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삯과 은혜(로마서6:21-23)

죄의 삯과 은혜(로마서6:21-23)

 

2018년 6월 24일 성령강림절 후 5주

 

수고하고 무거운 진진 자를 부르시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연약하고 부족한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시험과 환난과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믿음으로 힘과 용기를 내어 승리해야 하건만, 세상 근심 걱정에 지쳐 낙심했던 이들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여, 위로와 평안을 주옵시고 담대한 믿음과 용기가 넘쳐나서, 이 예배를 마치고 나설 때에는 할렐루야를 외치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

 

 

  • 죄의 결과는 사망이요 저주와 심판이다.

이 시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베드로가 밤새 고기잡이에 허탕을 치고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그 무릎 아래 엎드렸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각적으로 주님을 따랐다는 것을 기억하며,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던 것처럼, 여러분도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그 만남이 있기를 빈다.

 

죄의 결과는 무엇인줄 아는가? 오늘 말씀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수많은 왕들은 결국 죄의 문제 때문에 재앙과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 사무엘서를 비롯해서 열왕기서를 읽다보면, 사람들이 영적으로 힘들어하고 괴로워한다. 왜인가? 죄가 없는 사람이 없으며, 예외 없이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

가장 위대하고 훌륭하고 모범이라던 다윗 왕을 보자.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윗은 거의 숭배의 대상과 같았다. 그런데 그도 죄를 짓고 나니까, 어땠는가? 선지자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랬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 내거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어땠는지를 감추지 않고 여과 없이 보여준다.

 

①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욕보였다. 다윗의 부정한 행위가 자식 사이에서 나타났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일이 자녀에게 나타나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가? 자신의 죄가 자녀를 통해 드러날 때, 하나님의 책망은 어느 채찍보다 가혹한 것이다. ② 이일로 인해 압살롬의 복수가 있었다. 이복형제 압살롬의 칼에 암논이 제거됐다. 이 소식에 다윗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신의 옷을 찢고 바닥에 드러눕게 됐다. ③ 조금 시간이 지나서 상처가 아물고 회복되는가 싶더니,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일로 수많은 군사들이 칼에 쓰러졌고, 다윗은 피신했지만, ④ 그의 아내들은 백주에 압살롬에게 욕을 당했다. 너무나 큰 수모였다.

⑤ 압살롬을 제압하면서 그 목숨만은 살리길 바랐는데, 신복이었던 요압의 칼에 압살롬이 죽고 말았다. 아무리 큰 잘못은 해도 자식은 자식이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18:33) 그날 왕은 마음이 심히 아파 실성한 사람처럼 울었다. 이 비극을 무엇을 되돌릴 수 있을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런 왕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진노와 보복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신명기 사가가 가장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왕으로 꼽는 히스기야는 어떤가? 하나님께서 그를 중병에서 고쳐주셨더니, 마음이 교만해져서 바벨론 사신들에게 자기와 나라를 과신이라도 하듯이 곳곳을 자랑했다. 그의 후대는 그 바벨론에 망해서 굴비구름 엮이듯 포승줄에 묶여 포로로 사로잡혀갔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처럼 죄의 결과는 당장은 무탈해보여도, 나중에는 부메랑처럼 그 때문에 저주가 되고 재앙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들이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지금은 좋아보여도 심판을 면할 수 없기에 하는 말씀일 테다. 그래서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 이게 쉬운가? 인생에서 말이다. 도덕적, 윤리적, 법적인 범죄는 차치하고서라도 영적인 죄도 있다. 교만, 방종, 미움, 시기, 질투, 비방 등등.

 

  1. 죄를 짓게 되는 원인

무엇이 죄를 짓게 되는가?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는데, 야고보서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했다(약1:15). 로마서는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죄의 정욕 때문이라(롬7:5)고 말씀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찾아와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했다.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보였다. 이것을 신약성경의 말로 바꾸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단순히 과일이 아니다. 엄청난 유혹을 상징한다.

