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2일 성령강림절 후 12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열방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 뜻 깊은 광복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압제의 포효가 그치고, 자유를 맨 사슬이 풀리던 날, 해방의 감격으로 이 민족이 흘린 눈물을 상기하는 때에, 또 하나의 언덕인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 됨의 찬가를 부르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1.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

바울이 바나바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것을 열심히 주목하여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장애 때문에 그는 자유함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바울이 그를 주목한다. 말씀을 듣는 모습, 받아들이는 모습이 남들과 달랐다. 그의 모습에서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에게 용기가 일었다. “당신의 두발로 똑바로 서시오!” 선포하자, 그가 기적과 같이 일어나 걷는 것이 아닌가? 장내(場內)가 소란스러워졌다. 어떤 사람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신들이라고 하고, 그중에 어떤 사람은 바나바는 제우스며,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했다. 사람의 형상으로 둔갑한 신이라는 소문이 갑자기 온 동네에 퍼졌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경배와 제사가지를 지내려고 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도 그들과 같은 인간의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리고 복음을 잘 설명하면서 해프닝은 일단락 지어졌다.

구원받을만한 믿음으로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갈급하는 이들에게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이 시간 여러분의 믿음과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의 정도를 점검해보시기를 바란다.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가? 그 믿음으로 은혜를 사모하는가? 혹시 그렇지 못하다면 회개하고 믿음이 회복되길 주님께서 바라신다. 불신앙의 잠에서 깨어나고 의심의 구름이 걷히며 하나님의 사랑이 떨기나무 존재 같은 우리의 심령에 타오르길 바라신다.

 

  1. 바디메오

구원받을만한 믿음과 그 사모함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깨닫고 결단해야 할까? 오늘 말씀의 바디메오의 이야기에서 그 비결을 살펴보자.

 

바디메오는 맹인이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주님을 불렀다. 그가 맹인이어서 예수님이 사람들 중에 어디 계신지, 어느 방향인지 망막했기에, 소리 질러 찾아야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의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모아진 소리보다 더 크게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타박했다. 잠잠하라고 꾸짖는다. 바디메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바디메오를 부르시고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는지 물으셨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자,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

 

 

  1. 적극적으로 자비를 구하라.

영적인 교훈을 살펴보자.

첫째, 적극적으로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라.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소리부터 질러, 주님을 부르는 바디메오의 모습에서 은혜를 갈급해하는 이의 적극성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하거나 길을 찾지 못해 막막하기만 하고 괴로울 때가 있다. 마치 바디메오가 느꼈을 만한 막막함으로, 주님을 보거나 찾을 수 없어 답답할 때가 있다. 영적인 장님이나 다름없이 주저앉아 있다.

 

심지어 주님을 부르는 소리가 주님께 전달되고 있는지 조차, 바디메오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눈을 뜬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알아볼테고 자신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지 안들렸는지 알테지만, 앞을 볼 수 없는 바디메오에게는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께 부르짖고 찾고 간구할 때, 주님께서 들으셨는지, 나를 알아보셨는지, 내 문제에 찾아와주시고 개입해주시며 해결해주실지, 당장 확인할 도리가 없어 난감하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바디메오가 소리질러 부르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까지도 듣고 계시고 부르짖고 간구할 힘조차 잃거나 빌 바를 알지 못한 순간에도 마음을 감찰하시고 헤아리시는 분이시다.

 

둘째 사람이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는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기를 바란다.

바디메오에게 배울 신앙의 적극성이 또 하나 있다. 방해나 장애물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디메오가 소리치는 것을 질책했다. 소란을 피운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평소 그를 무시하고 투명인간 취급하며 동정이나 했기에 감히 천하디 천한 이가 예수를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사람들이 그를 제지하고 잠잠히 있게 하자, 바디메오는 어땠는가? 48절에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주님을 찾았다.

혹 자기의 주변에서 예수 믿을 때, 믿으려면 품위를 지키라고 하고 체통을 지키라고 하고 건전하게 믿으라고 제지할 때가 있다. 예수 믿는다고 극성을 떨거나 유난을 떨지 말라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또 체면을 상하는 게 싫어서 예수님 믿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고 숨기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무의식적으로 방해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한다. 부어주시려는 은혜를 오히려 피하고 마는 꼴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방해하고 상황이 장애가 되어 예수님 믿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럴수록 더욱 예수님을 찾고 부르짖고 믿으시길 바란다.

