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1일, 주현절 후 3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늘진 구석에 남아 있는 눈덩이가 따뜻한 햇살 앞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때에, 몸과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시142:3)

 

 

  1. 목숨 건 설교

어느 연배가 있으신 선배 목사님께 전화가 왔다.

“김목사 뭐해?”

“설교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김목사는 맨날 전화할 때마다 설교준비한다고 그러냐? 너무 설교에 목숨걸지마!”

“목사님께서 그 때마다 전화하셨습니다. 타이밍이 한결 같으시네요.”

 

서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랬다.

 

선배목사님은 설교를 준비하고 선포하면서 느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해주신다.

 

어차피 교인들은 목회자가 목숨 걸고 준비하는 것만큼 설교를 듣지 않는다. 열심히 설교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목사가 자기에게 어떤 감동을 주며, 설교를 얼마만큼 준비하고 잘하는지 평가하려고 듣지,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어떤 말씀을 주시는지 분간하고 결단하기 위해서 듣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사람은 찬양도 열심히 부르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설교를 듣기는 듣는데, 딴 생각에 빠진 채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설교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어차피 자기 생각대로다. 그래서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리를 오가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성령께 맡기고, 너무 애태워 설교준비에 많은 에너지를 써서 번아웃 되는 일이 없도록 시간 활용을 잘 하라고 해주시는 말씀이었다.

노파심으로 해주신 말들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떤 설교가 정말 은혜로운 말씀이고, 교인들에게 들리게 하면서 감동을 줄 수 있는가? 대중들(관객 같은 교인들)이 요구하는 바에 따른, 결론적인 대답이 있다. 그 대답이 책, 미디어, 특별강연 등을 통해 세상을 덮고 있다. 그 대답은, 연출을 잘 하면 된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저는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성장의 방법과 스킬만 생각하는 편견이 가져다주는 결론이다. 대형화 된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이런 대답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에서 교인으로서의 뿌리를 내리고 믿음이 자리 잡은 신앙인들은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저는 여러분들이 자극적이고 극적인 말씀보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사모한다고 믿는다.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간하며 들을 수 있는 성도들이 정말 성숙한 신앙인이다. 듣기 좋은 말씀, 귀에 달콤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분간해 내고, 그것을 꿀송이처럼 여기는 신앙인 말이다.

 

 

  1. 이사야의 푸른 사명

이사야는 푸른 꿈이 있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는 것이었다. 척박하고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고, 아니 들어주는 사람 찾기 어렵고, 황무한 곳이었지만, 주의 길을 준비하라,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외쳤다. 바벨론의 포로생활에 고달팠던 이들을 위로하고 위로하며 고국으로 돌아와 풍성히 회복될 희망을 전했다.

주님을 바라보는 저에게도 이사야의 푸른 꿈이 제 심령 속에 사라지지 않도록 부어주시길 간절히 원한다. 우리의 마음이 광야요, 우리의 인생이 광야 아닌가? 정말 제게 전화를 주신 목사님의 말씀처럼, 현대 신앙인들은 설교는 듣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고, 마음을 닫아놓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마치 광야로 변하거나, 광야였던 황폐한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한다.

 

그런데 역사는 바로 그 들음, 바로 들음에서 일어난다.

 

롬10:17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살아, 활력이 있기를 바라신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거기서 우리를 고치시고, 깨끗케 하며, 치유와 회복있기를 원하신다. 이 보좌를 사모하며 나온 우리 모두에게 심령의 부흥과 풍성함을 주님이 허락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16절.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바로 듣는 사람, 듣기를 원하는 사람 적음에 대한 걱정이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설득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당연하고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말도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떨까? 사람들은 공허하며 상관없이 듣기 쉽다.

그런데 사람의 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능력이 있다. 들을 사람이 없는 것 같아도, 들을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복된다. 18절을 보라.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않다고 전한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복음으로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교만한 마음으로 들을 것 없다고 심령을 닫고 있는 사람과 겸손한 마음으로 들으려고 귀 기울이는 사람 중에 누가 복되며 역사가 일어날까? 어떤 사람은 설교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인 말들로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까지 사라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모독하는 것이다.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목회하면서 보니까 그는 딱 그만큼의 인생을 살더라.

 

우리가 참 신앙인의 길로 나오길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듣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시편의 가사를 통해, 일반적인 경험으로 말하고 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1. 믿음과 복음

그렇다면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져야 할까?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하나님의 기대를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설교를 들으면서 믿음이 생겨나나길 바라신다.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인간적인 생각이 지워지고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이 생생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여겼다.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시는 언약 앞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에는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여겼다. 역시나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신앙적으로 실족하고 실망하는 것은 왜 그런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다. 그 방법이나 과정 때문에 실족한다. 예배든 기도든 마찬가지다. 예배나 기도 때문에 실족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 이루어지는 방법과 과정 때문에 실족하기 쉽다.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 그리고 길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이사야는 이런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55:8),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그렇다면 방법이나 과정 때문에 실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기대를 바라야 하는가? 바로 높으신 하나님을 믿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순종하라.

 

아브라함은 어땠는가? 인간적인 기대와 바람이 번번이 무너지고 상심하는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엘리에셀이라는 방법, 이스마엘이라는 방법에 답을 얻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삭이라는 방법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방법이 무너지고 지워지면서 믿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까지도 허락하셨다. 실망과 낙심을 통해 인간적인 생각은 지워지고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이 생생해졌다. 아브라함은 99세나 되었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다. 출산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약속과 소망과 믿음을 더하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로마서4장은 이런 섭리는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도 위함이니라.”(23-24)고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낙심과 실망과 후회 속에서 믿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과 생각과 뜻은 지워지는 대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에 대한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기를 바라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히11:1).

두 번째는 복음을 듣기를 바라신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복음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약속인가? 세상 출세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인가? 세상의 권세와 능력을 거머쥐는 것인가? 이야말로 세상적인 메시지이다. 주님은 이런 것들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면 얼마나 많은 현대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복음을 듣지 못하고 세상적인 메시지로부터 복음을 들으려고 하는가? 잠언15:6은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말씀했다. 많은 소득과 번영과 부유가 곧 복음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죄인이나 천대 받는 이들에게, 자존감이 낮은 이들에게 찾아가셔서, 충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셨다. ‘나는 나을 수 없다’고, ‘그럴만한 자격도 없다.’고 포기하고 있는 병자들에게 찾아가셨고, 하나님께서 죄의 용서와 사함받기를 원하신다면서 고치시고 낫게 하셨다. 누구든 하나님께로 돌아와 용서받고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셨다. 행복하고 복되게 살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우리의 가정, 직장, 삶의 모든 자리에 임하도록 살라고 부르셨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러니까 복음은 오늘 우리가 예수를 만나, 그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오시지 못하도록 마음 문을 닫고, 아예 예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예배자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아무리 극적이고 감동적이며 좋은 설교를 들어도 예수 만나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면, 복음을 들은 것 아니다. 주님을 우리가 복음을 듣기 위해 정말 우리의 마음을 겸손히 낮추고 마음을 활짝 열며 은혜를 입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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