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5일, 사순절 제 2주
피난처요 힘이시며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사랑의 하나님, 사순절 둘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암담했던 시절에 분연히 일어나 나라의 독립을 외쳤던 조상들의 열기가 초봄의 훈풍을 타고 귓전에 들리는 때에, 공의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저희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과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이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차될 것이 기록되었ㄷ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6-48)
선택의 기로
평창 동계 올림픽,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반도 평화, GM의 군산공장 철수를 둘러싼 일자리 문제, me too 운동 ; 여기서 거대한 영적인 싸움을 본다. 구주를 믿는 신실한 크리스천인가? 세상의 하수인은 아닌가? 선택의 기로에서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짐승의 등장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온다. 리워야단. 페니키아 신화에서는 ‘리탄’으로 불리는데, 사나운 바다 괴물을 말한다. 열 개의 뿔이 있고, 머리가 일곱 개다. 그 이미지는 표범 같고 발은 곰의 발 같고, 입은 사자의 입 같다. 가장 포학한 모습이다.
용이 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용에게도 경배를 하고 이 짐승에게도 경배를 한다.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참람한 것은 그가 하는 말마다 신성을 모독하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깨닫지 못한다. 이 짐승에 대해 과장된 생각한다(v.5). ‘짐승이 과장됐다’는 말씀은, 권력의 우상화 과정에 사람들의 공조(供造) 내지는 동조(同調)가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어떤 하수인이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말한다. 대적할만한 존재가 없고, 그럴만한 엄두를 내지도 못한다. 방조(傍助)한 결과일까? 그러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굴절되기 시작했다. 그 말을 수긍하기까지 한다. 그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고 추앙하며 숭상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권세를 위임받은 짐승은 그의 법이나 통치 앞에 사람들을 굴복하게 만들었고(7), 그가 만든 화려한 우상에 굴복하게 하여, 경배하지 않으면 목에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 몇 명이 됐든지 다 죽이게 했다.
사도요한이 본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미래의 세계에 사탄과 SF영화와 같은 전투를 치르게 될 환상과 계시일까? 다가올 종말의 때에 불어 닥치거나, 아직은 우리와 거리가 먼 비현실적인 환상일까? 주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보여준 것은 우리의 현실 세계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니다.
9절과 18절을 보자.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요한에게 구체적인 장황한 설명이나 근거나 증거로도 부족하다. 현실 속에 벌어지고 있는 일의 실체가 말이다.
또 18절에는 666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힌트를 제시하고 있다. 어렸을 때, 666은 영적인 비밀이 감춰진 숫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이단이나 사이비 교주들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을 한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영혼을 도둑질한다. 그러나 666이라는 숫자는 그야말로 현실적인 암호 같은 숫자이다. YS, DJ, 2mb라고 말하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른 짐작을 하는 것처럼, 모든 문자에 숫자를 붙였던 당대 사람들은 이 의미를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13절에서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수’라고 말하고 있다.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던 시대다. 불온하게 여겼다. 가장 유력한 인물로 거론되는 사람은 ‘네로 황제’다. 그의 이름을 총합하면 666이 된다.
그렇다고 한 시대에만 귀속된다고 할 수 있는가? 도미티아누스 때는 어땠는지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가장 극심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도미티아누스를 죽은 네로의 환생이나 귀환으로 생각했다. 그때의 악몽 같은 박해를 생각하며 몸서리쳐진다. 10절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이 말씀을 마음속에 명토 박아 순교의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박해를 견뎌냈다.
그러니까 666과 적그리스도는 특정한 한 인물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시대마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거스르는 존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역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끝까지 사랑하여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일은 과거의 일이나 장래의 일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면 누구나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지혜롭고 총명하게 시대를 분별하며 고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9절과 18절, ‘들을지어다.’, ‘세어 보라.’(헤아려 보아라) 이 짧은 메시지가 쩌렁쩌렁 심령에 울린다.
어린양에 대한 모방
세례요한이 본 모습은 무엇일까? 주님의 보좌와 권세와 능력을 흉내내는 짐승의 모습이다. 짐승의 뿔은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다. 뿔 마다 열 왕관이 있다. 그 이미지는 표범, 곰, 사자 같다. 인자에 대한 모습은 어떤가? 1:13-15,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었다. 머리와 털은 포근한 양털 같다. 눈은 불꽃 같으며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으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다. 그 입에서 미혹과 거짓과 비방의 말이 쏟아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2:18에서도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발은 빛난 주석 같다고 묘사한다. 5:6을 보자.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인자를 모방하려고 하나 짝퉁에 불과하다.
