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8일 사순절 5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사순절 다섯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봄을 재촉하는 단비가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생명의 용솟음을 지원하는 때에,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참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 데살로니가의 상황과 환경

데살로니가교회에 일어났던 일을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고난과 환난 중에서도 믿음을 신실히 지켰던 성도들을 만난다.

사도행전을 보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왔다.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자를 볼모로 잡고, 상당한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중점술, 전쟁의 상처와 아픔으로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많아 성행했다. 즉 이런 현상은 일반적이었다. 바울이 이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함으로, 이런 경제적인 재미를 보던 사람들의 수익이 끊어졌다. 그래서 바울을 모함하여 고통받게 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데살로니가2:2a에서도 이에 대해 증언한다.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하나님은 그를 붙드시고 피할 길을 내셨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와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데살로니가2:2b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데살로니가에 와서는 어땠는가? 바울이 어디를 가든 그를 괴롭힌 것은 대부분 동족 유대인이었다. 사도행전17:4-6절은 이렇게 증언한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니 유대인들이 시기했다. 그리고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매수해서 성을 소란하게 한 뒤에, 바울과 실라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찾지 못하자, 야손과 몇 명의 사람들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관청에게 끌고가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고소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데살로니가는 지중해 국제무역의 대표적인 도시다. 여러 인종들이 만나고 교역의 물품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굉장히 부유하고 살기 좋은 도시였다. 로마가 그렇게 관리, 유지하며 키웠다. 그래서 대부분 전역한 군인들과 엘리트들 중에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이 도시에 살게 했다. 도시의 분위기는 자유롭고 활력이 넘쳤다.

 

바울이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 다인종, 다문화의 도시가 으레 그렇듯이 이런 도시는 사상, 종교, 문화가 교류되고 다양성이 공존한다. 지중해 해상무역에서 기후변화는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잦은 기후의 변화로 생사의 고비를 겪으며 사는 선원들에게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다종교와 그에 따른 수많은 신전들이 세워졌다. 저마다 자기들의 수호신에게 경배를 드렸다. 바울이 이곳에서 전도활동을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곳이었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도전과 기회가 되는 곳이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됐을까? 이 문제 속에는 바울과 교회와 신자들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곳의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폐쇄적이었다. 개종자에 대해서만 조금 관대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좀 달라보였다. ‘테오세비오스’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웠다. ‘테오세비오스’는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 중에서 이스라엘계 회당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일이 있다. 회당에 세워진 비석에 버젓이 40%이상이나 되는 ‘테오세비오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26명의 명단, 그들은 분명히 회당 건립에 기부금을 낸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데살로니가에서 그들의 위치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 대해 굳이 ‘테오세비오스’(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이곳에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해 조금은 개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들은 다문화사회의 분파적인 주변부 인물들로서, 엄격한 유대인들이라기보다는, 보다 온건해 보이는 사람들이다. 표면상으로 보면 말이다. 그런데 왜 바울에 대해서 배척하고 소란을 일으켜 관청에 야손과 몇몇 사람들을 고소하고 박해를 받게 했을까? 또 사회적인 큰 틀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종교, 문화, 사상에 관한 부분인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어떻게 이들을 괴롭히고 핍박할 수 있었을까?

 

설명은 이렇다. 이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다른 곳의 유대인들보다 개방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돈이나 권력을 통해 후견자가 돼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그랬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존중할 만하며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반대로 가난하고 비천하며 정치적 위상도 없는 이방인, 더구나 이스라엘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심지어 반쪽 이스라엘계 사람들, 사마리아인들이나 이두메아인, 갈리리인들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뼛속 깊이 뿌리박힌 순혈주의! 그러니, 저들에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가르치는 바울을 용납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순혈주의에 거슬리는데, 게다가 귀부인들을 비롯해서 많은 헬라인의 무리와 이방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믿음을 고백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을 공격하고 기독교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을까? 종교적으로 자유롭고, 문화적으로도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분위기에서 말이다.

사탄의 공격은 생각보다 치밀하다. 바울과 성도들에 대해서도 그랬다. 종교적인 차원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일단 저잣거리의 불량배들을 포섭하고 소란을 일으켜, 곧 바울과 그 도를 따르는 이들을, 이 도시에서 불온한 사람으로 덧씌웠다. 스스로 왕을 자처했다가 로마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를 다시 왕이라고 추종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쉽게 기소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종북좌파’라는 말로 쉽게 사람을 매도하고 불온하게 여기는 관성이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의 방식이었다.