광신자여도 좋고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예수 믿는 데는 자기의 체면이나 품위를 위해서 주저하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소극적으로 변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들이나 상황이나 여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을 수 적극적인 믿음을 갖기를 바란다.

 

바디메오를 꾸짖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지나가는 예수님을 단순히 구경나온 사람들이었을까? 공관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과는 달리 적어도 마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허다한 무리에 불과한 신앙인들이 있는가하면, 바디메오처럼 예수를 만나고, 예수님을 체험하고 믿게 된 신앙인이 있다는 것이다.

 

46절을 보면, 예수님은 단순히 지나가시는 길이 아니었다. 주님은 여리고에 이르렀고, 그리고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배웅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을까? 그 마을에 얼마간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병자들도 고쳐주고 귀신도 내쫓아 주셨을 것이다. 마을 주민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그리고 여리고를 떠나시면서 사람들의 배웅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무리들은 구경삼아 나온 이들도 아니었다. 그 때 바디메오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허다한 무리들과 바디메오의 차이는 무엇일까?

목회를 하다보니까, 신앙인들에게는 두 부류가 있더라. 예비된 은혜를 누리는 데만 머무는 사람과 부르짖고 간구하여 문제해결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 전자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는 한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하나의 악세사리와도 같다.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거나 예수를 믿기 어렵거나 교회에 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그의 신앙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다.

후자는 당연히 그 반대다. 불쌍한 자기를 주님께 내던질 수밖에 없고, 부르짖고 간구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체험, 구원받는 체험을 하는 신앙인이다.

허다한 무리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린 사람들이다. 주님과 마을에 머물면서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배웅하고 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문제를 들고 나와 주님을 찾는 이이다. 주님께서 해결해주시고 응답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원했다. 51절에서 주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다. 그때, “보기를 원하나이다.” 자기 문제를 알고 있었고 해결되기를 바랐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안정된 상황에서 고상하고 품위 있고 세련된 모습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자기 문제를 주님 앞에 들고 나오면, 해결되고, 순종하며 따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담대한 믿음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여러분의 믿음은 관객에 그쳤는가? 아니면 그 이상의 믿음으로 주님을 갈망하며 찾고 있는가?

 

 

  1.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

마가는 슬그머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 있다. 주님의 참제자가 되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위하여 결단하고 있는지 말이다. 50절 말씀을 보라. 맹인은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주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52을 보면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고 증거하고 있다.

 

겉옷의 의미는 무엇인가?

에베소서4:22-2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마가는 마태나 누가처럼 주님의 제자가 되어 따를 때 요구되는 결단을 말하고 있다. 마태는 주님께서 고기낚는 어부들을 부르실 때,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누가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마태가 제자도의 즉각적인 결단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누가는 자신이 가졌던 것에 대한 주장을 말하고 있다. 마가는 마태처럼 곧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른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맹인이 겉옷을 버려두었다는 의미는 단순히 소지품을 분실하거나 잊었다는 의미 이상이다. 그의 구습과 옛사람을 버리고 주님을 좇기로 한 결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위해 여러분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썩어져 가는 구습은 무엇인가? 자기 성미나 성격대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가? 처지와 형편이 가로 막는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주님을 따를 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결단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8:21),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9:61)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62) 말씀하신다.

 

주님은 인정사정을 생각하지 않는 가차(假借) 없는 분처럼 여겨진다.

 

시간 관계상 다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당시 시대가 이와 비슷한 상처와 아픔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유대전쟁과 박해 속에서 그 상처와 사별에 대한 고통과 비관적인 슬픔에 매몰되다보니,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신앙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자기의 연민과 상처와 아픔이 가실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결국은 신앙적으로 좌초될 뿐이었다. 신앙은 천국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빨리 과거를 잊고 더 나은 내일을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가정불화, 경제적 위기, 실패와 좌절에 상한 심령, 성공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 일용할 것들의 결핍에 대한 불안, 인생의 위기, 누추한 열패감을 옷 입고 주님을 갈급해하는가?

 

이 시간 그 옷들을 벗고, 구원받을만한 믿음으로, 새 마음 새 뜻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결단하라. 맹인은 곧 보게 되어 길에서 예수를 따랐다. 마가복음이 전하려는 바와 일치하는 것이 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곧 새로운 복과 기쁨과 소망을 맛보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새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참 복된 길이 열리고 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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