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4일, 사순절 제 3주, 3.1기념주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열방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 사순절 셋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동장군의 매서운 기세가 언제였나 싶도록, 봄처녀의 싱그러움이 세상에 가득한 때에, 따스한 주님의 품을 그리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온기로 가슴을 채우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
- 자화상
me too 운동, 2006년 미국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Tarana Burke)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온 세계를 뒤덮더니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폭력을 당한 생존자들의 ‘나도 고발한다’는 연대운동. 우리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권위와 지위를 누리며, 성공한 인생이라고 추앙받던 이들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모 시인은 개인적으로 참 좋아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분단이라는 민족적 고난의 문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환을 너무나 생경하게 묘사해서, 통쾌했다.
자화상
일본놈들의 드넓은 논에 가서 / 줄모 심어주고 /
점심 때 주먹밥 한 덩어리 얻어먹었다 /
일본놈보다 더 일본놈인 / 우리 동네 천석꾼 지주네 밭에 가서 /
어머니는 날마다 / 땡볕에 김매주고 돌아왔다 / 등잔불 석유도 없이
일본인들에게 당한 착취보다 더한 착취를 지주들에게 당해야 했던 모순된 시대. 일제식민지라고 하는 민족의 고난에 고통을 더하는 부조리가 바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일본놈들은 주먹밥 한 덩이라도 주었는데, 천석꾼 지주네는 그렇지 못했다. 참 야속하다. ‘소작료로 공출로 빼앗아,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때려치우고, 장사해보겠다고 울음도 없이 고향을 떠났다.’ 한 가정을 몰락하게 했던 비정한 세상, 그 세계 속의 눈물은 바로 눈물 없음이다. 그런데 그도 역시 누군가의 삶을 이처럼 망가뜨린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다.
- 회개의 자화상
그런데 한반도에 1903년부터 시작돼서 1907에 절정을 달한 ‘me too’ 운동을 아는가? 이름을 그렇게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me too 운동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성령세례를 통한 회개운동. 누구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시켜서 강제로 시작된 것도 아니다.
하디 선교사는 연회에 성과가 있는 선교보고를 해야 하는데, 아무런 결실이 없자 참담했을 것이다. 자신의 실패와 무능을 인정하는 선교보고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교회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치리하고 징계하는 것으로 교회의 전통을 세우고 토착교인들의 신앙을 끌어올리려 하였지만 결과는 별로였다. ‘신바람’이 나지 않았고, 선교와 목회사역을 계속해야 하는지, 자괴심과 고뇌가 깊어만 갔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건드리셨다. 회개의 영을 주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서지고 겸손히 낮아지게 하셨다. 서양선교사로서 자기 안에 있던 민족적 우월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술과 능력을 의지한 자만심, 한국인을 미개하고 무식한 민족으로 생각했던 교만 등을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이를 본 여러 한국 사람들과 서양선교사들이 뒤를 이어 자신의 부끄러운 허물과 죄를 고백하고 과거의 삶을 청산하는 일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시에 성령을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셨다. 그리고 하디는 조선인들의 삶의 현실 너머에 있는 아픔과 고통 슬픔에 먼저 주목할 수 있게 됐다.
원산에서 있었던 한 전도집회의 분위기에 대한 기록이다.
“집회 기간 내내 교인들은 앞서 죄를 자백한 사람들의 경우처럼 죄를 공개적을 자백하였다. 자백의 열기가 너무 고조되어 설교를 할 수 없었던 것도 두세 차례나 되었다. 설교가 끝나자마자 교인들은 다투어 일어나서 자기 죄를 자백하였다. 성경본문 어디를 읽든 어떤 말로 설교를 하든지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쪼개놓는 것 같았다.”(이덕주, 로버트 하디 불꽃의 사람, 신앙과 지성, 48)
평양으로 옮겨 붙었다. 애니 베어드 선교사는 이때의 체험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입으로 고백하기 어려운 무섭고 추한 죄악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 놓은 것 같았다.”
세상에 불어 닥친 ‘me too 운동’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me too 운동’은 이렇게 다르다. 전자는 피해자가 떠올리기 싫은 상처와 기억을 가지고 무정한 세상에 어렵게 용기를 내서 부조리가 드러났다. 후자는 굳이 말하자면 피의자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면모를 하나님 앞에서 떨리는 심정, 참담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용기를 내서 부조리가 드러났다. 전자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면서 실망과 낙담을 주지만, 후자는 용서와 회복을 통한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다.
