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7일 성령강림절후 4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손 때문에 산과 들의 초목이 온 대지를 푸르게 물들인 계절에, 주님의 손길로 주님의 영광과 은혜에 물들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가슴마다 주님의 음성이 전율되어 퍼지게 하여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이사야33:6)
- 발단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이 개막됐다. 선수들은 긴장할 테고, 국민들은 기대를 하고 있다. 선수들은 힘과 용기를 내고, 국민들은 힘찬 응원이 있길 바란다. 내일 9시에 스웨덴과 경기를 한다는데, 가능하신 분들은 교회에서 함께 응원하면 어떨까? 오늘 말씀은 출정을 앞두고 있는 이들에 대한 말씀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말씀의 이해와 은혜를 위해, 어떤 인생의 출정이나 도전을 앞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누구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긴장한다. 어렵고 힘든 일을 앞두어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과잉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너무 앞서 가는 사람은 시작부터 주저한다. 우리 인생에서는 수많은 난관을 만난다. 벼랑 끝에 서기도 한다. 길이 없다. 막혔다. 피할 길이 없어 절망한다. 이런 점 때문에 생각이 과잉된다.
다윗은 어땠을까? 그는 사람이 아니었는가? 믿음이 흔들리고 약해질 때는 없었을까? 있었다면 세상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릴 때, 이겨낼 수 있는 비결과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의 말씀은 그 대답을 주고 있다.
암몬과 싸울 때의 이야기이다. 암몬의 왕이었던 나기스가 죽고 난 뒤에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 왕이 되었다. 나기스는 예전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닐 때, 선대해줬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피신을 하는데, 나기스의 아들 소비가 다윗에게 생필품을 제공해주며 호의를 베풀었다. 이렇게 본다면 나기스의 가문과 다윗은 각별한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나기스가 죽자, 다윗은 조문객을 보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섣부른 말한 마디가 문제다. 신하들은 하눈에게 다윗을 믿지 말라고 한다. 다윗의 조문객은 그의 부친 나기스를 공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성을 엿보고 정탐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을 함락시킬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옆에서 조언을 하는 참모들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냉철한 판단력으로 희망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선입견과 편견에 싸여 불가망을 습관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하눈은 다윗의 신하들의 수염을 깎고 중동볼기까지 옷을 잘랐다. 엉덩이가 드러나는 가장 치명적인 수치심을 안겨서 돌려보냈다. 이 조문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런 내막이 전쟁의 발단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수많은 발단이 있다는 점이 같다. 내막이 있고 사연이 있다. 그래서 뭔가를 결단하고 행동에 옮겨야 할 때가 있다.
이스라엘과 암몬의 전적(前績)을 살펴보자. 사울이 왕이 된 직후였다. 암몬은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빼앗고자 했다.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과 조약을 맺자고 한다. 암몬은 그 조건으로 오른쪽 눈을 빼버릴 것을 요구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 이기게 하셨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야베스는 실의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다윗 때는 사울 때와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다윗 군대의 전력이 굳건하다. 예전에야 오합지졸들이었다면, 다윗의 군대는 정비된 조직과 수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무엘하8:6을 보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승전에 승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한 번 두려움을 가진 상대에게는 내가 더 힘이 세졌다고 하더라도 두려움이 생긴다.
암몬도 나름의 전쟁에 대비해서 대책을 세운다. 다윗의 군대가 있는 이스라엘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안다.
지난 북미정상회담 때 주목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루카 용병, 세계 최강이라고 한다. 그루카 용병 한 사람이, 무장 강도 40명을 홀로 격퇴한 무용담으로 유명하다. 선발과정에서부터 엄격하고, 25kg 모래짐을 지고 시간당 6km 산악행군을 해야 한다. 어릴 적부터 고산지대를 누비고 다녀서 체력이 우수하다.
마찬가지다. 암몬은 세계 최강의 부대 벧르홉, 소바의 아람 사람들 2만 명을 용병으로 기용한다.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을 시시 때때로 괴롭히고 위협이 됐던 나라다. 히스기야 왕 때는 이들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포위되고 함락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다.
장담할 수 없는 전쟁, 이길지 패할지 모르는 전쟁, 어느 전쟁인들 항상 승리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서도, 극히 작은 아이성에서 패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큰 것을 이기지만, 작은 데서 패할 수도 있다. 무엇도 장담하거나 자만할 수 없다. 더욱이 상대는 암몬이고, 이스라엘의 전력이 우수하다고 해도, 암몬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아람의 용병 2만 명을 기용한 상태다.
