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1일 주현절 후 마지막 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겨울 가뭄으로 인해 메마른 대지를 적셔 줄 단비를 기다리는 때에, 은혜의 단비를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사모하는 영혼에 주어지는 놀라우신 은혜가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9:22)
- 평창동계올림픽이 개막됨에 따라, 동계올림픽은 아니지만, 1924년 제 8회 런던올림픽의 실화를 담아 만든 불의 전차 한 대목을 보자. 두 선수 에릭 리델, 해럴드 에이브럼스의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 그 중 에릭에 관한 장면이다.
- 오늘의 말씀은 엘리야의 승천사건과 엘리사가 그의 후계자가 되는 사건을 전하고 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를 거둬 가실 것을 알았다.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회오리바람은 전통적인 하나님 임재를 의미하는 말이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수행하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제자에게 부담이나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고, “여기 머물라.”(2)고 한다. 엘리사의 대답은 무엇인가?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 스승의 마지막을 지키려는 의리였을까? 당연한 도리였을까? 그것치고는 비장하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런 표현은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빙빙 도는 것 같은 여행이다. 처음에는 길갈에서 벧엘로, 그리고 벧엘에서 여리고로, 다시 여리고에서 요단강으로 장소를 옮겨간다. 그때마다 이런 식의 말을 세 번이나 주고받는다(4, 6).
또 반복되는 것이 있다.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강에서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묻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엘리야를 데려가실 것을 알고 있는 지 묻는다. 엘리사는 ‘알고 있으니 잠잠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요단강에 도착해서, 엘리야가 겉옷을 말아가지고 물을 치니 강물이 이리 저리 갈라졌다. 그리고 둘은 빠르게 강을 건넜다.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주기를 원하는지 엘리사에게 묻는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구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엘리야에게 구했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했다는 것을 전해준다.
- 전통적으로 오늘의 말씀은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의 승천사건”과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엘리사”에 대한 내용으로 이해해왔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치곤 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엘리사에 대한 시험”부분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했을 때, 엘리야의 대답은 무엇인가? 엘리야는 “어려운 일을 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사건을 보게 되면 그 일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곧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더니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붙들려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사는 생생하게 목격했다.
엘리야가 ‘어려운 일을 구한다.’고 말했는데, 뭐가 어렵다는 것일까? 성령이 갑절이 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얻기를 구함으로 그가 감당해야할 사명이 어렵다는 것일까? 쉽게 생각하면 성령이 갑절이나 임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대목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갑절의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시험과제 내지는 조건은 하나님께서 회오리바람으로 데려가시는 것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었다. 엘리사는 똑똑히 지켜봤다. 그렇다면 멀리서나마 함께 지켜보고 있던 선지자의 생도 50명은 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들도 똑같은 장면을 지켜봤기에 혹 어느 골짜기에 떨어져 있을지 모르는 시신을 찾으러 가겠다고 말한다.
- 그렇다면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왜 어려운 것을 구한다고 말한 것일까? 그리고 엘리사는 왜 그 어려운 것을 사모하며 구했을까?
엘리야가 겉옷을 말아가지고 한 행동에 주목해본다. 요단강물을 쳤을 때, 물이 갈라졌다. 그리고 마른 땅 위로 건넜다. 이 장소와 행위에 큰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시기 위해 이곳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있다. 요단강은 출애굽에서부터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입성에 이르기까지, 그 온 여정의 마침표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널 때,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발을 내딛자, 큰 강물이 흐르던 물줄기가 그치고, 마른 땅처럼 건넜다.(수3:17) 홍해를 건널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마치 새로운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이라는 새시대의 목표와 과제가 시작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여주시고자, 빙빙 도는 여행을 통해 바로 이곳에 엘리야를 세우셨다. 그리고 이곳을 엘리야를 들어올릴 장소로 택하셨다. 마치 모세를 이곳 근처에서 들어올리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겉옷을 말아 물을 친 행동은 담대한 믿음으로 물을 갈라야 했던, 이스라엘의 잠든 신앙을 깨우는 채찍질과도 같았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병이 나을 수 있는지 묻는다.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간 것인가?! 그마 만큼 오므리 왕조를 지나고 비선실세였던 이세벨의 국정농단에 오랫동안 놀아나면서 이스라엘에는 뼛속 깊이 우상과 세속적인 것과 거짓과 가짜들이 곳곳에 침투해있었다. 어용신학자들이나 바알의 우상을 신학화하는 거짓 선지자들로 몸살을 앓았다.