우리가 이점을 분명히 깨닫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심판. 왜 이 세상이 불의하고, 힘없고 가여운 사람들만 왜 피해를 보며 억울함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나님께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물음 앞에 요엘 3:14의 말씀이 들려온다.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지 못한다. 이 땅에서 드러나지 않는 죄는 분명히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난다.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듯 지내는 절기이다. 사순절 셋째 주일, 예수님의 십자가는 회개와 용서의 이정표로 우리 앞에 놓여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와 구원의 길을 걷길 원하신다. 주님 앞에 무엇을 회개할지 떠올려보라. 분명히 한 가지 이상은 부끄럽고 추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회개를 통해 용서하시기를 원하신다.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와 죄를 범치 아니하고 거듭나는 체험이 있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이 사회를 변화시켜가는 능력까지도 갖기를 원하신다.
- 바울의 회개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의 회개를 살펴보자.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뜻깊은 이야기를 했다. 위안부 문제에 가해자인 일본정부가 끝났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전쟁시기에 있었던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는 끝났다는 말로 덮어지지 않는다. 불행한 역사로부터 그것을 기억하고 그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이라고 했다.
같은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회개는 죄를 수시로 용서받기 위한 면죄부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고 용서하시지만, 그 죄를 기억하고, 죄로부터 참존재됨을 배우고,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회개를 평생 짊어지고 살았던 사람이다. 밥먹듯이 죄를 짓고 회개를 반복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서신 곳곳에서 이런 점을 드러낸다.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딤전1:13),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고백하고 있다. 빌립보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할례를 자랑하고 혈통이나 지위와 율법을 자랑했다.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자부심도 자기를 자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열심히 박해했다. 그는 회개를 통해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하나님의 용서는 증거가 사라지거나 없어지듯이 죄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죄의 고통이, 다윗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토로하지 못했을 때, 짓눌렸던 것처럼 짓눌리는 것도 아니다. 자유함이 있는 것이다.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성취욕에 빠져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한 것까지도 회개했던 것을 보인다. 하디가 성과에 집착하다가 조선인들의 삶 너머에 있는 고통은 포착하지 못했던 것처럼 빌립보에서의 바울도 그랬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정신적 장애는 개인의 사건일수도 있지만 사회의 집단적 체험과 기억현상과 연관을 맺을 수도 있다.
이 도시는 엄청난 재앙을 겪었다. 부르투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공화군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바로 이 도시에서. 양편 군인들은 주민들을 마구 동원해서 전투를 보조하게 했고, 뭐든지 징발했다. 주민들은 ‘이편이 됐다가 저편이 됐다가’ 할 수밖에 없었다. 두 공화군 지도자가 자살하는 것으로 전쟁은 종료되었고, 전사자의 수가 무려 2만 명에 육박했다. 이런 혹독한 전쟁의 경험이 치유될 틈도 없이 빌립보는 로마제국의 주요도시의 하나로 빠르게 변모했다. 전쟁과 격변을 겪은 많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처럼,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불확실과 생존,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대중점술의 수요는 높아만 갔다.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를 점술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귀신들린 여자가 몇 날 며칠 바울을 쫓아다니며 괴롭혔을 때,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에게 들러붙은 귀신을 쫓아냈다.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말이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자기 앞에 다가온 사람들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했다. 또한 그녀의 고통 뒤에 가려진 빌립보 사람들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했다. (김진호, 리부팅 바울, 90-93)
예전에는 자기도 모르게 공로를 붙잡기 위해 달려갔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갔다.
회개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새로운 결단의 삶을 주님께서 바라신다.
- 양심전
윤성근이라는 전도사가 있었다. 1903년 하디의 부흥집회에서 ‘성령충만’ 은혜를 받았다. 거기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치스런 죄들을 자백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죄를 없애 달라, 감춰 달라.’ 기도한 것이 아니라, ‘드러내 달라, 기억나게 해 달라.’ 기도했다. 그런 식으로 죄가 생각나면 즉시 회개하고, 남에게 해를 입힌 것이 생각나면 보상하고 갚으면서 ‘회개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에 20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인천주전소에서 일을 했다. 한번은 정한 봉급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다. 경리직원의 실수로 한 달 치가 더 나왔다. 예수 믿기 전이라 ‘웬 횡재냐?’ 하며 받아썼다. 성령을 받고 국가에 돌려줘야 하는 돈이었음을 깨달았다. 20년 전의 일이었고, 주전소도 문을 닫아 없어진 상태였기에, 없던 일로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성령을 받으면서 동시에 회복된 양심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주전소 기능을 흡수한 서울 정동의 탁지부(지금의 재정경제부)에 반환했다. 탁지부관리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저 나랏돈이면 없는 핑계를 내서라도 훔쳐가려는 것이 세상인심인데 어찌 예수교인들은 아니 갚아도 된다는 돈을 갚겠다고 하는가?”
결국 탁지부 관리는 예산항목에 없던 돈을 받으면서 ‘양심전’(良心錢)이라는 영수증을 발급해줬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산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닐까?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해주시니까, 또 죄를 범해도 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것 말이다. 이 시간 결단하라. 예수님을 얻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살기 위해 결단하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주님은 오늘 우리가 죄에서 자유하길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