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8일, 주현절 후 4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혹한의 추위로 온 몸을 움츠리고 화재소식의 안타까움으로 우리의 마음까지도 타들어간 때에, 주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마음은 녹아지고, 심령은 위로를 받으며, 주님께로 향하는 열정이 있기를 원하며, 주님의 은혜가 힘과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의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11:30)
- 주님과의 만남
김일태라는 시인([낯선 별의, 바깥]. 시학. 49)은 “손을 닦다 문득”이라는 시에서 세상사는 일이 손등 같은 것 아니냐고 말한다. 손바닥에는 금 진 시간들, 손꼽아 기다리던 흔적들, 사랑과 아픔이란 이름으로 패인 수많은 이랑과 고랑이 있지만 덤덤히 덮고 살아간다. 그래서 손등 같은 것 아니냐고 말한다. 저마다 다 사연이 있지만 그것을 모두 내보일 수는 없다. 감추고 살기도 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손등으로 악수를 하고, 만남을 갖고, 일을 하지는 않는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어떻게 잡으실지 생각하라.
- 예수께 집중된 이목(耳目)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들어가셨다. 안식일이었고, 회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와 집회와 배움을 목적으로 모였다.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들이 도맡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그 가르침에 사람들의 이목(耳目)이 집중됐다. 22절에서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았다는 것은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다운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서기관들이 모르는 말씀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것일까?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집중하게 만들었다는 것일까?
서기관들의 말과 가르침은 알기는 알아도 잘 행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강요하는 것들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마23:2-3) 말씀하시면서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셨다(막12:39)
그렇다면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은 어땠다는 것일까?
- 귀신들린 사람
성경은 마침 일어난 일을 전해주고 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영이 더러운 사람”이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군대귀신 들린 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괴롭혔다. 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어도 깨뜨리고 끊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무덤 곁에 격리시켰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격리되지 않았다. 이것으로 봐서, ‘영이 더러운 사람’의 상태를 짐작해볼 수 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귀신같은 존재의 아우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 ‘귀신들린 사람’은 겉으로 보면 멀쩡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 점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영이 더럽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은 곳곳에서 이와 같은 상태를 ‘은에 낀 찌꺼기’로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전하는 말이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내버린 은’ 취급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은 찌꺼기처럼 버릴 것이라는 말이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찌꺼기가 되었나니, 은의 찌꺼기로다.” 전하고 있다.
우상을 섬기게 되고 그 가증스러운 것이 자신을 지배한다. 정작 본인은 지배당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와 같은 실존에 대해,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졌다고 역설하고 있다.
영을 더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다(마15:11).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15:18)
바울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많은 것들을 열거했다.
그렇다면 귀신들린 사람에게 일어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 예수님을 만난 영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다. 영이 더러워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일까? ① 주님과, 혹은 주님에 대한 것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을 수가 없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의심이 들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마음이 든다. ② 인간적인 생각으로 앞서고, 결과를 스스로 단정 짓는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상에 불과한 것을 의지하려고 하고, 자기 능력의 한계로 하려고 그 밖의 것을 하려고 한다. ③ 마음이 우둔해진다. 둔감해진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즉 경외심이 없어진다.
가장 불행한 것은 ④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 수가 없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인을 보라. 그의 영이 분함으로 가득했고, 낯이 변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사울은 우림으로 둠밈으로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자, 영매를 찾아갈 정도였다. 영적인 감흥이 전혀 없고,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영적으로 캄캄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다. 버려진 은찌꺼기 신세가 된다. 율법은 이것을 가르쳤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강조해서 매일 경고의 나팔을 불었다.
그런데 왜 이상하다고 하는지 알겠는가? 그가 예수를 알아보았다는 것 때문이다. 영적으로 우둔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가장 모를 것 같은 이가, 하나님의 사랑과 거리가 멀어져서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 가장 먼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먼저 알아보았다.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안다고 소리지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겉으로 멀쩡하고, 경건의 모양과 내용까지도 있는 자 아닌가? 신앙의 공로와 연수를 자랑하고, 나는 이만큼 믿었으니, 이제 갓 믿음을 가진 사람보다 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마음이 더러운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마음이 깨끗한 자라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거기까지는 좋은데, 나 스스로 마음이 깨끗하고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20대, 창원에서 목회하던 어느 날 썼던 일기가 생각났다.
“예수의 맑은 영이 내 영혼에 닿자, 내 안에 수많은 악마적인 속성과 귀신, 타락과 거짓과 더러움과 추한 것들이 있는 줄 알았다.”
계란 장수의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와 동네 아이들 떠드는 소리 보다, 나의 내면이 더 시끄러움을 발견한 그날 말이다.
이 시간 주님은 우리의 손등만을 잡으시는 거나 감싸시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통해 손 전체를 감싸고 붙들기를 바라신다.
기억하라. 주님을 만난 사람은 더러운 영에 자신을 내주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자비를 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용서와 사함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를 온전케 하신다. 22절에서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함일러라.” 말씀하고 있고, 27절에서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다시 한 번 반복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 주님이 고치신다.
서기관들은 율법적인 의와 공로를 강조했다. 그래야 복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럴수록 강박적으로 인간적인 의를 내세웠고, 하나님 앞에서 옳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모습이 됐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으면서 말이다. 결국 자유함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뜻과 의, 그리고 사랑과 은혜, 회개와 용서를 가르치셨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 먼저 애타게 찾으시는 사랑 많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정말 이게 다른 점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비로운 아버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사랑.
겉으로 멀쩡하던 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현존하시는 예수 안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더럽혔던 것들이 모두 빠져나왔다. 죄에 매여 있던 영혼이 결국 자유케 됐다. 주님의 꾸짖음은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하게 만들고 기쁘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불신앙이 잠잠히 빠져나오길 바라신다. 고집과 원망이 빠져나오길 바라신다. 죄의 의지가 우리에게서 빠져나오길 바라신다. 우리 영혼에 맑은 울림으로 다가와 더러워진 우리의 심령이 깨끗케 되며 새롭게 거듭나길 바라신다.
잠언25:4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주님은 오늘 바로 이렇게 사용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바라신다.
27절에서 사람들의 감탄이 이어진다. 각자 자신에게 적용해보자.
전혀 바뀔 것 같지 않고, 새로워질 것 같지도 않은 자신이, 주님을 만나 더러운 것들이 깨끗해지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을 통한 예수님의 소문이, 아니 복음이 여러분의 삶에 퍼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