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6일, 부활절 5주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정직으로 만민을 판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온 대지가 생명의 기운으로 찬란한 때에, 생동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 안에서 소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

 

 

  • 평화를 심어 가꾸라.

남북정상화담은 감동적이었다.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이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남북화해 맞이 병무청 주요 민원이다.

 

– (입대자 질문) : 곧 입대해야 하는데 남북관계 좋아지면 군대 안 가거나 복무기간이 줄어드나요? 그렇다면 최대한 늦춰보려고요.

 

– (담당 사무관 답변) : 최대한 빨리 가세요. 지금은 기껏해야 강원도지만 조금 더있으면 백두산, 개마고원으로 갑니다. 빨리 가는 게 최선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合意대로 이행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반도에 칼과 창으로 세워지는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에 따라 和解와 容恕와 사랑으로 平和와 繁榮이 세워지기를 바란다.

 

印象的이었던 장면이 여럿 있다.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이 공감했을 것 같다. 그 중에서 목회자인 저에게 유독 눈에 띈 것은 기념식수를 심고서, 그 옆에 돌비를 세운 것이다.

각각 한라산과 백두산에서 가져온 흙을 뿌리고, 한강과 대동강에서 퍼온 물을 주었다. 평화는 이처럼 조심스럽게 서로 힘을 합하여 돌보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평화와 번영을 심다돌비에 새겨진 문구였다. 길갈에 세워진 열두 돌이 생각났다. 광야의 방황과 실패를 끝내고 가나안으로 입성하기 직전에 이스라엘은 각 지파의 수대로 돌비를 세웠다. 그 돌들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상징이었고, 12지파의 공존과 번영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을 향한 교훈의 상징이었다.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4:5-6)

 

이스라엘이 어긋난 길로 가거나, 딴 길로 가다가도, 그곳에 세운 돌을 생각하며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상기했다.

 

기념식수 행사 뒤, 除幕된 記念碑를 보면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엄중하면서도 자비로운 메시지를 듣는 것만 같았다. 우리 역시 평화를 심어 가꾸어 나가며, 평화의 진정한 가치가 희미해질 때, 이날, 이 의미를 기억하여, 恒久的인 平和가 이 땅에 오기를 바란다.

 

 

  1. 에스더

모르드개가 굉장히 화가 났다.

에스더는 유다사람이지만 페르시아의 왕후가 됐다. 하만이라는 사람은 페르시아의 2인자였는데, 유다인들을 시기하여 민족을 멸절시킬 음모를 갖는다. 모르드개는 이것을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유다민족이 멸절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부탁한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는 하지만 사촌 오빠다. 에스더가 어릴 적부터 딸처럼 돌봐왔다. 그러니 너무나도 중차대한 문제였기에 당연히 부탁할 수 있고도 남는다. 모르드개는 당연히 그럴만한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급한 문제를 외면한다면 배은망덕한 것이다.

그런데 에스더가 난감해하고 있다.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모르드개의 부탁은 몰라서 그렇지, 쉽게 들어줄 수 것이 아니었다. 새로 생긴 특별법 때문이다. 에스더는 그 덕에 황후가 된 셈이나 마찬가지다. 에스더는 지금 그런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잘 알아듣기 좋게 하닥을 통해서 전했다.

그래서 모르드개가 화가 났다. “너 아니어도 유다인은 분명히 놓임과 구원을 받겠지만,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망하리라.” 악담을 쏟아놓을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딸 같이 키워왔는데, 민족의 생존문제에 거절당한 배신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사로운 부탁도 아니고,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부탁을 했는데, 자기만 살겠다고,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떨까? 우리 역시 누군가의 절절한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데, 보기와는 달리, 그런 사정이 안 될 때가 있다. 또 반대의 경우를 당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서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야속하게 생각된다.

 

특별법이란 이런 것이다. 한진 그룹의 이명희가 아무런 직함이나 직위도 없으면서 회장의 처(妻)라는 이유로 임원을 비롯한 사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 어땠는가?

어느 잔칫날 페르시아 왕이 왕후를 불렀다. 사람들 앞에 소개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것을 거절했다.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일로 촉발돼서 밝혀진 사실이 있다. 와스디가 왕의 명령만 무시한 게 아니라, 평소에 각 지방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함부로 했다는 것이다. 소위 ‘갑질’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그 방지법이 만들어졌다. 왕의 명령 없이는 문정(門庭)에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며, 왕명 없이 왕에게 나아가서도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왕의 복심(腹心) 역할을 할 수 없으니, 왕의 이름을 함부로 팔아가며, 정치를 어지럽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죄는 죽음으로 다스렸다.

그러니 에스더가 왕에게 먼저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왕은 그 처소에 들르지 않은지도 이미 한참이 되었다.

 

모르드개는 화가 났지만 에스더에게 다시 한 번 말한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겠느냐?”

