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2일 부활절 제 4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들녘의 푸른빛이 생기를 자랑하며,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때에,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저희 심령 속에 가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9:15)

 

 

  1. 룻의 새 시어머니

1)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다(삼상2:30).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모압 땅에 와서 살다가 남편 잃고, 자식들 잃고, 이제 홀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끝까지 동행했다.

 

이들의 대화를 보면, 나오미가 이렇게 말한다.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라가라 하니” 이에 룻은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말하며,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다.

 

극적인 것은 여기서 보아스를 만났다. 기업무르기를 해야 했던 당시의 풍습에 따라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기업무르기는 땅의 소유권에 관한 권리행사와 같은 것이다.

보아스와 룻이 새롭게 가정을 꾸리고 그 사이에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2)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룻의 새 시어머니 이름은 무엇일까? 아마 이런 것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같다.

 

잠깐 계보를 살펴보자. 보아스의 증조부는 나손, 그 위는 고조부 암미나답이다.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는 엘리세바였는데, 아론과 결혼했다(출6:23). 그마 만큼 영향력 있는 집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손은 유다진영의 군대지휘관이었다(민2:3). 동방 해 돋는 쪽에 진을 쳤다. 행진할 때 가장 선두로 움직였고, 성막을 이동할 때, 기둥을 옮기는 역할을 했다. 어딜 가든 기둥을 제일 먼저 설치한다. 그마 만큼 첨병에 해당하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가나안에 입성할 때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다. 이전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내보니까, 많은 수의 정탐꾼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지혜롭고 담대한 믿음의 정탐꾼 두 명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은 바 있다. 학습 효과이다.

그 두 명은 누굴까? 기민하고 날렵하며 항상 첨병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 믿음의 눈으로 현실과 사태를 예리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 적어도 여기에 유다의 지휘관 나손의 아들 살몬이 포함됐을 것이라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지휘관이 자기 아들을 선두에 내보내거나 염탐을 하고 중요한 첩보를 수집해오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3) 여리고에 잠입했다.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이었다. 첩보원들에게 들킬 뻔했는데, 라합이 이들을 도와줘서 무사히 이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예전에 12명의 정탐꾼들이 40일간 정탐을 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너무나도 짧았다. 그러나 기생 라합에게서 너무나도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여호수아2:9-10보면, 가나안 사람들이 광야를 거쳐 온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하고, 주민들의 간담이 녹았다는 것이었다. 홍해를 건넌 일,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전멸시킨 일 등을 모두 들어서 알고 있었다.

두 명의 정탐꾼은 돌아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보고(報告)한다.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수2:24)

보아스의 어머니이자, 룻의 새 시어머니는 누구인가? 그렇다. 바로 라합이다. 마태복음1:5은 이렇게 증거한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1. 사랑과 구원의 증표

이 두 젊은 정탐꾼과 라합 사이에 모종의 약속이 있었다. 붉은 줄을 라합에게 주면서, 이스라엘에 가나안에 들어와 여리고가 무너질 때, 이 붉은 줄을 매고 있으면 그에 속한 가솔들을 안전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마치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장자의 죽임을 면하리라 했던 약속처럼 말이다. “붉은 줄” 이 대목이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한계를 뛰어 넘는 무한한 사랑의 증표요 상징이다.

귀한 정보를 주고 자기들을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에 당연한 처사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오리라’는 약속, 그때는 반대로 정탐꾼들이 이 집을 보호하리라는 약속, 이 속에 싹텄던 러브스토리. 붉은 줄은 단순한 약속의 증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싹이 튼 구원의 증표였다. 사랑은 율법을 뛰어넘게 하는 힘이다.

율법은 가나안 사람과 혼인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 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것을 다시 상기시켰다. 신7: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라.”

