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곧 업데이트 예정)

 

 

 

2018년 4월 8일 부활절 2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세상 모든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따스한 햇살 가운데 불어오는 바람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고, 초록으로 덮인 대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계절에, 성령의 바람으로 치유함을 얻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평강과 소망으로 채워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124:7)

 

 

  1. 초등학고 저학년의 문제풀이

초등학교 저학년 국어문제인데 풀어 보라.

 

다음 글에서 틀린 낱말을 바르게 고쳐 쓰시오.

“헤헤, 맡있겠다. 나 혼자 먹어야지.”

 

어느 초등학생의 답이다. 사진

 

정답으로 해줘야 할까, 틀린 것으로 해야 할까, 채점하는 선생님이라면 고민이 될 것 같다. 원칙은 원칙이니까, 오답체크 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적인 정답과 하나님의 정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수 있기를 바란다.

 

 

  1. 필리핀 연수에 관해

 

  1. 하나님의 선발

기드온과 함께 한 300명의 사람들을 어떻게 명명하면 좋을까? 하나님께서 1당 100의 정예의 용사를 선발하신 사건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오합지졸들을 부르셔서 1당 100으로 사용하신 것으로 봐야 할까?

 

그동안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들, 믿음과 용기가 담대한 사람들로 인식해왔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미디안과 싸우러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로 모인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7장 3절을 보면, 이 때 두려워 떠는 자를 돌려보내게 했다. 겁을 먹고 용기가 없어서 벌벌 떠는 사람들은 있으나 마나 할 테니까, 하나님은 그 사람들 없어도 능히 이기게 하실 수 있다. 되돌아간 사람들이 이만 이천 명이었고, 남은 자가 만 명이었다. 약 2/3가 되돌아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직도 많다고 하신다.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 오랫동안 미디안의 손에서 7년 정도 괴롭힘을 당했고, 한 명이 소중한 판국인데, 1만 명도 많다고 하시다니 말이다. 12절을 보면 미디안 진영은 그 수조차 파악이 안 된다. 정탐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이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까지 읽으면, 하나님은 1당 100을 하는 용사들을 찾으시는 것 같다.

 

그런데 300명을 선발하는 과정을 보자. 병사들을 물가로 인도하여 물을 마시게 한다. 무릎을 꿇고 충분히 마시는 자와 개가 물을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마시는 자를 나누게 하신다. 학자들은 어느 쪽이 더 향상된 전투력을 가졌는지 갑론을박한다. 300명이 더 전투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대표적인 근거는 어떤 경우에도 정신을 바짝 차리는 사람들이라는 논리다. 오히려 되돌아간 9,700명이 더 대범한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오히려 물을 핥기 위해서는 엎드릴 수밖에 없는데,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행위가 이미 사주경계나 다름없고, 훈련된 모습일거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논쟁은, 성경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낼 수 없다. 인간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일어나는 논쟁이다.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공로가 있느냐 없느냐 따지기를 좋아하는 습성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입장과 우리의 입장의 차이를 비교해보자. 여러분이라면 300과 9,700 어느 한 쪽을 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나님은 따로 따로 세우라고 하시면서 어느 쪽이라고 처음부터 말씀하지 않으셨다.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택은 300명이었다.

인간의 입장에서 9,700명은 300명에 비해 더 가능성이 높다. 9,700명은 300명에 비해 더 합리적이다. 9,700명이 더 우월함이요, 능력이요, 극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300명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데 더 합당하다. 그래서 7:2, 4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백성이 너무 많은즉’, ‘아직도 많으니’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1당 100의 용사를 뽑으신 것이 아니라, 오합지졸 같은 사람일지라도 뽑으셔서, 1당 100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신다. 물론 그 300명이 정말 겁쟁이에, 용기도 없고, 싸움도 못하는 오합지졸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두려워서 떨거나 싸우기 싫어하는 자는 돌아가라고 했을 때에도 싸우겠다고 남아서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이다.

관건은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와 자랑과 영광을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힘이 없어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고 영광을 드러내고자 사모한다면, 얼마든지 귀하게 들어 쓰신다.

저는 비록 필리핀에 다녀오는 것을 내려놓고 안가게 됐지만, 저를 선발하시기 위해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다른 섭리가 있음을 믿는다.

 

 

  1. 세상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들어 쓰시는가?

기드온과 300명의 전투장면은 굉장히 유명하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미디안의 진영에 가서 직접 염탐을 하게 하신다. 거기서 기드온이 적병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한 병사가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그의 진영(陣營)에 굴러오더니 장막을 무너뜨리는 꿈이었다. 다른 병사가 그 보리떡 한 덩이를 기드온의 칼로 해석을 했다. 그러자 적병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다시 본영(本營)으로 돌아온 기드온이 확신을 갖고 병사를 100명씩 세 대로 나눈다. 그리고 한 손에는 나팔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빈 항아리를 들게 한다. 그 빈 항아리에는 횃불을 감추게 했다. 싸움이 발발하자, 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을 들고 한 손에 든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기드온과 300명의 병사들은 군호를 외치며 소리쳤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마침 꿈의 내용과 해석으로 적영은 끝 모를 두려움으로 분위기가 흉흉했는데, 그 소리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자중지란이 일어나 결국 퇴각한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모든 진영을 그 손에 넘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신대로, 너무나 쉽게 승리했다. 결국 인간적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꿈 때문에 미디안은 지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의 전쟁 방법은 분명 방패다. 세상을 전쟁터로 비유하자면, 명예권력도 쓸만한 무기이다. 요즘은 이렇다고 한다. 부모(아버지)성형비도덕적 양심이라고 한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가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구하며 나갔다는 것을 기억하라. 세상적인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다르다. 하지만 구원과 승리는 하나님의 방법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일까?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이었다.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나팔은 복음이요, 항아리는 교회요, 횃불은 성령으로 해석한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여기서 나팔은 연주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이다. 18절에 “여호와를 위하여 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나팔을 불어서 소리를 낼 줄만 알면 된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서 복음을 말하고 외칠 줄 아는 믿음과 능력을 갖추기를 바라신다.

빈 항아리와 그 속에 담긴 횃불은 무엇인가? 먼저 항아리는 무엇을 담아내고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깨뜨리고 부수어서 감춰 두었던 것을 드러내는 도구이다. 그게 바로 횃불이다.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횃불의 용도는 무엇인가? 방화를 저지르거나 불을 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 횃불을 왼손에 들고 오른 손으로 나팔을 불었다. 그렇다면 횃불의 용도는 나팔을 불어야 할 방향을 인지하기 위한 용도이다. 그리고 캄캄한데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인지하기 위한 도구도 된다.

 

고린도 후서4:6-7은 이렇게 말씀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빈 항아리와 그 속의 횃불은 바로 이런 의미 아닐까?

 

우리가 깨지고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가져야 한다.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들고 있어야 전쟁에 용이한 것처럼, 나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거듭남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내 삶에 횃불처럼 붙들고 서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린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300명의 용사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족하고, 질그릇 같이 깨지기 쉬울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순종을 사모하는 자를 붙들어 귀한 주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복음을 말하며 우리의 빛이요 소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손에 들고 큰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선발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라신다.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