엘리사는 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구했다고 생각하는가? 엘리야의 능력과 모습이 부러웠을까?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일들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될 때,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살고 있었다. 자칭 큰 자라 말하며 사람들의 심령을 도둑질하고 있었다. 성령의 역사와 권능을 보면서, 사심이 생겼다. 그리고 돈을 주고 사려고 했다. 그 마음이 바르지 않았다. 마치 이와 같은 능력을 바라고 구해서는 안 된다.
엘리야는 왜 엘리사에게 어려운 것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을까? 성경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자. “성령이 하시는 역사” ‘성령’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칫 인간적인 눈으로 비치는 마법이나 기적 혹은 이적을 일으킬 만한 권세와 능력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가 정확히 구한 것은 무엇인가? “성령이 하시는 역사(役事)” 였다. 이 말은 자기 뜻과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능력이 아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에 자신을 내 맡긴 사람에게 합당한 말이다. 엘리사가 선지생도들과 달랐던 점이 바로 이점이다. 선지생도들은 어찌보면 어려운 일들과는 무관한 상태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민족의 구원을 사모했다.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나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순종한다. 물론 교회를 왔다갔다하며 편하게 신앙생활할 수도 있다. 자기 잘 먹고 잘 사는 게 미덕인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얼마나 미련해 보이는가?! 때로는 십자가를 붙들고 울어야 할 때도 있다. 십자가 못자국, 창자국과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참고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후계 이야기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새로운 출애굽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중단되거나 철회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사의 영원한 이정표이자 방점이다.
주님은 아들이 아버지께 구할 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처럼,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덧붙는 메시지가 있다. 주님의 뜻으로 구할 때! 성령이 하시는 역사를 사모하며 동참하기로 결단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임하신다.
엘리야, 엘리사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 이스라엘에게 홍해와 요단강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의미했다. 그 바다와 강을 건너며 그들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엘리야는 요단강의 깊음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간다. 엘리사는 ‘성령이 하시는 역사’ 즉 구원사건의 재현을 바라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새로워지고 회복되길 바라신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이 거듭나고 구원받길 바라신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서 구원사건의 재현을 사모하는가? 자기 자신이 먼저 새롭고, 자신을 성령에 맡겨 순종하기로 결단하는가? 가정이 구원받고, 그중에 믿지 않는 가족이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복되기를 바라는 역사에 쓰임받기를 사모하는가?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하늘로 올려졌다. 엘리사와 50인의 선지자들을 그것을 지켜봤다. 다른 점이 있다. 무엇일까? 50인의 생도들은 회오리바람에 올려진 엘리야였다. 그래서 그가 어느 골짜기에 떨어졌을지 모르니 찾으러 가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본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임하시는 불말과 불병거였다. 성령이 하시는 역사였다. 단연 엘리사는 엘리야의 계승자였다.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포위했을 때, 게하시 사환이 이제 포위되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몹시 불안해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 엘리사가 그를 위해 기도한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 청년의 눈이 열리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었다. 성령이 하신 일에 순종으로 자기를 내맡긴 사람의 믿음의 눈은 이와 같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불말과 불병거처럼 온통 사방에 가득하여 함께 하심을 담대히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고백했다.
에릭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불의 전차가 되었던 것처럼, 불말과 불병거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라. 불의 전차가 되어 여러분의 삶 속에 주신 사명을 생각하며 능력과 권세 힘입어 달려갈 수 있는 오늘 그 믿음의 눈이 여러분에게 열리시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