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4일 주현절 후 5주, 입춘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입춘에 접어들었지만 매서운 추위가 여전한 때에, 포근한 주님의 품 안에서 새소망과 따뜻한 은혜를 얻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위로부터 내리시는 은혜와 평강이 저희 모두에게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모범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그들의 우상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시106:36)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106:47)

 

 

  1. 입춘

오늘, 입춘을 맞아 녹색을 몸에 담고 오기로 했다. 아내는 하늘색과 녹색을 좋아한다. 그런 아 내가 정작 녹색으로 된 의상이나 액세서리가 없다길래, 내가 물었다. 당신 가슴에는 녹색이 있는거냐고? 오늘 녹색과 관련된 의상을 입거나 착용하고 왔다. 우리 안에 녹색이 상징하는 푸름이 있는가? 오늘 입춘을 맞아 기쁜 소망이 푸르게 솟아나길 빈다.

 

  1. 신명기 사가가 본 사울

사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오늘 말씀을 위해, 사울에 대한 역대기사가(歷代記史家)의 재평가를 먼저 생각해보려고 한다.

신명기사가(申命記史家)의 평가는 이렇다. 하나님께서 그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버리셨다. 그는 사무엘이 오기도 전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제사를 먼저 드렸고, 하나님의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을 취했다. 이는 하나님을 자기 영광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시도였다. 그리고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욕심에 사로잡혔다.

삼상15:11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셨고, 16장 1절에서는 “이미 내가 그를 버렸다.”고 선언하신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돼서 성전을 지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다윗에게는 빼앗지 않고 그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사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갈멜에 자기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결국은 길보아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불순종에 대한 응징은 이처럼 철저하다. 이미 신명기에서는 불순종에 대해 엄히 경고했다. 신명기28장에서,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20), “네 생명이 위험에 처하고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65) 말씀한다. 물론 순종의 복은,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광야를 걷던 때의 척박함보다 더 척박하고 고난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길은 큰 복과 은혜가 보상으로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가? 자기 기념비를 세워 자기 만족감을 키워볼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일시적인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자기 기념비를 세우면서 내내 불안과 염려와 걱정에 시달려야 했다.

대신에 사울이 하나님을 찾고 묻고, 의지해도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삼하28:6).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는 블레셋이라는 적국이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버림을 당한 그는 블레셋 군대를 보고 싸워보지도 않았는데도 두려워서 마음이 크게 떨렸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의 심령은 이렇다. 막연한 두려움, 불안, 염려 같은 것들에 노예처럼 사로잡혀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자기 우상을 가진 사람의 심령에게 이런 병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영적인 목마름을 반증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영적인 목마름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점쟁이를 찾아간 것이다. 거기서 사무엘을 불러올렸다. 사무엘의 혼이 신접한 여인에게 나타났다. 사울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벌벌 떨었다.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거짓된 술법에 불과하다. 정말 사무엘의 귀신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주 악신에 들곤 했던 병약한 심령에 나타난 병증이다. 신명기사가도 이것을 ‘신접한 술법’(28:8)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명기법은 이것을 강하게 금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술법에 빠지면 모든 게 그렇게 이해되고,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미혹당하고, 강도당한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불순종의 아들 사울을 버리셨다.” 이것이 사울에 대한 신명기기자의 결론이다.

 

  1. 역대기 사가가 본 사울

역대기 사가는 사울을 재평가 하고 있다.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 새롭게 조명됐을 것이다. 그 평가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을 버렸다. 하나님을 외면했고, 마음에 두기 싫어했다.

역대상10:13-14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말은 신명기사가의 평가와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여호와께 범죄’라는 것은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영의 미혹됨이다. 하나님을 신실히 믿지 못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못한다. 하나님이 계실 마음의 자리에 인간적인 생각, 이기적인 생각, 우상과 욕심이 자리한다.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라는 구절에 주목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접한 자의 술법에 더 마음이 끌리고 있다. 사람들이 영적인 갈급함이 있으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현존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무당, 점쟁이, 신접한 자들이 하는 말에는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면, 얼마나 모순된 존재란 말인가?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을 대신할 다른 것에 마음이 쏠린다. 예를 들면, 현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의 뜻을 물어, 마음에 그 은혜를 두는 것과는 별개로 온갖 전문가들, 성공을 자처하는 사람들, 자기의 출세를 상품화하는 사람들을 좇아다닌다. 심리상담가, 법전문가, 제테크전문가, 투자의 신, 공부의 신 등등 하나님이 아닌 것과 신접하려고 든다.