이 전쟁의 결과는 다윗의 승리로 돌아갔다. 다윗은 암몬의 랍바를 쳐서 왕성을 점령하고 전리품을 취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 출정식에 필요한 것
믿음이 흔들리고 의심이 생길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승리를 예상하지만 두려움과 염려가 몰려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윗은 힘주시고 능력주시는 하나님을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출정하는 군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1) 절박할 때 주님을 기억하라.
1-3을 보라.
여러분 절박했을 때, 한 길이 막히고 피할 길을 찾지 못했을 때를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환난 날에 도우셨다. 다윗은 사울의 군대가 코앞까지 추격해왔을 때, 피할 길을 내셔서 도피할 수 있게 되었고, 정적들의 수많은 음모에도 참고 인내하며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다윗뿐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의 사람들에 대해 주님은 응답하셨다. 집에서 쫓겨난 하갈이 물을 얻지 못하고 죽겠다고 할 때, 우물을 발견하게 하셨고, 이삭이 애써 찾아 팠던 우물을 빼앗겼을 때, 또다시 우물을 찾게 하셨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목말라 탈진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이런 체험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다. 재정과 물질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벼랑 끝 같은 기한 앞에서 하나님은 신기한 방법으로 채우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사고로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위협에서 주님은 신음하는 고통을 들으시고 건져주셨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 앞에서 주님께서 먼저 해결해주신 경험도 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을 당할 즈음 피할 길을 내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들을 떠올려라.
2)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4-5을 보라.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만나고, 그 장수 골리앗을 만났을 때, 어땠는가? 블레셋은 이미 철기문명으로 무장된 최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아직 기술자가 없어, 블레셋을 의존해야만 창이나 칼을 가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군대가 블레셋을 만났을 때, 전장은 힘겨운 버티기에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상태였다.
4-5처럼 기원하는 까닭은,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선전을 하고 승리를 거둔 까닭이다. 그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셨다.’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리는 순간,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의 깃발을 높이 세우게 된 순간이었다.
다윗은 그 승리의 이름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출정하는 군대를 격려한다. 저의 마음도 동일하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의 깃발을 세우기를 축원한다. 여러분의 모든 소망과 기도제목에 주님께서 능히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신다.
3)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실 승리
6을 보라.
하나님은 주의 자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도우신다. 그러기에 승리도 확신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믿게 된 것이 누구의 덕택인가? 교회에 출석하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누구의 덕택인가? 인간의 의지와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사람의 말과 설득 때문도 아니다.
요한1서 4장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자기의 자의적인 결단과 의지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이 먼저 있었기에 우리가 다들 이 자리에 있다. 이것이 바로 선행은총(先行恩寵)이다.
로마서11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나니.”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기억하시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먼저 사랑하시고 구원받은 자녀 삼으셨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응답하신다. 오른손은 하나님의 파워요, 강력한 의지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그 힘으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다. 그리고 승리하길 원하신다.
4) 우리에게 필요한 결단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결단이 필요할까?
7절을 보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장차 일어나는 일에도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주의 이름이 곧 무기요, 힘이요, 능력임을 믿어야 한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어땠는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사17:45,47)
다윗의 군대가 암몬과 싸우러 나갈 때, 잘 준비됐다고 장담할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부족하다고 걱정할 수 있다. 그러나 칼과 창과 군사력과 군대의 화력은 인간의 도구일 뿐, 더 큰 무기가 있다. 바로 믿는 자의 능력이요 권세인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 이름으로 담대히 출정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5) 믿음의 확신
다윗은 그 믿음의 기도에 대해 이런 결과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8절이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하나님을 모르는 암몬은, 아무리 용병까지 기용해서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비틀거리다 엎드러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적의 위세와 포화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바로 설 것이다.
시편20편의 노래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 1-8은 다윗이 출정하는 백성들에 대한 격려와 기도이다. 그런데 9절은 그 맥락과 다르다. 왕의 기도와 격려를 들은 백성들의 고백이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출정하는 백성들의 사기가 느껴지는가? 이전에 함께 하셨던 의로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상기하며 믿음의 기치를 올리자, 힘과 용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이와 같은 결단과 각오로 능히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일까? 여러분에게 주님을 향한 이런 응답과 결단이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