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1일, 사순절 제 4주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사순절 넷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남녘땅에 꽃망울이 터진다는 소식이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게 하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만져주심으로 움츠렸던 어깨가 활짝 펴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11)
- 주님의 질문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던 여러 마을을 지나가시면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대화이다. 주님은 사람들이 주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차례대로 물으셨다. 두 물음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지에 대해서는,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 한 사람” 이 표현은 마가복음 6장에서도 나오는 것과 일치한다. 헤롯이 세간(世間)에 들리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
- 세간의 화두
먼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로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그렇게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평화는 로마의 손에 달려 있었다. 정치, 경제, 자유라는 것이 로마가 허용한 범위에서나 가능했다. 그것을 분배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갖가지 사회부조리가 발생했다. 당연히 사회분열과 혼란의 게이지가 상승하고 있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현실적인 타협 속에서, 장로들이 정한 전통이 더 우위를 차지했다. 예를 들면 안식일 법은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나머지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 안식일은 로마의 법과 정치적으로 부딪치거나 대립각을 세울 염려가 덜했고, 마치 그것을 강조함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자주 벌어지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 룰을 깨는 듯한 행동이 달가울 리 없었다.
어떤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시대상황과 동떨어질 수 없다. 특히나 공생애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당시에 사람들이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화두는 무엇인가? 율법갱신과 로마로부터의 구원.
사람들은 누군가를 보면서 어떤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생김이나 외모도 그렇지만, 캐릭터, 역할, 능력 같은 것도 동일시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캐릭터, 역할, 능력이 어떤 사람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로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던 에세네파 출신의 사람이었는데, 율법갱신 운동의 대표주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율법주의자라는 말과는 다르다.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청사진과도 같은 것이다. 그 갱신은 ‘세상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시대적 소명으로 여겨지는 때였다. 주님께서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고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활동을 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쳤다.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촉구했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파 사람까지도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려고 했던 점을 미뤄볼 때, 그는 율법 갱신 운동과 회개운동을 접목시켜 가면서 광야와 같은 시대의 외치는 자의 소리 역할을 했다.
그러나 헤롯에 의해 처형당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과는 전혀 다른 갈릴리 운동(그것은 복음전파)을 전개해 나가셨는데, 헤롯은 예수님을 보면서 세례요한의 환생으로 봤다. 율법갱신과 사회정화운동이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정화하시면서 활동하시는 모습이, 그에게는 그렇게 비춰졌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자격지심을 갖고 자신의 부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비추는 세례요한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몇 주 전에 설교했던 것처럼 제 2의 출애굽과 가나안입성이라는 시대적 아이콘이었다. 엘리사가 후계자가 되기 전에 요단강을 가르고 마른 땅처럼 건넜다. 이것은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의 재현이었다. 다시 한 번, 출애굽한 백성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받기를 기대하는 역사적인 상징자체였다.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적을 일으키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제 2의 엘리야가 되어주길 바랐다.
예수님을 세례 요한으로 생각하든 엘리야로 생각하든, 로마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누군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정치적이거나 영웅적인 메시야에 대한 기대에 대한 반영이 곧 세례요한, 혹은 엘리야이다.
- 교회공동체의 화두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했다. 이 고백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라는 고백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오늘 정말 이런 고백을 여러분 스스로 가졌는 지 점검하고, 이 참 의미를 깨닫고 믿음으로 돌아가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마태복음에는 이 고백 때문에 베드로가 칭찬받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그런 부분은 없다. 오히려 33절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책망만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비밀 같은 것 하나를 말씀해주셨는데, 베드로가 항변했기 때문이다(32). 고백은 하지만 믿음 없는 고백, 진정성 없는 고백에 불과했다는 인상을 준다.
비밀 같은 내용은 무엇일까? 30-31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주님은 왜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일까?
단순히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면서 사회적인 어려움을 겪던 때에서, 더 상황이 악화된 70년 경으로 가보자. 마가복음은 그맘때 쓰여졌다.
