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9일 성령강림절 후 13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맹렬한 폭염과 무더위를 식혀줄 아침저*녁 은은한 바람이 고맙고 감사한 계절에,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우수어린 눈물도, 답답한 가슴도, 어눌한 육신도 주님의 음성으로 위로받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의 자리
여리고에서 제자들과 마을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웅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나가실 때 함께 했던 무리들은 단순한 구경꾼들이 아니다. 여리고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며 은혜를 입었고, 예수님이 좋았던 사람들이다. 언제 또다시 오실지 그 날짜를 기약할 수는 없지만, 다음번에도 길을 지나가시다가 꼭 들려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아쉬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웅했다.
비교1) 거라사지역에서 일어났던 일에 비하면 이 동네사람들은 그래도 인정이 있는 것 같다. 거라사지역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주님은 군대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마을을 정화하셨다. 주님의 대표적인 사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마가가 전하는 한결 같은 메시지가 있다. 주님이 어떤 마을에 들어가심으로 귀신이 떠나고, 회당과 마을이 정화되며,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됐다. 이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주님을 믿음으로 더 정성스럽게 맞이했더라면 더 많은 능력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고 예수님이 마을에서 떠나주실 것을 강청했다. 얼마나 인심이 박(薄)했던지를 알 수 있다.
비교2) 예수님의 고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인자나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기 쉬운데’ 그 이상으로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래서 마가복음6:5은 이렇게 증거 한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더라.”
거라사지역이나 예수님의 고향에서와는 달리, 가버나움이나 갈릴리 일대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크신 능력, 귀신을 몰아내는 일, 마을을 정화하는 일 등등, 은혜로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삶이 복되고 잘되려면, 주님을 영접하고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교인들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요, 가정이요, 회사요, 삶의 자리가 되면 분명코 능력이 일어난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괴롭히는 악한 영이 분명히 떠나고 심령이 깨끗하게 된다. 병마가 물러간다.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들이 싹 가실 것이다. 악한 권세는 무너지며 교회, 가정을 비롯한 삶의 자리 모두가 깨끗하게 정화된다.
- 구원받을 만한 믿음
바디메오의 일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는가? 주님의 은혜를 수동적으로 갈급해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만한 믿음으로 더 적극적으로 갈급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소경이었던 그는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지질러 주님을 불렀다.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하고 답답했지만 주님을 향해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질러 외쳤다. 마치 우리가 어려운 인생의 상황에 처했을 때 그렇게 사랑하고 좋아하던 주님이 보이지 않고 어디계신지 몰라 막막함과 답답함을 경험하고 무기력감에 휩싸일 때도 있는 것처럼, 아마도 바디메오도 그랬을 것이다.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책망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을 더 애타고 간절하게 불렀다.
주님은 이와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믿기를 바라신다. 애타게 부르짖고 간구하는 믿음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갖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은 그것이 주님을 귀찮게 하거나 결례를 범하는 일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귀하게 여겼기에 그런 분에게 바디메오의 행동은 대단히 불손한 행동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배웅하는 무리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주님은 그보다도 – 체면이나, 예절이나, 격식보다도 – 더 간절하게 주님을 향해 부르짖고 애원하는 소리를 좋아하신다.
주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고,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선언하셨다. 주님을 향해 애원하고 간구하고 부르짖는 이들마다. 그 기도에 응답과 주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 확신하라.
-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
마가는 슬그머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 있다. 주님의 참제자가 되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위하여, 결단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냥 그래야겠다는 깨달음이나 다짐만으로 되지 않는다. 정말 큰 결단과 남다른 변화가 있어야 한다.
50절 말씀을 보라. 맹인은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주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52을 보면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고 증거하고 있다.
겉옷의 의미는 무엇인가?
에베소서4:22-2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마태나 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따를 때 요청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마태는 주님께서 고기 낚는 어부들을 부르실 때, 그물을 버려두고 곧 주님을 따랐다. 누가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마태가 제자도의 즉각적인 결단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누가는 자신이 가졌던 것에 대한 주장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이나 세상적인 자랑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한다. 동일한 맥락이다. 세상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더 이상 주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마가 역시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통해, 마태나 누가처럼 요청되는 점을 말하고 있다. 특히나 제자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마태와 같이 곧 주님을 따랐다고 말씀함으로서 즉각적인 결단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는 누가의 입장을 취한다.
맹인이 겉옷을 버려두었다는 의미는 단순히 소지품을 분실하거나 잊었다는 의미 이상이다. 겉옷은 맹인의 모든 것이었다. 그것을 내버리고 주님께 나아왔다. 그의 구습과 옛사람을 버리고 주님을 좇기로 한 결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거지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겉옷을 버려둠으로 주님 안에서 구원의 새로운 옷을 입고 구원받은 자의 신분이 되었다.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시거나, 영적으로 거지와 같은 누추하고 추한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마가복음은 거지이자 소경 바디메오처럼 주님 앞에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새신분으로 옷을 갈아입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1) 우리가 갈아입어야 할 예복 :
이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의 메시지와도 일치한다. 주님은 혼인잔치의 비유(마22:1-4)를 들려주신다. 그런데 그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누추한 옷을 벗고 혼인잔치에 준비된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하건만 갈아입지 않았다. 임금은 그에게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믿음으로 새롭게 변화된 구원의 새옷을 갈아입고 정말 기쁨으로 천국잔치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혼인잔치의 비유를 조금 더 살펴보자. 임금이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청했지만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를 대며 오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과 율법주의자들이다. 자기 의와 아집으로 가득 찬 사람들일수록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치 주님에 대한 복음은 듣지 만 믿음을 갖지 못하고 외면하는 것처럼 말이다.
임금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누구라도 데리고 오라고 초대한다. 혼인잔치에 손님이 가득했다. 우리의 가족, 자녀, 지인들에 대해 애타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이 준비한 복음의 잔치에 초대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2) 부르심과 청하심에 임하라. 이유와 핑계가 없다.
주님은 부르심과 청함에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임하기를 바라신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제자되기를 미루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때 역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결단하지 못한다.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8:21),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9:61)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62) 말씀하신다.
주님은 인정사정을 생각하지 않는 가차(假借) 없는 분처럼 여겨진다.
시간 관계상 다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당시 시대가 이와 비슷한 상처와 아픔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유대전쟁과 박해 속에서 그 상처와 사별에 대한 고통과 비관적인 슬픔에 매몰되다보니,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신앙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자기의 연민과 상처와 아픔이 가실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결국은 신앙적으로 좌초될 뿐이었다. 염려와 근심으로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굳게 믿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없어 여전히 결단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신앙은 천국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빨리 과거를 잊고 더 나은 내일을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이 시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위해 여러분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썩어져 가는 구습은 무엇인가? 자기 성미나 성격대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가? 처지와 형편이 가로 막는가? 가정불화, 경제적 위기, 실패와 좌절에 상한 심령, 성공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 일용할 것들의 결핍에 대한 불안, 인생의 위기, 누추한 열패감을 옷 입고 주님을 갈급해하는가?
주님이 말씀하신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이 시간 그 옷들을 벗고, 구원받을만한 믿음으로, 새 마음 새 뜻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결단하라. 맹인은 곧 보게 되어 길에서 예수를 따랐다. 마가복음이 전하려는 바와 일치하는 것이 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곧 새로운 복과 기쁨과 소망을 맛보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새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참 복된 길이 열리고 보이게 될 것이다. 이 시간 주님은 여러분이 곧 택함을 받은 주의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