처지도 비교해보자. 5:6, “인자는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하지만 그분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시다. 13:3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부활의 주님을 모방한 극적인 이야기를 창작하여 그리스도의 행세를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감성을 자극하는 광고와 이미지를 배포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대적하는 활동을 펼친다.
권세와 능력을 부여받는 모습을 비교해보자. 5:7,12에는 하나님이 그의 권세를 어린 양에게 넘겨준다. 13:2에는 용이 자기의 권력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넘겨준다. 5:9에는 어린양이 그의 피로 모든 종족, 언어, 민족들을 속량한다. 그런데 3:7에서 용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모든 종족과 백성, 방언과 민족들을 지배하는 권세를 준다. 5:13, 하늘에 거하는 자들과 땅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린양을 경배한다. 반면 13:4, 두 번째 짐승이 하수인들을 시켜 인간들로 하여금 첫 째 짐승을 숭배하게 한다.
이처럼 분명 4장과 5장에서 주의 보좌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일을 모방하여 대적행위를 하는 사탄의 실체를 봤다.
우상화와 신성모독
짐승이 스스로를 신으로 과장하고 우상이 되어, 신성을 모독하며 하나님을 비방하는 말들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 나치의 만행을 생각해보자. 히틀러가 유대인들에 대한 독일인들의 공분(公憤)을 악용하여, 총통이라는 지위를 얻고 거의 신격화 된다. 그리고 600만 명의 대량학살이라는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의 존엄성을 이렇게 짓밟았다.
그 전에 독일인들 중에서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 정신병자들, 쓸모없다고 손꼽힌 사람들을 가스시설에서 일산화탄소를 주입하여 살해했다. 그때 사용한 말이 ‘살인’이라는 말 대신 ‘안락사제공’이었다. 워낙 위세가 높다보니, 그것을 잘못됐다 말하는 대신에, 정말 사람들의 정신은, ‘저렇게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무엇인가?!’ 의식을 갖게 됐고, 안락하게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그에 대한 복지라고 여겼다. 그 무고한 생명의 ‘죽임’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몇몇 용기 있는 성직자들의 저항 때문에 이 일은 중단됐다. 그러나 그 광기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 옮겨 붙었다. ‘최종해결책’ 가스실에서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은 살해가 아니라 ‘복잡한 유대인놈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종적인 방책일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함을 이토록 경멸하고 능멸하는 것이야 말로 신성모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점은 우리 일상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각종 갑질, 우월의식, 차별의식, 인격모독 교만 등등
예전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에 한 말도 생각났다. ‘미국의 대통령이 하겠다고 일단 말을 하면 그러게 하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 낫다.’ 얼마나 교만한 말인가? 겸손히 몸과 마음을 낮추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신상에 낫다.’라고 협박하거나 윽박지르거나 그렇지 않을 때에는 불이익을 주고, 보복하는 것도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결단
여러분은 어떤 권세를 받으려고 하는가? 어떤 보좌를 사모하며 경배하는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실한 크리스천인가? 아니면 세상의 하수인으로 살아가기를 여전히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의 권세를 따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 권세에 쉽게 동화된다. 이와 대조적인 사람들이 있다. 주의 보좌에 찬양과 경배를 올리던 24장로들이다. 그들은 사도들이나 특정한 이들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마치 144,000명이 정확한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구원의 완전수이다. 12지파, 12,000명을 곱하면 144,000이 된다. 우리가 많다는 표현으로 수천수만명이라고 표현하듯이, 이 역시 셀 수 없이 많은 뭇백성들을 뜻한다. 이런 맥락으로 24명의 장로들은 특정한 24명의 리스트로 본다면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를 축소하는 것이다. 세상의 권세와 자랑과 위협과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성도들이, 주의 보좌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을 바라보며 그 보좌 앞에 엎드리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중에, 그 열악하고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나 인간다움을 놓지 않고 마음의 기쁨과 평강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있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 있다. 반대로 행복의 조건과 여건을 가졌어도, 불행에 빠지고 슬픔에 젖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 때문인가? 세상의 권세와 능력의 사나운 욕심이라는 짐승에 붙들려 좇아가려고 하다가 자유함과 참 권세와 능력 마저 빼앗기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간 결단하라. 세상의 하수인이 아니라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겸손히 섬기며 주님의 보좌를 사모하는 성도로 거듭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시대를 분별하여 이런 믿음과 승리의 청사진을 제공하는 것이다.
꾀꼬리가 하나님께 가서 불평을 했다. 개구리의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자기의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노래를 계속 하려므나,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욱 시끄럽잖니!”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와 믿음으로 혼탁한 세상 속에 참 신앙을 지키며 희망과 평화의 노래를 부르기를 바라신다. 이 노래를 주님께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