가뜩이나 이 도시는 앞에서 말한 대로, 로마의 충성심을 경쟁적으로 나타내곤 했던 도시였다. 일본인들이 천황을 생각하듯이 로마황제에 대해 깊은 경외감과 애정을 품고 있는데, 예수를 왕으로 추종하는 자들이라고 덧씌우니, 결과가 어땠겠는가? 당국자들과 로마에 충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실제로 소요를 획책했든 아니든 팩트나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위험한 자로 의심스럽다는 것이 중요했다. 선입견과 편견에 휩싸였다. 그래서 이 일로 일부 동료들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1. 시험을 이기는 데살로니가 교회

바울은 성도들의 도움으로 이미 몸을 피한 상태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안위가 너무나 궁금했다. 피해상황은 어떤가? 박해와 고난 가운데 믿음을 저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복음을 전하는 수고가 헛되게 되고, 교회가 초토화 된 것은 아닐까? 거기서 만난 김아무개, 이아무개, 심지어 귀여운 아이들이며 가족들이 눈에 밟혔다. 당연하다. 자기만 빠져나온 자괴감이 너무나 컸다.

다시 한 번 몰래, 데살로니가에 가려고 했지만, 길이 막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해서 디모데가 잠입했다. 동정을 살피고, 성도들을 위로하며 믿음을 굳게 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3:2-5). 결과는 어땠을까?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은 어땠을까?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 바울이 이렇게 편지한다.

3:7,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오히려 바울이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다.

 

6-8을 보라.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은 바울의 염려와는 달랐다.

 

6절 :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8절 :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믿음으로 굳게 이겨낸 성도들에 대한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능력을 받아

사순절 다섯째 주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지만 넉넉히 이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 중에, 인생의 괴로움과 슬픔 중에 있거나, 핍박과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능히 도우시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유대인들의 함정과 괴롭힘에 시달렸다. 순혈주의를 내세워 사람들을 멸시하면서도, 자기들에게 우호적인 상위계층 사람들에게는 관대했다. 이중적인 사람들의 언사에 상처를 받고, 상종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로부터 괜한 공격을 받는 것은 시련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윗도 이런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토로했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시10:2),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이렇게 말할까? 저항할 만한 아무런 방법도 없었고 힘도 없었다. 오직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십자가뿐이었다. 또 4절에는 이렇게 호소한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했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사상과 언사(言事) 말이다.

 

그러나 바울의 우려와 걱정과는 달리,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넉넉히 믿음으로 상황을 이겨내고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왜인가?

 

가장 먼저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깨달아야 한다. 의원은 병자에게라야 쓸모가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예외 없이 구원하시고자 주님을 보내주셨고, 주님은 그 십자가의 길을 순종으로 걸어가셨다. 그리고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자임을 믿기를 바라신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괴로움과 시련이 많으나 담대히 이기고 승리할 힘을 예수 안에서 부어주신다.

 

당연히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예수 안에서 그것을 경험했음이 분명하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우리가 본받고 배울점은 이점이다. 3장 4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약 3주 정도 있으면서 이런 것을 가르쳤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환난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예수를 믿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믿음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예수 믿으면 환난과 고난이 따른다면 누가 예수를 믿겠는가? 누구나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원한다. 그렇기에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오히려 당시 데살로니가에 다종교가 만연했는데, 수많은 기복적인 수호신을 더 믿게 될 것 아닌가?

믿음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은 이런 것이다. 환난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믿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환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난 없는 인생, 괴로움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는가?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 말 뜻 너머에 있는 체험을 생각해보자. 환난과 시련이 있지만 도우시고 역사하시고 능력주시는 주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참 성도들, 믿음의 사람들은 어려울수록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히 만나고 체험한다. 환난과 고통 가운데 능력과 강함 되시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체험한다. 세상이 깨닫지 못하는 은혜와 평강을 경험하게 되고 기쁨과 즐거움을 동시에 얻는다.

그러니까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 말 자체로만은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8절에서 바울이 ‘이제는 살리라.’라고 말한다. 이제는 안심이 된다는 말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는가? 바울이 염려하고 우려했던 것들과는 달리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 안에 있고, 주님 안에 있다. 그리고 그 능력과 권세와 역사와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사순절 5주,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확신과 믿음과 체험이 있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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