살몬이 가나안의 여인이자, 기생이었던 라합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크나큰 용기이자 율법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랑의 승리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위대한 사랑의 승리이다. 허물이 많고 죄와 연약함과 부족함이 많은 우리이지만,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모순된 존재인지도 모르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 그래서 히브리서9:1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주님의 보혈은 사망과 저주와 멸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영원한 증표가 되는 것이다. 온전한 사랑의 완성이다.

 

 

  1.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

세 여인을 주목해보자. 나오미, 룻, 라합.

1) 나오미는 자기 이름을 괴로움’, ‘쓴 고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다. 고난과 그 눈물로 범벅이 된, 저주 받은 인생인 것만 같았다. 초라해져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2) 룻은 모압 여인이다. 사실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의 총회에도 들여서는 안 되며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다.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그는 초라해졌다. 모압 땅, 자기고향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3) 그리고 라합. 그도 결코 율법대로라면 이스라엘 사람과 혼인하여 믿음을 가진 가문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초라해졌다. 무너진 여리고성의 사람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그렇게 자랑하고 자부심을 갖는 다윗왕은 나올 수도 없었다. 심지어 라합과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른 여인이었다. 멸시 받고 천대 받는 이름이 존귀한 어머니의 이름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이스라엘이 망각해서는 안된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나오미와 룻의 대화에서 룻은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나오미의 두 며느리 중에 오르바는 최종적으로 현실을 택한 사람이었지만 룻은 하나님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오르바를 함부로 매도할 수는 없다. 우리가 힘든 현실 속에 신앙을 따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안다. 그러나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믿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라합은 어떠했던가? 두 정탐꾼에게 했던 고백,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11) 상천하지(上天下地)의 하나님을 경외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존귀히 여기셨다. 존귀히 여기셨다니까, 명성을 내고 위대한 업적을 남겨야만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럴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존귀히 여기시고 복을 주셨다.

 

 

  1.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기는 사람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살몬과 라합의 가정을 보자.

첫째, 둘 다 믿음이 신실한 사람이다. 신실한 믿음의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어려울 때가 있을 때마다 믿음으로 어떤 일을 결정하고 함께 기도하며 이겨간다는 것은 참 복된 일이다. 가족 중 안 믿는 남편이나 아내나 아이들이 신앙 좋은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라.

 

둘째,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었다. 사랑 없이, 신뢰 없이, 뜻을 함께 모으지 못하고 사는 가정이 많다. 부부간에 주님 안에서 사랑과 존중이 넘치고 은혜가 넘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 갓 결혼한 어떤 신부가 새색시처럼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우리가 오래된 부부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신랑 : 그럼 당신이 이 여행가방을 들어!

 

* 남자와 행복하기 위해서 여자는 남자를 많이 이해하고 사랑은 조금해야한단다.

여자와 행복하기 위해서 남자는 여자를 많이 사랑하고 절대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 강아지와 남편의 공통점

– 때 되면 끼니를 챙겨 주어야 한다.

– 가끔씩 데리고 놀아 주어야 한다.

– 복잡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 초장에 버릇을 잘못 들이면 내내 고생한다.

 

* 어느 중년 부부가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데, 남편이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다닌다. 한 점원이 사이가 좋으신 것 같다고 말하자,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 집사람의 충동구매를 막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어요.”

 

살몬과 라합은 전쟁과 격변기 속에 싹튼 사랑이었지만 율법을 뛰어넘고, 주변의 시선과 편견과 선입견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 이룬 가정이었다.

이런 가정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존중히 헤아리고, 가정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십자가를 믿음으로 감당해보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존귀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한 가지 더. 보아스는 살몬과 라합에게서 태어났다. 룻을 아내로 맞은 보아스의 성품을 보면 참 좋다. 자녀를 바르게 키운다는 것도 참 복된 일이다. 성공하고 출세하는 자녀가 아니라 따뜻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도리에 맞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양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대한항공사 사장의 세 자녀와 비교해보라.)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라. 그 가문에서 다윗 왕이 태어났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자녀가 자라고 배출됨으로 그 이름을 빛나게 해주실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우리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복과 은혜를 누리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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