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6일 부활절 6주, 창립기념 및 어린이주일

 

주의 손가락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수놓으신 창조주 하나님, 이 교회를 명하여 지으신 창립기념 주일과 어린이 주일에 저희 모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세운 교회가 어린 아이들의 순진함과 주님 사랑의 첫마음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가 되기를 원하오니, 이 자리에 임재하시고, 좌정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영광과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셔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7)

 

 

  1. 예수의 딜레마

한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끌고 왔다. 이 여인이 수치심(羞恥心)을 느끼든 말든 상관없이 말이다. 일말의 관용과 자비로운 마음조차 없이, 정죄(定罪)하며, 이 여인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려야할지 물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함이었다. (어느 시대나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당대에 공고한 기득권과 지위를 누리고 있던 사람들이다. 말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말하지만, 실상은 얼마나 달랐는지 아는가?!)

 

어떤 처분을 내려야 하는가?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야 한다. 섣불리 용서하고 풀어줘야 한다고 말한다면, 어용논객들은 가차(假借) 없이 매도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막말을 내던지게 함으로 언어폭력을 가하고 인격살해를 하게 하는 것이다. 율법대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동안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언사는 거짓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기레기 같은 논객들은 예수라도 별수 없다고 떠들어 댈 것이다.

 

주님은 앉으시더니,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뭐라고 쓰셨다(v.6b). 성경에서 손가락은 모두 4번 나온다. 손가락으로 천지를 만드셨고(시8:3), 손가락으로 땅의 흙을 빚어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으며(창2:7),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했던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의 손가락들이 벽에 글씨를 썼다(단5:5). 그리고 예수님이 손가락을 땅바닥에 글을 쓰셨다. 모두 성전과 관련된 구절들이다.(옥성득 교수 블로그, https://m.blog.naver.com/1000oaks/221226837670)

 

과연 뭐라고 쓰셨을까? 그동안 추측은 많았다.

  • 무슨 물을 해야 할지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 비슷한 죄를 범한 지도층 인사들의 리스트를 썼을 것이라는 견해.
  • 남자는 어디갔니?

 

 

  1. 땅바닥에 새긴 말씀

성경에서 합리적인 추론을 해보자. 단서는 7절, 9절에 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하지 아니하는지라.”

 

왜 묻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다. 그 때,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무엇에 가책을 느꼈는가? 단순히 예수가 임의대로 쓴 글이 아니라 분명한 것은 말씀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그 뜻을 묻지 않았다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잘 알려져 있는 말씀(성경구절)이다. 그리고 여인이 당하고 있는 수치심과 동일한 무게로 양심에 가책(呵責)을 느끼게 할 만한 구절이었다.

 

7장 37절로 돌아가 보자.

명절 끝날. 가을절기의 절정을 이루는 초막절을 의미한다. 유대인의 3대절기가 있는데,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가나안에서 첫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기념하여 지킨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이다. 초막절은 이레 동안 지켜졌는데, 메마르고 거친 광야를 은혜로 지나왔음을 감사하며, 나중에는 광야에서 약속의 땅을 고대하고 바랐던 것처럼, 종말에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을 기다리는 절기가 됐다.

여름의 긴 건조기와 무더위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축제였다. 우리나라는 사이사이 비가 내리는데, 이 지역은 수개월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건조기는 온 땅이 바짝 마르고 먼지가 날렸다.

이것이 세상을 말해주기라도 하듯이 사회적인 환경도 비슷했다. 팍스로마나(Fox Romana) 평화의 기치를 내세웠던 로마제국치하에서의 폭압, 종교지도자들의 불의와 거짓이라는 기근을 견뎌내야 했다.

주님은 초막절 마지막 날, 성전에서 큰 소리로 말씀을 전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마치 과거 출애굽 광야에서 반석에서 물이 샘솟았듯이 말이다.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키는 말씀이었다. 마치 이른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온 만물에 생기가 돋듯이, 성령을 받으면 생명의 충만한 활력이 솟아오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메말라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생수와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키워드들을 정리해보자. 초막절, 생수, 간음죄, 정죄, 혐오, 수치, 성전, 땅바닥에 쓴 글.

여인을 잡아와 성전밖에 모였던 이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 그러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한 성경구절? 바로 예레미야 17장이다.

예레미야 17장은 유다의 죄가 철필과 다이아몬드 촉으로 마음판에 새겨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제단 뿔 위에도 새겨져 있다고 말씀한다. 마음에 가시덤불 같은 거짓되고 위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v.6).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속을 누가 알겠는가? 메시아 왕국의 도래와는 거리가 멀어져 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17:9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주님은 첫 번째로 땅바닥에 말씀을 쓰시고 나서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셨다. 굉장히 연관성이 있는 대목이다. 이 말씀은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이어서 아무도 묻는 자가 없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과 다름없이, 온갖 죄를 몰래 저지르고서는 자신의 율법적인 의를 자랑하면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땅바닥에 글을 쓰셨다. 예레미야17:12-13,

 

개역개정)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새번역) “우리의 성전은 영광스러운 보좌와 같다. 처음부터 높은 산 위에 자리 잡았다. 주님, 이스라엘의 희망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버리는 사람마다 수치를 당하고, 주님에게서 떠나간 사람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버리고 떠나간 것이므로, 그들은 땅바닥에 쓴 이름처럼 지워지고 맙니다.”

 

요한복음7:37-8:11의 키워드들이 이 구절에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상상력을 보탠다면, 당시의 유명인들의 이름, 정치인, 종교인들, 경제인, 지식인 등등의 이름을 덧붙여서 땅바닥에 열거했을 지도 모른다. 마치 “me too 운동”에 열거된 명단이나, 국정농단에 부역했던 종교인들, 지식인들, 부역자들의 이름들처럼 말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땅바닥에 이름들이 열거될 때, 종말과 심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일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말았다. 오직 예수와 여자만 남았다. 주님은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의 말이 “없나이다.” 주님은 다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주님은 지금 한국교회에 오셔서 메마른 땅바닥에 글씨를 쓰고 계시다. 생수의 근원인 주님을 버리고 권력과 물질의 우상을 섬기며 출세와 성공을 지향하다가 바짝 메말라버린 현실 위에 말이다. 소수자들을 정죄하고, 설 땅을 잃어버릴 만한 어려움과 고난에 빠진 이들을 불온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회피하기 일쑤다. 예수를 팔아 자신들만의 세계와 질서를 지속시키려는 속셈이다. 땅바닥에 새겨진 이름들, 하나님의 심판 때에는 다들 지워지고 만다. 오히려 철필과 금광석 촉으로 그의 죄가 낱낱이 마음판과 제단 뿔에 새겨지게 된다.

 

 

  1. 우리 교회의 나아갈 길

교회 창립 8주년을 맞아, 엄중하게 떠오른 주님의 말씀이 있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5)

 

그리고 누가복음 10:19의 말씀이 들려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주님께서 70인을 세워 파송하셨을 때, 돌아온 이들이 기뻐하며 말한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 시간 먼저, 주님의 진정한 이름을 가진 자의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하라.

주님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항복할 만한 십자가 능력의 믿음 말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두 번째,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라.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 주님께서 이길 힘과 능력, 지혜와 용기를 주셨음을 확신하라.

 

주님은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는데 그치지 말고 너희 이름에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믿음의 권속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분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기를 사모하기를 바란다. 땅바닥에 이름이 새겨져 지워지는 일과 수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간절히 사모하기를 바란다.

 

주님은 여인에게 정죄하고 고발하던 이들이 어디있느냐고 물으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는 일, 설 땅을 잃은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일을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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