은 놔두고, 그 원망을 모세에게 다 쏟아냈다.

 

부당한 횡포를 부리는 폭압자를 웃게 만드는 말이 있다. ‘마른 오징어에서도 물이 나온다.’ 더 짜낼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또 쥐어짜면 나온다는 말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아무리 폭압의 무게가 중하더라도 사람은 스스로 적응하며, 1차원적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1차원적 인간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한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달팠으나 자유를 갈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셨던 이유가 단순히 안돼보이고 불쌍해 보여서 였을까? 이 일화 뒤에 하나님은 본심을 보여주신다. 모세가 하나님께 읍소하며 원망하는 백성들 때문에 괴로운 마음을 아뢰자, 하나님은 뭐라 대답하시는가?

 

바로왕이 하나님의 강한 손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지라.”(출6:7)

 

고달팠으나 자유와 구원을 갈망하지 않는 백성, 그는 자신의 필요한 것이 충족되고 나면 하나님을 잊는다. 그러나 자유와 구원을 경험한 이는 영원히 하나님을 잊을 수 없다. 자, 결론이 나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가? 하나님의 백성, 자녀 삼으시고, 그 현존하심을 믿으며, 그대로 살기를 바라신다.

 

 

  1. 실천하는 삶

로마서12장2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이 세대를 이렇게 비유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마11:17)고 말이다.

-바울은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일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2:20)이라고 고백했다.

-야고보는 진정한 분별과 깨달음이란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4)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약2:17)”

빌립보교회교인들은 바울의 말을 따라,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하며 신앙을 지켰다. 빌레몬은 용서하기 어려운 오네시모를 용서했고, 바울과 바나바는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다투었지만 진심으로 서로 뉘우치며 화해했다. 베드로는 세상일로 떵떵거리더라도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훨씬 났다고 말한다(벧전3:17).

 

(9월 실천표) – 피리를 불어도 슬피울어도 무심한 것처럼 혹시 아무도 따라 하지 않는 거 아닐까?

 

우리가 세상에 무엇인가? 메뚜기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 1차원적인가? 행동하고 실천하는 신앙인?

분명한 것은 우리의 작은 순종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실천하며 살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랄까?

가나안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이렇게 여겼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여기며 사는 이로 서있는가? 세상사람들도 그렇게 여길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행동하고 실천하는 믿음으로 서 있는가? 세상도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되기를 결단하고,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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