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일 부활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새 생명의 기쁨을 온 인류에게 허락하신 소망의 하나님, 기쁜 부활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염없이 다가오는 유혹의 깃발들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피하느라고 지친 심령들이, 무덤을 깨치고 일어나셨던 주님의 승리를 힘입어 소생하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희망을 한 아름 안겨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한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 예수 부활하셨다.
부활절 아침,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길 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순종과 헌신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부활에 대해 마리아의 목격담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예수님의 시신까지 없어진 줄 알고, 커다란 슬픔으로 울고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자의 슬픔이었지만 그 자리에는 천사가 있었다. 다른 복음서와 조금 다른 점은, 공관복음서에서는 천사가 나타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그리고 먼저 갈릴리로 가서 뵐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묻는다. 자신의 눈물과 슬픔에 관심을 가져주는 존재,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고 계신 마음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공생애 때와 마찬가지로 울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찾아가시는 분이실까? 마리아가 몹시 슬퍼하며 흐느끼고 있을 때, 주님은 “마리아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동산지기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주님이셨다.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은 어떤가? 주님께서 마리아 앞에 분명히 서 계셨지만, 주님인지 알지 못했다.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 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요한복음21을 보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서야, 제자들 가운데 주님이 오셨을 때, 21:12,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증언한다. 학자들은 제3의 몸이라는 용어로 설명을 한다. 주님께서 신비한 몸, 온전한 새 몸을 입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교회 청년 중에 하나가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옛날 사진을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인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중학교 때, 여름방학 끝 무렵에 담임 선생님 댁에 놀러간 적이 있다. 처음엔, 마중 나온 선생님을 몰라봤다. 탈모로 머리카락을 심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따라 댁으로 걸어가면서도 의심이 들 정도였다.
우리는 일평생 여러 가지 얼굴 혹은 몸의 가지고 산다. 방금 전의 모습은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느 한 지점의 가장 좋았던 모습은 생경하게 느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 고통을 당하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주님의 모습은 어떠셨을까? 그리고 부활하신 몸은? 하나님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가 생기를 얻어 큰 군대가 되게 하셨다. 겨우내 메말랐던 나목에서 꽃이 피고 입이 돋는다. 이처럼, 얼마든지 신비한 몸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신다. 우리는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믿어야 한다. 가장 아름답고, 온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를 호명하는 음성을 듣자, 주님인 줄 깨달았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깨닫기를 바란다. 부활하신 주님은 고통으로 울고 있을 때, 슬퍼할 때, 괴로울 때, 그에게 찾아가신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신다. 바로 주님이신 줄 알도록 말이다. 주님의 호명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호명만으로도 마치 에스겔의 대언과 같이 우리의 마른 뼈와 같은 심령에도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생기가 돋고 살아나게 한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을 호명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란다.
- 교회에 찾아오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회에 찾아오셨다. 오늘 말씀은 복음을 듣는 이들에게 그것을 전하려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어있었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일과, 안식 후 첫날 일어난 사건, 여러 가지 것들이 뒤죽박죽이었다. 이런 것들이 뒤섞여 어떤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할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대책을 찾지 못해 부심하고 있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찾아오신 교회는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도마의 이야기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교회에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듣고 의심을 하자, 곧바로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안식 후 8일 째 되는, 그러니까 그 다음 주일에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교회가 주일 마다 모여 예배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교회의 모습을 갖춘 모임은 아니었지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믿음을 더하시고 생기를 불어 성령을 주시며, 교회가 발전하고 성장해갔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30-31참고) 이 사건을 예로 든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교회 공동체의 믿음의 본질을 전하려는 데 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가 하는데 달렸다. 교회의 크기, 규모, 목회자의 능력, 사람들의 세상적인 지위…, 이 같은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도 있지만, 믿지는 않고 세상적인 축복만을 바라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과 상처와 아픔은 무관하게 여기면서, 외면하거나 오히려 배척한다.
교회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주님의 호명하심을 깨닫는데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① 평강을 빌어주셨고, ② 손과 옆구리의 상흔을 보여주셨다. ③ 파송과 함께 ④ 성령의 숨을 불어주셨다.
