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곧 업데이트 예정)

 

 

 

2018년 4월 15일 부활절 제 3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사랑의 주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이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이 주님 안에서 새힘과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사, 소생하는 자연 만물들처럼 주님의 생명의 충만한 소망과 능력을 품게 하옵소서.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되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도록 성령충만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옵소서.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실 줄 믿사오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뜻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1. 은혜와 평강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얼마나 힘드셨는가? 혹시 지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지는 않은가? 봄은 왔고, 화려한 꽃은 피었다지만, 황사와 미세먼지로 우리의 호흡이 불편하다. 이처럼 세상의 혼탁함과 메마름으로 피로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할아버지에게 7살짜리 꼬맹이가 나이를 물었다. 할아버지 7살이라고 답했다. 꼬맹이가 거짓말하지 마시라고 하니까, 할아버지는 70살은 너무 무거워서 집에 놓고 왔다고 답했다. 정신과 감정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여러분도 수고하고 무거운 지친 마음을 이 시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쉼을 얻기를 바란다.

 

40대 이상 남녀에게 꼭 필요한 것 5가지

남자) ① 아내, ② 부인, ③ 마누라, ④ 와이프, ⑤ 여편네

여자) ① 돈, ② 머니, ③ 비상금, ④ 현찰, ⑤ 통장

 

남자는 여자 의존적이고, 여자는 물질 의존적이 된단다.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없을 때, 안절부절 못하거나 불안해한다. 힘들어 한다. 그것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찾아야 한다. 의존적이기 보다는 자존적인 사람이 더 질(質) 좋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

  1. 시무룩한 풍경

토요일 저녁이면 꼭 전화를 주는 목사님이 있다. 통화를 하다가 오늘 말씀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부흥집회를 다니다보면 교회마다 큰일을 겪고 있다고 했다. 신앙적 열정도 없고, 믿음도 없으면서, 부흥을 바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감동과 기쁜 마음을 충족시켜보라는 태도로 참석한 사람들이 많다.’ 교회마다 영적인 침체현상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주님의 말씀이 들린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구나.”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시대를 비유하시면서 시장의 시무룩한 풍경을 말씀하셨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체들은 어린 아이들이다. 아마도 아이들은 장터에서 결혼식 놀이, 장례식 놀이 같은 것을 했던 것 같다. 우리식으로 이해하자면 소꿉놀이 같은 것이다. 어떤 놀이를 하자고 제안해도 하나가 되어 놀지 못한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놀려고 고집한다. 아니면 마음이 상하거나 삐쳤을 것이다. 빨리 털어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누가 무엇을 하자고 해도 거기에 따르지 않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주님은 고집불통이 된 아이에게서 당시 시대를 본 것이다. 마치 사사시대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주님의 탄식에서는 조소가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에 실족한 이들을 보면서 마음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심령이 회복되고 용기를 얻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애정이 느껴진다.

 

주님의 시대나 우리의 시대나 다르지 않다. 어떻게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즐겁고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혹시 마음이 무겁고, 상하고, 눌리고, 괴로워 낙심 가운데 있지 않은가? 주님의 위로와 힘주시고 용기 주심에 마음의 기쁨이 살아나고, 신앙적인 열정이 뜨거워지며 힘과 용기를 내시라.

 

 

  1. 히스기야의 열심

오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熱心)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 왕의 뒤를 이어 이십오 세에 왕위에 올랐다. 자녀를 보면 아버지를 알 수 있다. 혹 그의 아버지를 보면서 그 자식들이 어떠할지 짐작하기도 한다.

 

(조현아, 조현민의 갑질)

 

그런데 히스기야는 좀 의외의 인물이다.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의지하고 우상을 섬겼다.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과 유다 구석구석 마다 우상과 산당을 세우고, 분향하며 섬겨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다고 역대기는 평가하고 있다.

아버지의 못된 행동들을 보면서 자랐기에,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는 달랐다. 우상으로 더러워진 성소를 깨끗이 했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가?

 

한국교회에 자본과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들어왔다. 그랬더니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오롯이 전하는데도, 그 말씀이 곧 좌파니 진보니 이념적인 말씀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것이 성경보다 더 성경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형국이다.

예배에 공연문화가 들어왔다. 그러자 예배는 관람이 되었고, 은혜로운 예배는 감동적인 연출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나라와 뜻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의 충만함이 자기 안에 있게 되었다.