 

잠언은 이런 예를 들어 말씀하고 있다. 음녀가 젊은이를 유혹한다.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리고서 매혹적인 향기로 자극한다. 남성의 욕정을 자극하는 옷을 입고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어 젊은이가 따라간다. 그 모습이 흡사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다고 한다. 다윗은 목욕을 하는 밧세바를 보면서 음욕이 불일듯이 일어났다. 이 죄로 인해 앞에서 말했던 대로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다.

 

죄의 유혹이 이 뿐이겠는가? 아간은 물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탐욕으로 망했다. 아나니아삽비라 역시 탐심 때문에 죽음을 면치 못했다. 교만한 마음, 불순종, 남을 미워하고자 하는 마음, 시기, 질투,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 수많은 유혹들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

 

고린도 교회에는 남을 비방(誹謗)하고 정죄(定罪)하고자 함으로 자기의 의(義)를 드러내고자 하는 유혹이 강하게 일더니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심한 갈등과 분열을 경험했다. 이뿐 아니다. 우상숭배의 유혹, 음란함과 호색함의 유혹을 비롯해서 수많은 유혹들이 교회를 괴롭혔다. 물질의 유혹과 거짓교사들의 이간질 하려는 계책이 맞물려 바울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래서 바울이 상처받는 사람이 생길지라도 엄하게 꾸짖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다.”(고후2:11)

 

유혹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간 잊게 만들고,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 양심을 스스로 마비시킬 정도로 강하다. 양심을 마비시키는 것은 영혼의 심장을 스스로 정지시키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중(重)하게 강조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도 죄의 유혹에 넘어지고 사탄의 훼방을 받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1. 가장 복된 소식

참된 복, 가장 큰 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하는 것이다. 누가 죄에서 자유롭고 인생에서 당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있는가?

오늘 주님은 우리가 가장 큰 복음의 소식을 듣기를 바라신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오늘 우리를 용서하시고 심판을 면하며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아시는가? 그 가운데 과정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1) 하나님은 회개의 순간을 주신다. 자신과 직면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할례 받은 육체와 세상적인 경건을 자랑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면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빌립보에 보낸 편지에서는 그가 자랑으로 알던 예전의 세상적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는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의로운 사람인 줄만 알았던 자신의 모습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괴로웠다. 비참했다.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로도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의 율법과 역사와 성경의 지식에 정통한 사람이다. 역대 왕들의 행적과 결과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 정말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였고, 그 심판이 내려진다고 생각하니, 그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이 죄악을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적나라한 실상이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체험은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것은 분명하다.

 

2) 주님은 회개하며 죄를 깨닫는 기회를 주실 뿐만 아니라 이것도 허락하신다. 바로 용서를 경험하게 하신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이 체험 때문에 우리가 천국도 알고 영생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사랑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3)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은 율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부모의 자녀사랑을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이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며 구원의 감격과 확신 위에 서기를 바라신다. 오늘 하나님의 진노가 저와 여러분을 피해 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 다시 한 번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라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주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신다. 죄를 용서받고 매듭이 풀리는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영광과 복된 일들을 만들어가는 소망이 넘치기를 바라신다.

바울의 확신은 무엇인가?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놓인 존재이지만,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연약하고 불쌍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믿다가 주를 멀리 떠난 것 같은 인생이라도, 주님은 어떤 특정한 때에 버림받게 내버려 두시고 외면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부르셔서 더욱 주님을 열심히 믿고 용서받으며 구원의 확신을 갖기를 바라신다.

죄 때문에 실패하고 지친 인생, 스스로 포기하더라도, 주님은 애써 나 같은 존재를 찾아내셔서 힘주시고 능력주시며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승리하길 바라신다.

 

베드로에게도 돌아가자. 그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밝은 빛과 같은 분이셨다. 그 앞에 서자, 자신의 누추하고 추한 모습이 드러났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떠나주시기를 간청했다. 마치 마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주님은 그를 제자 삼으셨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마귀들과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마귀는 주님을 떠나가지만, 사람은 주님 곁에 있게 된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