 

 

  1. 느헤미야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려한다. 느헤미야의 이야기이다. 그가 페르시아 수산궁에 있는데, 하나니라는 사람으로부터 고국의 소식을 들었다.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은 불탔다는 것이다. 고국에 대한 소식에 수심이 가득차고 밤잠을 못 잤다. 병든 사람처럼 수척해진 모습을 본 왕이 그 이유를 물었다. 고국에 대한 사정을 이야기하자, 왕은 느헤미야에게 기한을 정하고 고국을 돕고 오도록 했다.

 

예루살렘에 온 느헤미야는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하고 국가를 복원하는 일에 굉장히 빠른 진척을 보였다. 순식간에 성벽을 세워나갔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벽이 무너짐과 함께 무너졌던 예루살렘의 평화, 그 세월이 무려 70년이다. 52일 만에 기적과 같이 평화가 복원되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시기하고 훼방을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가의 초당적인 협조와 협력이 필요할 때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정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기필코 나라를 위기와 파멸에 빠지게 한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 그것을 보여준다.

산발랏은 유다가 성벽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고 시기가 일어나 크게 분노하면서 앞뒤 없이 악평을 한다.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 한다고 비웃으면서 말이다. 도비야는 그 성벽에는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정도로 쓸모없는 성벽이라면서 폄훼했다. 이런 소문을 앞세워서 여론을 확산시켰다고 생각해보라. 열심을 가졌던 사람도, 분명 말도 안되는 의심을 갖게 되고 추동력과 결집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심지어 산발랏, 도비야를 비롯한 일당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벽재건을 방해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자고 행동에 나선다.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18) 이들의 세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컸다. 정치적 음모와 술수와 거짓을 다 열거할 수 없다.

다만 느헤미야에 대한 음모 하나만 살펴보자. 온갖 거짓뉴스와 가짜 뉴스를 만들어 내더니, 소용이 없자, 음모 하나를 꾸몄다. 스마야를 통해서 이런 불안과 공포를 심어주었다. 그들이 밤에 반드시 당신을 죽이려 할테니, 성전으로 가서 그곳 문을 닫고 거기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그곳이 제일 안전하다는 것이다. 스마야는 그나마 느헤미야가 믿을 만하다 여겨 조언이 구했는데, 그도 역시 부정적인 대답과 함께 피할 방도를 이야기 해주었다. 느헤미야는 괴로웠다. 대적자들이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 이 공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또다시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데, 완성이 불투명해졌다는 것, 가난한 이들이 중노동에 동원되면서 일어나는 일들, 높은 이자를 무느라 자녀까지 전당잡혀야 했던 실정,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한 순간 녹아내릴 수 있다.

 

 

  1. 죽으면 죽으리라.

위협이 찾아오고, 딜레마에 빠질 때 신앙의 결단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맡기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갖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용기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에스더는 사촌 오빠 모르드에게 다시 연통을 넣었다. ‘삼일 밤낮을 금식하며 기도해달라. 그 후에 왕에게 나아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개인적인 사정과 여건이 있지만, 에스더는 현실을 택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의 용기와 결단을 택했다.

 

느헤미야는 어땠는가? 믿을 만하다 했던 스마야의 조언과 충고를 듣고 자기 목숨을 위해 피할 길을 찾았더라면 더 큰 함정에 빠질 뻔했다. 스마야가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뇌물을 받았을 지는 꿈에도 몰랐다. 느헤미야가 자리를 피하게 하여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의 음모에 빠질 번했다.

 

느헤미야6:13,14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위협과 협박으로 두렵게 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6:9에 따르면 두려움을 주어, 손을 피곤하게 하고 일을 중단하게 하고 이루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느헤미야는 그때마다 기도했다. “두려움 때문에 손이 피로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내 하나님이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소서.”

기도 방식도 주목해보자. 페르시아 왕에게 자신의 간구와 소망을 말할 때,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느2:4-5)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저들의 소행을 기억하소서.’ 이 역시 짧은 묵도였을 것이다. 일을 하기 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잠시 기도하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사하는 힘을 강력했다.

 

정말 피할 길은 사람의 생각이나 충고가 아니었다. 하나님이셨다.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힘입어 용기를 얻으며 지혜를 얻고 신중함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그래서 에스더는 페르시아 땅에서 민족을 구원했고, 느헤미야는 성벽을 완성했다.

 

다윗은 수많은 대적자들, 정적들의 위협 앞에 무엇을 체험했던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하나님은 분명히 용기와 지혜를 주신다. 능력과 이길 힘을 주신다. 피할 길을 내시고,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믿음이 있으면 거꾸러트림을 당하지 않는다.

 

상황이나 현실을 택하지 말고 믿음을 택하라. 나의 처지와 형편도 모르고 누군가 무리한 요구와 부탁을 할 때, 원망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지혜와 용기를 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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