 

우상들로 점철됐다는 것이 다른 것이겠는가? 성경 속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더 우위에 놓인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이런 한국교회가 갱신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히스기야는 열심(熱心)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을 깨끗이 하며, 잘못된 종교적인 관행들을 고치며 개혁해나갔다. 개혁도 거창한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것을 찾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굳건한 믿음과 의지를 가지고 실행에 옮겼다는 말이다. 그동안 끊어졌던 절기들을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는 우선순위를 아는 사람이었다. 통치행위 이전에 예배가 우선이었다.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 이전에 기도가 우선인 사람이었다.

보통 어떻게 하기 쉬운가? 인간적인 행사와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예배보다 더 우선적이고 시급한 일로 여긴다. 우선순위가 바뀌는 일을 ‘한 번 쯤이야’하고 가볍게 여기기 쉽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진정성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어떤 상황에도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 것을 통해서 확인된다. 히스기야가 그랬다.

대하30:20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 새롭게 하시고 은혜를 주셨다. 단번에 큰 성과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꾸준한 의지와 노력을 가지고 있는 중에, 어느새 열매를 맺고 결실을 얻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러분, 주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주님 기뻐하실 만한 일에 끈기와 인내로 정진할 수 있기를, 히스기야에게서처럼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바라신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빌립보 교회에 말했다. 그 확신을 가지고 신앙의 인내와 아름다운 결실을 이루시길 바란다.

 

 

  1.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있던 히스기야였지만 위기가 찾아왔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온갖 더러운 말과 조롱의 말로 예루살렘과 히스기야를 농락했다. 아니 사실은 하나님을 농락한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농락하는 것인지에 대한 영적 구분조차 하지 못한다. 영적인 분별력 없이 한숨만 내쉬기 쉽다.

열심(熱心)은 커다란 위기(危機)와 위협(威脅) 앞에 식어지기 쉽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시무룩해지기 쉽다. 어떤 것을 할 마음이 없어지고, 해도 소용없다는 낙심이 찾아온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으며, 애곡해도 울지 않는다.” 기도생활, 말씀생활, 예배, 전도, 구제와 봉사 같은 것들도 모양만 있을 뿐 열정을 잃어버린다.

 

히스기야도 괴로워서 사람들을 이사야에게 보냈다. 중보기도를 요청한 셈이다.

신하들이 히스기야의 말을 이사야에게 전한다.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이것이 낙담에 빠진 히스기야의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 사이에 또다시 앗수르로부터 협박을 받는 전갈을 받았다. 절박한 상황에서 ‘해산할 힘이 없음 같이’ 기도할 힘도 없고, 망국(亡國)에 대한 괴로움뿐이지만, 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

 

히스기야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 말씀의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전하는 사전 내용은, ‘히스기야와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조롱과 협박은 사실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백성의 간구와 기도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 특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소리 들으실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나서실 수밖에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열심(熱心)이라는 것. 하나님의 은혜, 역사하심, 사랑, 긍휼… 이런 것들은 쉬 식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열심(熱心)이 여전히 뜨겁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했다.

 

기억하라. 인간의 열심(熱心)이 식거나 사라진다고 하나님의 열심(熱心)이 식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방관하시거나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하는 백성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분이시다.

 

광야백성 40년간, 하나님의 열심(熱心)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신명기1:31,33,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였느니라/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바람이 뭔지 모르지 않으셨고, 정말 복된 길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이삭의 억울함과 설움을 어떻게 채워줘야 하는 지 궁리하고 계셨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두 민족을 주셨다. 애굽에 팔린 요셉을 안타까워 하셨기에 형통함을 허락하셨고, 심지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한 시도 잊지 않으시고 가장 빛나게 등장할 날을 손 꼽아 기다리셨다. 그리고 버금수레에 태우셨다.

 

하나님의 열심(熱心)으로 말하자면 끝도 없다.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우리의 열심은 무엇인가?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낙담은 무엇이며, 괴로운 일은 무엇인가? 그러나 주님의 열심(熱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을 생각하며 힘과 용기를 내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자. 히스기야처럼 우리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기로 작정하고, 그보다 앞선 하나님의 열심을 사모하자.

 

찬송가 543 : 어려운 일 당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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