70년 유대독립을 위해 로마와 벌인 전쟁. 8년간 지속됐고, 결사항전은 마사다의 절벽 위에서 끝났다. 시카리파와 그 가족들은 전날 밤 집단적으로 자살을 택했다. 이 모습은 너무나 비참해서 말할 수가 없다. 노예가 되느니 죽음을 택했고, 로마인의 손에 죽느니 자살을 택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의 상황은 처참했다. 세상 도처에서 상처와 고통을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신앙공동체 내부의 모습은 어땠을까? 마가는 회의적인 모습을 지켜봤다. 신앙인들의 믿음에 대해 의심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데,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심지어 예수님에 대한 부활신앙 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 것만 같았다. 세상적인 방법을 찾고, 세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었다.
제자들과 마찬가지 모습으로 말이다. 베드로는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고백은 했지만 실상 믿음을 깨닫지는 못했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의 믿음을 꾸짖으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는 어떤가? 교회는 잘 다니지만, 예수를 구주로 삼는가? 예수를 구주로 삼는다고 고백하지만 정말 예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따르며, 특히 부활을 믿는가?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그에게는 고난이 없는가? 그에게는 불행이나 괴로움이 찾아오지 않는가? 위기가 닥치지 않는가?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슬픔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불어온다. 그리고 각자가 믿음으로 담대히 감당해야할 삶의 몫이 있다. 십자가(十字架)가 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 외면할 수 없다.
주님께서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베드로가 깨닫지 못하고 항변했다가 꾸지람을 당했다. 그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인생에서 찾아오는 위기와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눈으로만 생각해서 시험에 들어 원망, 불평할 때, 주님은 동일하게 책망하신다. 주님은 그런 믿음 없음을 꾸짖으신다. 고난도 부활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신다.
전통적으로 이 부분은 ‘수난예고’라는 이름으로 명명해왔다. 주님께서 정말 일러주시고자 했던 방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수난 당하실 예수님에 대한 실망, 좌절, 슬픔? 아니면 주님의 부활 영광을 믿고, 담대히 이겨내고 승리하기를 바라시는 것? 마가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주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다르게 부르고 싶다. “부활의 복음을 예고” 하신 것으로 말이다. 이것이 마가복음 첫 문장, 표제와도 같은 문장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
-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
30절에 보면 주님은 “수난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마치 비밀에 붙이시는 것 같다. 신학적인 논쟁이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내가 목회자로서 보기에는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스가랴4: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 자체가 비밀이다. 은밀하다. 감춰져 있어서 특별한 지혜와 계시를 받은 사람만 아는 비밀, 그런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다는 점에서 은밀하고 비밀인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건축자의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31절의 말씀과 부합되는 말씀아닌가? 그 오묘한 섭리를 누가 알았겠는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나 같은 죄인 살리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다.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또다시 반복한다. 그 증거들은 이미 여러분이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예화까지 들지 않겠다.
1) 믿음은 안 되는 것 같아 보이고 안 되는 것 같아보여도, 되는 역사다.
2) 한 길 이 막히니까 아홉 길이 열린다.
3)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1)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행2:3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2)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된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4) 즐거움을 얻게 된다.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 롬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6)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경험 한다. 고전1:2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7) 귀신이 나온다. 행16:1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8) 치유가 일어난다.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4:10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르믕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마가복음이 요약해주는 내용이 있다.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기억하라. 이러한 고백과 역사들은, 평온할 때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 시대와 인생의 괴롭과 고통 중에, 슬픔과 아픔 속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들이다.
어떤 사람은 내일 당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슬픔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부활 영광을 믿으면서 담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게 복음을 믿는 것이다. 내일 일을 내일 염려하라고 하셨으니까, 오늘을 충분히 복되게 살아내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세상 사람들의 고백이 아니라 고난과 환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참 믿음의 고백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