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을 시작하라(누가복음30-37)

선한 일을 시작하라(누가복음30-37)

 

 

 

 

2018년 8월 5일 성령강림절 후 11주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사랑의 하나님, 8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폭염으로 온 대지가 타들어가고 생명의 멸종을 위협받는 때에, 그것을 식혀줄 주님의 시원한 사랑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바라며 나왔사오니, 나태해진 심령에 귀한 은사가 넘실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1. 착한 일이 일어난다.

살인적인 무더위에 한 주간 어떻게 나셨는가?

방배동의 한 아파트에서 지난주에 일어난 일이다. 이 사건은 엘리베이터에부터 시작됐다. 한 주민이 이 무더위에 무방비 상태인 경비아저씨들이 염려됐다. 에어컨 설치비용을 자신이 쾌척하고, 전기세 1~2천원을 십시일반으로 나눠 낼 수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세상은 참 인색하고 각박하다.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럽지만 이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이중적인 태도를 가질 때도 많다. 참 이기적이다. 압구정의 모 아파트에서 경비원들에게 갑질한 사건, 끊임없는 괴롭힘에 스스로 목숨을 잃은 사건도 있었다. 1,2천원이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목숨 걸고 따지는 경우도 있다.

 

“OO호 찬성”, “찬성! 너무 더워요.” 이 아파트에서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찬성을 뜻하는 포스트잇이 붙이기 시작했다. 같은 라인 30세대 중 24세대가 찬성을 했다고한다. 관리소장도 감명을 받아, 자비로 다른 경비실에도 에어컨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세상은 아무리 각박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사야의 예언이 들려오는 듯 했다. 이스라엘이 죄짓는 지도 모른 채 붕괴되고 멸망당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까지도 베임을 당한다.”고 예언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는 단단한 건축자제로 쓰이는 기둥이라도 상징하려는 듯, 사회를 떠받치는 신뢰와 정의는 완전 무너졌다. 그리고 베임을 당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타락했다고 해도, 그루터기들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그루터기들이 바로 우리 믿는 성도들, 신자들이길 바라신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말씀하셨다.

 

 

  1. 착한 일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얼마 전 집 앞에서 참 비양심적인 일을 발견했다. 옆집 빌라에서 이사를 가면서, 온갖 쓰레기들을 재활용이랍시고 길가에 버리고 갔다. 정말 비양심이다. 며칠간 길가에 이사하는 집에서 나온 생활쓰레기들이 방치됐다. 재활용수거 업체에서 가져가지도 않을뿐더러, 누가 치우겠는가? 지나가는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저라도 이따가 귀가 길에 대용량쓰레기봉투사다가 담아놔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벌써 쓰레기봉투에 담아 싹 정리해 놨더라.

 

착한 일을 해보려고 해도 선수치지 않으면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에게는 천사와 악마가 동시에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반응을 하며 사느냐에 따라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다. 이기적인 사람도 될 수 있고 이타적인 사람도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이 땅의 그루터기와 같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로 부르셨다. 머뭇거리고 주저하기보다는 용기를 내고 결단하고 실행에 옮김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신다.

 

오지랖 넓게 참견하지 말아라. 남의 일이다.

나서지 말아라. 그러다가 피해를 당할 수 있다.

자기 일이나 똑바로 해라.

나만 아니면 된다.

 

온갖 말들이 주님이 바라시는 우리의 행동과 선행과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오지랖이 넓은 게 무엇이고, 참견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않은 채 말이다.

기억하라. 선을 행하고 착한 행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보다 쉽게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다.

 

 

  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오늘의 말씀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과 율법교사 간에, 이웃에 대한 논쟁 중에 주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주님이 들려주신 비유 자체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적용해보고자 한다.

 

1) 내용은 이렇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거의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다. 여리고는 옛여리고가 아니라 헤롯대왕이 재건한 신여리고를 말한다. 예루살렘과 여리고 구간은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여, 폼페이가 이지역의 강도들을 완전 소탕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서울과 양양 간의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면서, 기존의 황태마을이라든가, 그 구간의 있는 휴게소들이 완전 폐업직전이라고 한다. 대신에 속초와 양양은 번성을 누리고 상권이 활발히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노선은 이처럼 중요한다. 그마 만큼 이 구간은 도적들의 먹잇감이 오가는 중요한 노선이었다.

 

치안상태에 대한 물음이나, 위험한지 알면서 왜 이 길을 지났는지 등등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사실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지나가다가 강도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취하는 행동이다. 제사장과 레위와 사마리아 사람이 차례로 지나갔다.

제사장은 그 길로 내려가다가 피하여 지나갔다. 한 레위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달랐다. 그를 불쌍히 여겼다. 급한 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다. 소독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를 말이나 나귀 같은 짐승 위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었다. 심지어 주막 주인에게는 두 데나리온이나 주면서 그를 돌봐주고,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한다.

 

우리가 적용해야할 지점이 어디인가?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지나치는 사람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돌보는 사람인가? 꼭 강도만난 사람과 같은 구명활동에 적용할 것도 없다.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외면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2) 변명과 핑계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교를 대표하는 성직자들이다. 레위기 19장 18절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계명이다. 이들이야말로 사랑의 계명을 가장 잘 엄수하고 지켜야 할 이들이다. 달리 말하면 유대교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성직을 수행해야하기 때문에 부정한 것과 접촉할 수 없기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 사이의 딜레마에 놓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논쟁을 불러일으키려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이야기에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그런 방식으로 전개하지도 않는다.

31절을 보면, “그 길로 내려가다가.”라고 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직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하행선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전의 임무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31,32,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모두 해당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이며 율법의 요구이기도 한 사랑의 행동을 “피하여 지나간” 샘이다. 나름대로 명분이나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름의 이유나 명분이 없는 사람은 없다.

 

주님은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는 강도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그가 자기 스케줄도 있고 계획도 있을텐데, 강도만난 자와 하루를 머물며, 자기 시간을 할애해서 도와주었다. 주님은 평신도 유대인을 등장시킬 수도 있는데,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굉장한 역설을 읽을 수 있다.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보다 못한 사랑의 실천력, 선한 행동.

 

 

  1.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니라.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예배를 잘 드리고, 삶의 자리로 돌아가다가 혹은 돌아가서 선행의 기회와 착한 행동이 요청되는 때가 찾아왔을 때, 피하여 지나가고 있지는 않은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선한 마음과 착한 행동의 실천력이 떨어지고,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종교인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니라.”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그루터기가 되기를 바라시는데, 무관하게 되지는 않았는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혹은 외면해버렸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런 마음을 잃어버려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 대해 긍휼히 여기고 계심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고 보니까, 우리 주변에 참 많은 이웃들이 찾아온다. 가스검침원, 택배배달원, 우편배달원, 서비스기사 등등 무더위에 줄줄 땀을 흘린 채 우리 곁을 스쳐간다. 성경은 히브리서에서 나그네와 이웃에게 대접함을 통해 부지중에 다녀간 천사를 대접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착한 일을 시작하라. 선한 마음으로 시작하라. 주님이 그 가운데 함께 하신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