이 중에서도 주님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은 언제일까? 주님께서 빌어주시는 평강이나 성령을 불어넣어주시는 호흡으로 족했다면, 도마의 의심어린 말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의 상흔(傷痕)을 보면서 바로 그분이 주님이심을 확인했다. 그리고 기뻐했다.
도마는 주님의 못 자국 창 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의심에 대해서 주님은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주님은 창 자국 못 자국에 손을 넣어,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오늘 우리 교회공동체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함께 하심을 우리 모두가 믿기를 바라신다.
- 교회의 부활체험
초대교회가 경험한 부활의 체험은 무엇일까?
1) 타인의 상처와 아픔을 주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으로 여기고 보듬었다. 그래서 요한 1서 3장에 보면, 어떤 형제가 물질적인 어려움에 빠졌다고 가정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너희를 보낸다(21)는 주님의 말씀과도 같은 말씀이다.
(어제 있었던 영어모임에서…. 강사가 그의 눈에 비친 한국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유독 자본과 물질에 집착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여러 가지 나름의 설명이 있었다. 유교적인 영향으로 입신양명에 대한 의식, 한강의 기적으로 급속한 경제성장, 번영의 신학… 나는 이렇게 답했다. 돈 없는 설움이나 그 고통 때문일 것이라고 말이다.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가진 자는 갑(甲)질하기 일쑤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가난이 죄라는 말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한 목사님이 교회 안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털어놨다. 교회 안에서 정말 고통 받는 이들이 보호 받지 못하고 불온하게 여기며, 내몰리는 현실이다. 예를 들어 세월호. 어느 분이 몇 년 째 간암으로 투병 중인데, 최근에 재발해서 또다시 항암치료 중이다. 목사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커서 꾸준히 와주시기를 바랐다. 바쁜 와중에도 놓치지 않고 심방하며 힘을 북돋아주고 있다. 요즘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TV에서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분이 이런 말씀을 했단다. 저 사람들 이제는 지겹다. 왜 저렇게 지겹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런 탄식을 한다. 자기는 암으로 목숨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타인의 생명의 죽음과 아픔,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겹다고 말하는 인식 수준. 목사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의문이 들었다.)
2) 나그네를 영접하고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돕는 일을 주님을 영접하는 일로 여겼다. 그래서 요한3서 1장에서는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를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말씀했다. 히브리서에서도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13:1) 말씀한다.
이렇게 적용해볼 수 있겠다. 교회가 구제와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3) 성령을 받아 사랑을 나누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인가? 자신의 것을 성도들과 나누며,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에 힘썼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식사를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 이런 일들은 사람의 생각이나 이기적인 마음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성령을 받아 사랑으로 나눈 일임을 기억하라.
요한일서4:7-8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을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4) 교회는 사랑으로 용납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을 키워가는 곳이다. 그 믿음의 반석에 굳게 서서 승리의 일체의 비결을 깨달아야 한다. 19절을 보면 주님은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다. 삶의 위기와 위태로움을 맞이하고 휘청거릴 때,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평강이 있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교인들은 서로 믿음을 북돋아주며 서로 중보하며, 주님께서 허용하셨던 것처럼 평강이 깃들기를 바라야 한다.
평강은 단순한 마음의 위로나 치유와 회복차원이 아니다. 믿음으로 담대해지고 사랑으로 용기를 얻으며 더 이상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베드로는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다.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줄 수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자기 능력 밖의 일이라고 포기하거나 외면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바로 서로의 믿음을 북돋우며 평강을 사모하는 일 아닌가? 마치 의심많은 도마에게 믿음의 형제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던 것처럼, 위기를 맞은 교우들이 믿음 위에 서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받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은 부활의 능력을 믿고 굳세기를 바라신다. 마치 도마의 믿음이 본고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 요청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안에서 믿음을 키워간다. 기억하라. 믿음을 키워 가는 일은, 굳건한 개인의 믿음에 대한 의지나 공로가 아니라 사랑의 능력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설령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정죄하지 않고 사랑의 능력과 풍성함이 있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이번 부활절, 우리 교회가 정말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믿음이 약하다면 격려하고 권면하면서 믿음을 도우라.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길 바란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어 있던 이들이 교회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변화의 주인공들이 됐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도 담대하고 용기있게 승리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