영적으로 같은 현상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랑 속에 계획과 섭리는 무엇일지 숙고하지 못하고, 눈으로 보기에 더 확실하고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찾아 나선다. 심지어 무당과 점쟁이의 말, 오늘의 운수와 사주 같은 것들에 더 마음이 사로잡히고, 아니 도둑질 당하는 경우도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1. 새로운 조명

역대기사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조망하며 재평가했다는 내막은 이렇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굴비구름 엮이듯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다는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나님 계신 곳이 불에 타다니, 정말 하나님께서 홀로 하나님이신 분이 맞나?!”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상처와 슬픔과 아픔에 깊이 잠겼다. 태어날 때부터 사울과 다윗의 신앙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학습 받고 배워왔다. 출애굽의 이야기와 광야생활,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던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어왔던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아니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의 모습이 바로 자기들의 모습이고, 사울의 모습이 바로 자기들의 모습이 아닌가? 수많은 우상을 섬기고 감동을 주는 이방종교의 화려한 수식(修飾)과 장식(粧飾)에 신접하려고 했던 이가 누구인가? 사울인가? 어리석었던 조상들인가? 바로 자신들, 바로 자기 자신 아닌가?! 그랬다. 바로 자기들이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나님을 버려왔다.

이런 회개와 함께 찾아온 깨달음이 있다.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계신 분이 아니시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셨다. 바벨론의 웅장한 신상과 우상들이 있지만, 그것은 사람이 깎아 만든 조각에 불과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성전은 없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는 어디든 하나님 계신 곳이었다.

사울의 이야기를 재해석했던 포로기 이후 세대가 주려는 교훈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하는 것이 우상과 그 미혹됨에서 자신의 심령과 믿음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역대기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보다 더 정성을 들여 거룩하고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예컨대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나 요시아를 보라. 예배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지켜낸 이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은총 역시 더욱 크셨다. 다윗과 솔로몬을 향한 복과 은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히스기야는 예배를 통해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했다.”(대하31:21)고 증거하고 있다.

유다왕 므낫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방의 가증한 것을 본받아 따른 왕이었다. 신명기사가가 쓴 열왕기에서 므낫세는 악한 왕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하33에서는 그의 말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 바벨론에 끌려갔다. 그러나 그가 환난을 당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졌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심령으로 기도했다. 대하33:13말씀을 직접 들어보자.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아무리 실패한 인생말년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찾는 데는 실패함이 없다. 로마서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신명기 사가의 입장에서 본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어리석음으로 답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역대기 사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적인 목마름인지 조차 모르고 길을 잃어 어리석은 길로 달려갔던 가련함은 아닌지, 우리 실존의 모습을 비추어 가늠해본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으면서 표상적인 무당이나 우상을 따르지 않을 뿐이지, 세상적인 것들을 따른다면 사실은 사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잘 믿어, 하나님 기뻐하시는 영적인 길을 걷는다면, 길을 잃은 영혼들의 등대가 될 수 있을 것 아닌가?

 

  1. 다시 움틀 소망

지금까지 선포한 말씀이 오늘의 말씀과 무관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서 있기를 결단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보자. (한 목소리로 읽음)

 

하나님을 진실무망(眞實無望)함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자기 안에 하나님이 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우상과 거짓과 탐욕이 자리하고, 신접한 자를 찾는 미혹된 마음이 자기 안에 도사리게 된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홀로 하나님 되시길 원하신다.

 

그러기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 속에서 찾으라.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주님 말씀하셨다. 푸념처럼 들리는가? 단지 거처나 장막이 없다는 말씀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달리생각하면 예수님 계신 어느 곳이든 예배하는 자리였고, 하나님의 은총을 불러들이는 순간이었다. 그러기에 푸념섞인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삶 속에 불러들이는 소망 섞인 음성으로 들려온다.

 

바벨론포로기를 겪을 때의 찬양이 떠오른다.

 

여호와이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3:22-23)

 

가장 좋을 때 부른 노래가 아니라, 멸망과 절망의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바라며 믿음으로 불렀던 노래. 비참하다면 비참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성심을 다해 불러야 할 노래 아닌가! 권력자도 두려워하게 만드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후배 목사가 외딴 섬에 목회를 나갔다. 척박한 곳에서 망막했다. 생계도 생계이거니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본다는 것,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본다는 것은 두려움과 염려가 앞선다.

오랫동안 고심 끝에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빵을 굽기로 했다. 그리고 섬 주민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그 힘과 도전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왔을까?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하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셨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소망과 기쁨이 샘솟았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렵고 힘들지만, 삶이 빈궁하고 버겁게 느낄 때가 있지만, 주님을 의지하면서 힘을 내려고 믿음을 갖고 의지를 다지는 이를 주님께서 반드시 도우신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오늘 입춘을 맞아 녹색을 착용했다. 우리도 모르는 어딘가에서부터 움틀 소망과 새생명을 생각하며, 이제부터 봄을 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진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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